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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책'임 29화

<모래는 뭐래>

2025년 5월 넷째 주

by all or review
창비


문학을 무시했던 때가 있었다. 하등 쓸모없는 분야라고 생각했다. 아니, 적어도 '나에게'는 쓸모가 없는 것만 같았다. 최근까지도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이었음을 고백한다.


지금은 생각이 좀 바뀌었다. 딱 떨어지는 명확한 계기가 있지는 않다. 다만 시간이 흐를수록 모든 것에 민감해져야 하는 이 언론계에서, 문학의 힘은 분명히 강하게 작용하는 것만 같다.


지난 달 언론진흥재단 수습기자 교육에서, 김유태 기자 강의를 들었다. 한강 작가가 노벨상을 수상한 뒤, 한강 단독 인터뷰를 실었던 그 기자다. 김유태 기자가 한강 작가 수상 후 본인의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썼다.

개인적으로는... 내가 10대 때부터 낡은 도서관 책장 옆 구석에 앉아 누레진 책을 펼치면서 굳게 믿고자 했고 기대고자 했으며 애써 껴안고 나 스스로도 부축받으려 했던 바로 그것, 그 작은 믿음(들)이 거대한 경이로 뒤바뀌어 지금 이 순간에 현실로 벌어지고 있다는 것...

이 감정은 나 개인의 감정만이 아닐 것이다. 문학에 감염됐거나 감염돼 본 자들은 이 기분을 알 것이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었다는 것, 모두가 믿어왔던 '문학'이라는 가치가 지금 '실현'되고 있다는 것... 그 생각을 할수록 나는 자꾸만 눈물이 난다. 멀리서나마 나의 작은 글로, 그 모두의 마음에 한 발짝 담그며 동참했다는 것, 그 사실만으로 행복해지고 충만해진다....


(대학 신문사 기자를 했다가, 문학계 등단했다가, 매일경제 기자하다가, 때려쳤다가, 다시 매일경제 들어간) 그의 말을 빌려보자. 문학은 일종의 바이러스다. 사람들 내면을 깊숙이 파고드는 전염병이다. 눈물, 행복, 충만함을 선사하는 질환이다.


문학과 저널리즘의 현대적 유용성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던 찰나, 질문 기회가 있어서 혼자 김유태 기자에게 질문 3~4개를 했다. 완벽한 질문도, 완벽한 대답도 아니었던 티키타카였다. 하지만 그 패스게임에서 나는 조그마한 힌트를 얻었다.


예컨대 '문학과 저널리즘이 조우하는 지점'이랄까. 딱딱할 것만 같은 저널리즘과 물렁할 것만 같은 문학이 융화되는 느낌이 저릿했다.


이 고민을 언젠가 했던 적이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책장을 뒤졌다. 그리고 이 책 <모래는 뭐래>를 뽑아냈다.


황인찬 시인이 <모래는 뭐래>에 대한 해설을 써놨다. 제목은 <모래알처럼 무수한 '너'를 그리며>.

훌훌 넘어가기엔 발에 차이는 까다로운 단어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두번, 세번 읽어내려갔다.

시가 우리에게 유용한 까닭은 시가 타자에게로 진정 가닿고자 하는 양식이라는 데 있습니다. 존재를 은폐하는 장막인 언어를 활용하여, 오히려 언어의 한계를 뚫고 존재를 마주하도록 운용되는 것, 그 역설이야말로 시의 가장 특별한 기능 가운데 하나 일 것입니다.

시가 존재를 만나 기쁨을 누리는 방식은 어떤 아름다운 존재를 자꾸 부르고, 또 부르며 존재와 마주하는 것입니다. 이를 시의 '영점 조준'이라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시는 끝없는 실패는 내정하고 있습니다. 언어를 통해 언어 바깥을 향하는 것이 시의 운행방식이지만, 언어로 언어 바깥을 향하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실패가 시의 운명이겠지요. 아무리 반복한들 우리가 대상과 진정으로 만나는 일은 없을 것이고, 시와 대상의 영점이 완전히 맞아떨어지는 일 또한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오늘날의 시가 마주하는 것은 사물과 진정으로 마주할 수 없다는 불가능이며, 사물과 우리 사이에 놓인 장벽이고, 나아가 그것을 마주하고 있는 '나' 자신이기도 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타자와 진정으로 만나는 일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끊임없는 실패에 시달리는 것, 그럼에도 그 반복을 멈추지 않는 것.

그리하여 존재를 마주할 때의 기쁨과 당신과 만날 수 없다는 절망을 동시에 누리는 것.

시의 아름다움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 그 반복을 탁월하고 아름답게 수행하는 시가 있습니다.


왜 시를 읽어야 하는가. 실패할 것이 자명함에도 시를 읽는 까닭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황인찬은 '존재'에서 답을 찾는다. 영점 조준을 통해 무한히 수렴하는 곡선의 기울기를 따라, 흐르고 흘러 가닿을 도착지. 쉬운 말로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원동력이랄까.


독자와 시인의 관계가 독자와 기자의 관계만큼이나 멀다는 것을 체감하는 요즘이다. 그 거리감을 좁혀내기 위해 애쓰는 상황에서 이 글은 색달랐다. '존재를 마주하기 위해 끝끝내 반복을 멈추지 않는다'니. '실패에 시달리면서도 계속해서 영점을 조준'하다니.


그렇다. 정끝별 시인은 그런 시인이다(내가 감히 이런 말을?). 존재에 가닿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 사람. <시인은 누구?>를 보자.

시인은 누구?

노래 안에 사람이 있고 노래 밖에 사람이 있다
노래가 된 사람이 있고 노래를 사는 사람이 있다
노래를 빚는 사람이 있고 노래를 훔치는 사람이 있다
노래를 하는 사람이 있고 노래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

내 젊어서 꿈은 앞쪽이었으나 사십 년 시를 쓰다 보니 앞뒤 분간이 어렵고 뒤쪽 또한 쉽지 않다는 걸 이제는 알겠다


기사를 쓰는 기자는 진정 뒤에 있는 것일까. 故김민기 말마따나, 편집 기자는 뒷것인 셈인가.


하루 종일 앉아서 기사를 편집하다 보면 여러 가지 생각이 스친다. '이딴 걸 기사라고 쓰는 건가'싶기도, '이런 기사는 왜 돈 받고 안 파는 건지' 싶기도 하다.


작정하고 네이버와 다음, 홈페이지 상단에 걸어놓기 시작하면 조회 수가 올라간다. 그렇다면 본질은 콘텐츠인지, 형식인지 헷갈린다.


도대체 기사의 본질은 뭐지. 기자의 덕목은 뭐지. 뭐지. 헷갈리고, 고민된다. 지극히 개인적인 고민이다.


<모래는 뭐래>와 같은 본질적이고 '존재접근적'인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한 주였다.

<모래는 뭐래>

모래는 어쩌다 얼굴을 잃었을까?
모래는 무얼 포기하고 모래가 되었을까?
모래는 몇천 번의 실패로 모래를 완성했을까?
모래도 그러느라 색과 맛을 다 잊었을까?
모래는 산 걸까 죽은 걸까?
모래는 공간일까 시간일까?
그니까 모래는 뭘까?

쏟아지는 물음에 뿔뿔이 흩어지며

모래는 어디서 추락했을까?
모래는 무엇에 부서져 저리 닮았을까?
모래는 말보다 별보다 많을까?
모래도 제각각의 이름이 필요하지 않을까?
모래는 어떻게 투명한 유리가 될까?
모래는 우주의 인질일까?

설마 모래가 너일까?


'모래'에 대한 질문 방향이 '안(뭘까)'에서 '밖(너)'으로 바뀐다. 정확히는, '당신'에게로 향한다.


이렇듯 내 질문이 가닿을 목적지가 결국 당신이다.

독자인 당신에게 남겨놓을 시구 두 개를 뽑았다. 언젠가, 어떻게든 이 문구가 모두에게 가닿기를 바란다.

<뽀또라는 이름의>

활처럼 기지개를 켜봐, 꼬리를 치켜세우고 유유히 걸어봐, 오늘 안녕과 내일 안녕 사이를!
<청파동 눈사람>

남영동 굴다리를 건너자
함박눈이 쏟아졌다
왔던 곳을 향해
너는 삼각지로 나는 서울역으로

청춘이란
그렇게
파국을 향해 직진하는 것

제 끝을 향해 달려가는 것

멀어지는 두 끝 사이에 함박눈이 쌓였다

우리는 저마다의 끝을 향해 파국으로 달려 나가는 청춘일지라도, 활짝 기지개를 켜고 오늘과 내일의 안녕 사이를 유유히 걸어봅시다.


파이팅.



제목 : <모래는 뭐래>

저자 : 정끝별

출판 : 창비

발행 : 2023.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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