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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토록 Sep 19. 2022

언젠가 나도 꽃을 피울 때가 올 것이라

S 배우는 앙상블 배우들 사이에서 입지적인 인물 중 하나로 꼽힌다. 소극장 앙상블 배우로 시작해 대극장 뮤지컬의 주인공까지 올라갔다. 이런 일은 공연계에서 극히 드물다. 대극장 뮤지컬 주인공은 거의 데뷔 초부터 주조연 배역을 맡아 무대를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앙상블 배우를 하다가 배역을 맡아 조연, 주연으로 올라가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렇기에 S 배우는 앙상블 배우들 사이에서 꿈의 배우로 불렸다.


이런 현실이 너무 속상하다. 공연 내내 다양한 역할로 변신해 춤과 노래를 선보이고 이따금 주어지는 대사를 소화하며 무대를 채우는 앙상블 배우들 연기 수명이 너무 짧다. 그들은 2~3시간가량 쉼 없이 춤추고 노래해야 한다. 열량 소모가 많다. 30대에 접어들면서는 체력적으로 버거워지기 시작한다. 또 배우는 선택받는 직업이다. 작품이 없을 때는 백수와 같다. 그 기간이 조금이라도 길어지면 생계유지가 힘들다. 언제 작품에 투입될지 모르니 시간을 정해 놓고 하는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다.


여자 앙상블 배우들은 서른이 넘어가면 고민이 많아진다. 앞으로 배역을 맡아 조연급으로까지 올라가지 못하면 치고 올라오는 젊은 혈기의 배우들에게 밀리게 되니 배우의 길을 언제까지 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할 수밖에 없다. 남자 배우들이라고 다른 건 아니다. 내가 아는 모 배우는 서른다섯 살까지 자신의 이름을 제대로 알리지 못하면 그때는 미련 없이 업계를 떠나겠다고 했다. 진짜로 그 나이가 되고서도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 않자 서서히 무대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현재 다른 일에 몰두하고 있다.


나이가 들고 가정을 꾸리며 아이들이 생기면서는 불규칙하게 투입되는 앙상블 배우로서 생계유지를 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이러니 현실적인 문제 앞에서 결단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떠나간 배우들을 많이 봤다. 매력적인 음색을 갖고 있음에도, 노래 실력이 상당히 뛰어나 보임에도 배역을 맡아 무대에 서는 건 정말이지 선택받은 자들만의 몫이다.


나 또한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한다. 수많은 일개미 중 하나인 나도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한 살 한 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일과 쉼의 불균형이 버겁게 느껴진다. 남들 일할 때 그 이상으로 일한 것 같은데, 남들 쉴 때도 나는 일한 것 같은데, 나는 얼마나 성장해 왔는지, 궁극에는 어떤 식으로 보상받을 수 있을지 여전히 알 수가 없으니 말이다.


갑자기 번아웃이 확 몰려와 모든 걸 다 놓고 싶어지는 때가 오는 건 아닐지 걱정이 다. 앞으로의 10년이 잘 그려지지 않고 불투명한 미래가 조금씩 마음을 무겁게 다. 좋아하는 일만 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생각했던 나의 패기는 점점 그 힘을 잃어간다. 현실적인 고민들이 늘어만 다.






“OO 누나, 이번에 차 또 바꿨데”

“정말? OOO로 바꾼 지 얼마 안 됐을 텐데?”


한때 신드롬급 큰 인기를 누렸던 TV 드라마 출연으로 인지도가 급상승한 연극배우 출신의 J 배우. 점점 TV에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한때는 공중파 방송국 3사 드라마에서 비중 있는 조연으로 얼굴을 많이 비췄다.


나는 배우의 발음에 매우 민감한 편이다. 명연기를 펼치는 모든 배우의 발음이 언제나 정확하진 않다. 다소 어눌하고 뭉개진 발음조차 배우가 가진 하나의 개성이 되기도 하는 시대다. 하지만 나는 배우의 목소리와 발음에 민감하기에 J 배우의 연기를 좋아한다. 무대 연기를 오래 하면서 나이가 꽤 있음에도 적잖은 생활고에 시달렸던 것으로 안다. 뒤늦게 TV로 진출해 큰 사랑을 받는 걸 보면서 역시나 오랜 시간 쌓은 탄탄한 연기 내공은 언제고 대중이 알아봐 주고, 또 큰 사랑을 받을 수 있게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된다.


오랜 세월 대학로 소극장 무대 위에서 무명의 배우로 힘들게 살다 영화의 주조연으로 활약하는 배우들이 이미 많다. 나와 함께 작업을 했던 배우들도 40대에 접어들면서 서서히 TV나 스크린으로 활동 영역을 넓혀간다. 서서히 주목받게 되는 과정을 지켜보면 내 일 마냥 기쁘다. 업계에 알려진, 꽤 이름 있는 배우 매니지먼트와 계약하거나 비중 있는 조연급으로 출연하게 됐다는 뉴스를 접할 때면 내 친구나 가족 중 누가 잘 되는 것 같아 신나고 감격스럽다.


허름한 술집에서 소주잔 기울이며 연기 고민, 불확실한 미래를 걱정하며 씁쓸하게 웃곤 하던 배우들의 눈부신 날갯짓은 이제 막 무대 연기를 시작하는 후배들에게 희망이 된다. 스타가 아니어도 된다. 병아리 연기자들에게는 그 작은 성공마저 엄청난 꿈의 실현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나도 아직은 ‘무명의 배우’를 벗어나지 못한 이들에게 반드시 때는 온다는 말을 하며 다독이곤 한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너는 겨울 산에 던져져도 꽃을 피울 사람이야” 4월에 피는 꽃이 있고, 5월에 피는 꽃도 있다. 때로는 겨울산에서도 꽃이 피기도 한다. 누구나 자기 인생에서 자신만의 꽃을 피우는 바로 그때가 있다는 사실. 그들에게도 나에게도 해 주고 싶은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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