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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책'임 30화

<한국이란 무엇인가>

2025년 6월 첫째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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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L.jpg 어크로스


호랑이가 도라지 담배를 피던 시절, 조선일보 김대중 주필은 시쳇말로 '이 바닥의 깡패'였더랬다. 사회가 그의 말과 글을 주목하더랬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시대가 아니다. 신문 칼럼이 주목받는 시대는 끝났다.


그럼에도 극히 드문 확률을 뚫고 화제가 된 칼럼이 있었다. 바로 김영민 교수의 <추석이란 무엇인가>(20180922 경향신문發 <"추석이란 무엇인가" 되물어라>)다.

밥을 먹다가 주변 사람을 긴장시키고 싶은가. 그렇다면 음식을 한가득 입에 물고서 소리 내어 말해보라. “나는 누구인가.” 아마 함께 밥 먹던 사람들이 수저질을 멈추고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당신을 쳐다볼 것이다. 사람들은 평상시 그런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

내가 누구인지, 한국이 무엇인지에 대해 궁금해하기보다는, 내가 무엇을 하는지, 한국이 어떤 정책을 집행하는지, 즉 정체성보다는 근황과 행위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진다.

추석을 맞아 모여든 친척들은 늘 그러했던 것처럼 당신의 근황에 과도한 관심을 가질 것이다. 취직은 했는지, 결혼할 계획은 있는지, 아이는 언제 낳을 것인지, 살은 언제 뺄 것인지 등등. “그런 질문은 집어치워 주시죠”라는 시선을 보냈는데도 불구하고 친척이 명절을 핑계로 집요하게 당신의 인생에 대해 캐물어 온다면, 그들이 평소에 직면하지 않았을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게 좋다.

당숙이 “너 언제 취직할 거니”라고 물으면, “곧 하겠죠, 뭐”라고 얼버무리지 말고 “당숙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추석 때라서 일부러 물어보는 거란다”라고 하거든, “추석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엄마가 “너 대체 결혼할 거니 말 거니”라고 물으면, “결혼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거기에 대해 “얘가 미쳤나”라고 말하면, “제정신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아버지가 “손주라도 한 명 안겨다오”라고 하거든 “후손이란 무엇인가”. “늘그막에 외로워서 그런단다”라고 하거든 “외로움이란 무엇인가”. “가족끼리 이런 이야기도 못하니”라고 하거든 “가족이란 무엇인가”.

정체성에 관련된 이러한 대화들은 신성한 주문이 되어 해묵은 잡귀와 같은 오지랖들을 내쫓고 당신에게 자유를 선사할 것이다. 칼럼이란 무엇인가.


김영민 교수는 글 하나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고, 곧이어 책이 나오기 시작했다.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공부란 무엇인가>는 출시 족족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나 역시 나오는 족족 책을 따라 읽었다.


하지만 매 신간마다 '필력은 유지되나, 질이 떨어진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아래와 같은 문장들을 보다 보면, 눈이 아득해진다. 타임킬링 영화를 한편 본 느낌이다.

코끼리를 잡아먹는 뱀이 어디 뱀의 꼬락서니인가. 지구상의 생물 중에서 가장 섹시한 몸매를 가졌다는 뱀조차 모자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어린 왕자가 그 모습을 보고 코끼리를 잡아먹은 보아뱀이라고 이미 주장한 이상, 계속 보아뱀이라고 말하는 것도 틀에 박힌 사고다. 내가 보기엔 그건 월요일에 출근하기 싫어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이불 밖은 위험하다!"라고 고함치는 직장인의 모습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이번 주에 꼽은 이유는 책이 담고 있는 질문 자체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12월 3일 이후로 그는 연일 '한국이란 무엇인지' 묻고 있다.

2024년 12월 3일, 한국은 불시착했다.


도대체 한국이란 무엇인가. 한국은 어디로부터 왔으며, 어디에 서 있으며,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묻는다. 이건 철학의 원초적인 질문과 굉장히 유사하다. 정체성을 뚫어내는 원초적인 질문이 바로 유래, 실태, 방향이다.


그는 12월 3일 비상계엄 이후, 난장판이 된 대한민국을 이 세 가지 질문으로 풀어헤치고 싶은 강력한 충동이 들었을 테다. 그 충동은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뜬금없는 계엄 시도를 통해 공동체의 밥상을 엎은 지금, 한국 보수 우익에게 마침내 자살의 기회가 왔다.


그렇다면 한국 보수 우익은 정말 내리막길을 걸을까. 홍준표의 말마따나 "미쳐도 곱게 미쳐"왔을까. "레밍(집단 자살을 하는 것으로 알려진 동물) 정당이 되어 소멸"할까(20250510 서울신문發<홍준표, 국민의힘 후보 교체에 “레밍정당 소멸…미쳐도 곱게 미쳐라”>). 며칠 뒤 심판의 결과가 나오리라.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명제는 따로 있다. 최장집 교수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이 책은 나중에 꼭 리뷰하리라)가 중요하듯, 이제는 대한민국 이후의 대한민국이 중요하지 않나.


각 후보가 '진짜 대한민국'과 '정정당당한 대한민국'을 내세우는 것을 보고 있자니 '한국이란' 그동안 무엇이었는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이다. 그동안은 가짜였고, 부당하고 비겁했단 말인가.

<어른 김장하>는 김장하에 대한 이야기인 만큼이나 그를 취재한 김주완 기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평생 지역신문 기자로서 살아온 김주완 기자는 그동안 기득권자의 비리와 악행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기사를 주로 써왔다고 자평한다.

그리고 나직하게 덧붙인다.

그런 방식을 통해서 이 사회는 바뀌지 않았다고. 그토록 폭로하고 비판했건만, 세상은 여전히 비리와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고.

<어른 김장하>가 재구성한 김장하의 삶은, 악을 보는 데 지친 김주완 기자가 기어이 보고자 했던 선의 모습이기도 하다.


말마따나 부당하고 가짜였던 대한민국에서 우리가 김주완처럼 기어이 보고자 했던 한국의 민낯은 '선'이었으리라. 더럽고 아니꼬운 것들이 아니라 깨끗하고 참한 것들이리라.


하지만 김영민은 '선' 이전에 '생존'을 먼저 이야기한다. 생존해야 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한국이 죽어가는 시대이기도 하다. 과감하게 선진국을 선언하는 바로 그 시대에 파국의 서사들이 함께한다.

인구가 빠르게 줄고 있다. 인구 감소를 막고자 하는 정책은 모두 실패하고 있다. 인구가 급격히 줄어드는 나라의 경제가 성장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게다가 지구의 위기가 임계점을 돌파했다. 일부 사람들은 아직도 냄비 속에서 천천히 삶아지는 개구리처럼 말하곤 한다. 점점 따뜻해지는군. 그렇다면 한국은 기후위기로 인해 바다에 잠기거나 인구 감소로 지구상에서 사라질까. 꼭 그렇지는 않다.

파국의 아이러니는 파국이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온다는 데 있다. 파국이 채 이르기도 전에 사람들은 앞 다투어 먼저 죽는다. 사람들은 공포에 질리고 인간성을 저버린다. 인간보다 인간성이 먼저 죽는다. 친절을 버리고, 위선을 버리고, 염치를 버리고, 돌봄을 버리고, 연민을 버리고, 관용을 버리고, 인권을 버리고, 끝내 지켜야 할 가치들을 쓰레기처럼 버린다.

바로 그렇게 삶은 죽음 이외의 방식으로 끝장날 수 있다.


12월 3일 그 생존이 위협당한 뒤, 김영민은 처참했던 대한민국을 해부한다. 정치를 발골하고, 역사를 톺아보며, 시대정신을 여과한다. 샅샅이 파헤쳐진 몸뚱이 앞에서 비로소 우리는 깨닫는다. "혁명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혁명을 어떻게 끝내야 하는지를 모른다"는 것을. 나는 이 대목에서 말을 잃었다.

완고한 군부독재를 이겨내고 거리에서 민주화를 달성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주체적 시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유혈사태를 겪었지만, 알고 보면 의탁 대상이 군부 정권에서 민간인 교주로 바뀐 것인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결국 또 다른 타자에의 의존에 불과하다. 그 의존성 때문에 정치도 위기에 처할 수 있다.

가두시위라는 큰 희생을 치르고 혁명을 이루었다고 생각하기에, 정부에게 그만큼 큰 보상과 관심을 요구하고,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정치는 무너지기 시작한다.

혁명 이후의 일상을 살아보면 선과 악은 그다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2016년 촛불시위는 정말 '혁명'이었을까? 그것이 정말 혁명이었다면, 촛불혁명이 약속한 세상은 정녕 도래했을까?

혁명은 일어났으나 혁명이 약속한 세상이 오지 않았을 때 사람들은 "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외친다.

혁명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혁명을 어떻게 끝내야 하는지를 모르기에, 사람들은 그렇게 외칠뿐이라고 인류학자 클리포드 기어츠는 말한 적이 있다.

이제 선거일이 되면, 해변에서 실종된 사람이 혁명가였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투표장으로 가야 한다. 그리고 주체적인 개인이 되어 투표장을 떠나야 한다.


6월 3일, 우리는 투표장으로 가야 하고, 그 투표장을 떠나야 한다.



제목 : <한국이란 무엇인가>

저자 : 김영민

출판 : 어크로스

발행 : 2025.04.10.

랭킹 : 인문 부문 65위 [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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