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5월 첫째 주
나는 잘생기지도 않고, 좋은 학벌을 가진 것도 아니다. 돈이 많은 건 더더욱 아니다. 성적도 4.5만점에 3점 중반대에도 못 미친다. 허점 투성이다.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할까. 자연스러운 고민이었다. 그러니 고민 끝에 찾아낸 전략은 정량평가가 아닌 '정성평가 몰빵'이었다.
내가 면접관들과 평가위원에게 어필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노력.
쉬지 않고 열심히 노력해왔다는 귀납적 증거들을 내밀 뿐이었다.
우리가 어렸을 때 배운 내용 그대로를 현실에 적용코자 했다. '정직하면 복을 받는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뭐 이런 말들.
2020년 1월, 군대를 전역했다. 그 뒤로 쉴 새 없이 일했다. 채 1달도 온전히 쉬지 않았다.
삶의 궤적을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쉴 새 없이 달렸다.
노력하면 누군가는 알아줄 것이라는 강력했던 믿음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믿음은 때론 쉽게 무너졌다. 노력은 무의미하다고, 결국 운이 지배하는 것이라고 절망하길 수차례.
몇 개의 언론사 최종 면접에서 떨어진 뒤, 연구원 한구석 처박혀 있던 이 책을 꺼내 읽었다.
It's not your falut
마음의 위안을 얻은 문장들이 많았다. 하지만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절망을 키워낸 문장들 또한 많았다.
이 책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불평등은 사회구조에서 비롯된다
저자인 연세대 심리학과 김영훈 교수는 이 책을 통해 '구조적인 문제'를 짚어낸다. 대한민국 사회의 잘못들을 딱딱 짚어낸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레 '나'를 향한 비난의 화살이 거둬진다. 위로의 말, 따뜻한 문장이 아니라 차갑고 학술적인 문체에서 보드라움을 느끼는 경이를 체험한다.
이 사회엔 패자부활전이 없다. 한 번 탈락은 곧 몰락이다. 자아실현은 사치가 되었다. 생존은 곧 안정을 의미했고, 정년이 보장되는 직업이 선호되었다. 체제의 입장에서는 청년들이 스스로를 준비가 되지 않은 존재라고 여기게 하는 것이 필요했다. 취직이 되지 않는 이유가 충분한 일자리가 없어서 벌어지는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준비가 되지 않아 생기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그동안 '미취업'은 쉽사리 개인의 문제로 치환됐다. 예컨대 '너 잘못'이라는 말. '요즘 편의점 알바만 해도 200만 원을 버는데..' 같은 말들이 횡행한다. 이런 말 뒤에 따라붙는 수식어들은 대체로 이렇다. '나약하다', '게으르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은 (정반대로) 사회와 구조의 문제를 숨긴다.
정말, 사회는, 기업은 아무런 문제가 없을까. 질 좋은 일자리가 만연한가. 치열하게 경쟁하지 않아도 닿을 수 있단 말인가. 백번 양보해서, 마침내 닿은 그곳에 천국이 기다리고는 있는가.
기본적으로, 좋은 일자리라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고강도의 저임금 일자리에 취직한 청년은 말할 것도 없고, 바늘구멍 통과해 대기업이나 공기업 정규직으로 취직했다 해도 직업적인 보람이나 안정감을 느끼는 청년도 거의 없다. 지금 이 사회는 어떤 방식으로 청년을 돕고 있는가.
그러니 청년들이 사회를 불신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 아니던가. '벌레(충) 같이 살고 싶진 않아'라는 챕터의 워딩은 조금 더 거세진다.
하지만 이런 불신의 소용돌이를 빠져나올 해법은 결국 '이타심'이라는, 다소 추상적인 결론이 아쉬울 따름이다.
“이런 청년들에게 역경을 이겨내고 큰 꿈을 가져야 한다는 말은 당연히 ‘개소리’처럼 들린다. 이런 마음의 지옥을 넘어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신의 능력과 노력, 그리고 인격이 타인으로부터 정당한 대우, 즉 인간으로서 존중을 받아 보는 경험을 통해 존엄에 대한 감각을 가지는 것이다.”
물론 그 이타심을 통해 우리 사회가 그동안 잊고 있었던 질문이 마침내 되새겨져 나온다.
우리는 지금 어떤 사회를 살고 있나.
우리는 어떤 사회를 지향해야 하는가.
해답은 청년이 쥐고 있다. 역사가 증명하듯,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에게서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정세랑 작가가 <피프티 피플>에서 말하듯,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안전법들은 유가족이 만든 것'이니까. 청년이 곧 현재이자, 미래이니까.
'우리는 얼마나 망가졌나'를 청년의 입장에서 되뇔 때, 마주한 아래의 문장들에서 소름을 느꼈다.
OECD 가입국 중에서 노동시간이 가장 길고 수면 시간이 가장 짧은 나라, 아무리 노력을 해도 답이 없는 나라, 자살률이 가장 높고 출산율은 가장 낮은 나라에서, 나라를 떠나거나 아니면 남아서 벌레가 되는 선택만 있다고 느끼는 청년들이 이제 말하기 시작했다.
줄줄이 늘어선 초록색 빈 병으로 어지럽혀진 대학가의 술집 취객에게, 외로움을 둘 공간조차 없이 비좁은 고시원의 세입자에게, 자정의 어둠을 몇 달째 지켜온 무표정한 아르바이트생에게, ‘이 나라에서 무엇을 원하는지’ 물어보라. 그들은 서슴없이 멸망을 입에 담을 것이다.
감히 멸망을 말하지만 악의조차 감지되지 않는 평온한 목소리에 당신들은 경악해야 한다. 청년들은 더 이상 꿈을 꾸지 않으며, 불공평한 생존보다는 공평한 파멸을 바라기 시작했다.
나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의 청년으로써, '노력은 정말 배신하지 않냐'는 초등학교 아이들의 물음에 답을 잃었다.
제목 : <노력의 배신>
저자 : 김영훈
출판 : 21세기북스
발행 : 2023.07.19.
가격 : 19,8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