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2월 첫째 주
일본에서 가장 권위 있는 순수 문학상(아쿠타가와상)과 서점대상(참고로 2019년 일본 서점 대상은 '책'임 시리즈 첫 소개작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다.)을 수상한 책이 있다. <편의점 인간>. 그야말로 2016년을 휩쓸었던 책이다. 책 보다 먼저 접한 수상내역에 기대감이 한껏 치솟았다.
하지만 책장을 넘기다 보면, 기대는 산산이 무너진다. 돌려 말하지 않겠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이게 무슨 돌+I 같은 내용이야?'를 외치게 된다.
이 책을 쓴 무라타 사야카는 오랫동안 편의점에서 알바를 했다. 1년? 2년? 무려 18년. 18년간 한 편의점에서 일했다.
그리고 본인과 똑같이 18년째 같은 편의점에서 알바를 하고 있는 소설 속 주인공 '후루쿠라 게이코'. 모태솔로에 대학 졸업 후 취직 한 번 못 해본 서른여섯 살 게이코는 어려서부터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말도 제대로 못 한다고 구박받던 게이코가 처음으로 '존재하기 시작'한 게 편의점이었다.
나는 아까와 같은 음색으로 큰 소리로 인사하고 바구니를 받아 들었다. 그때 나는 비로소 세계의 부품이 될 수 있었다. 나는 ‘지금 내가 태어났다’고 생각했다. 세계의 정상적인 부품으로써의 내가 바로 이날 확실히 탄생한 것이다.
게이코는 '존재하기'를 시작했지만, 그저 부품일 뿐이었다. 원활하게 편의점을 돌리기 위한 부품인 셈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편의점은 게이코로 인해 유지되고 있었다. '강제적 정상화' 혹은 '즉각적인 이물질 제거' 등이 편의점을 유지하기 위한 알바 업무다. 들어온 손님을 맞고, 정확하게 계산한 뒤, 빈 매대를 채우는 것.
이곳은 강제로 정상화되는 곳이다. 이물질은 바로 배제된다. 좀 전까지 가게를 가득 채우고 있던 불온한 공기는 말끔히 사라지고, 가게 안의 손님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늘 사는 빵이나 커피를 사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18년간 '정상화 업무'를 도맡던 게이코 옆에 '시라하'라는 알바생이 추가된다. 세상을 비관하는 시라하. 문제는 시라하와 게이코가 나누는 대화가 갑자기 산으로 간다는 점이다.
“이 세상은 이물질을 인정하지 않아요. 나는 줄곧 그것 때문에 괴로워해왔어요. 모두가 발걸음을 맞춰야만 하는 거죠. 30대 중반인데 왜 아직도 아르바이트를 하는가. 왜 한 번도 연애를 해본 적이 없는가. 성행위 경험이 있는지 없는지까지 태연히 물어봅니다. ‘창녀와 관계한 건 포함시키지 말고요’ 하는 말까지 웃으면서 태연히 하죠, 그놈들은. 나는 누구한테도 폐를 끼치고 있지 않은데, 단지 소수파라는 이유만으로 다들 내 인생을 간단히 강간해 버려요.”
나는 어떤 심정이었나 하면, 시라하 씨를 성범죄자가 되기 직전의 인간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기 때문에 곤란을 겪은 여자 알바생이나 여자 손님은 생각지도 않고 자신의 고통에 대한 비유로 강간이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사용하는 시라하 씨를 보면서, 피해자 의식은 강한데 자신이 가해자일지 모른다고는 생각지 않는 사고 회로를 갖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 세상은 현대사회의 거죽을 쓴 조몬 시대(일본의 신석기 시대)예요. 커다란 사냥감을 잡아 오는 힘센 남자에게 여자들이 몰려들고, 마을에서 제일가는 미녀가 시집을 갑니다. 사냥에 참가하지 않거나 참가해도 힘이 약해서 도움이 안 되는 남자는 업신여김을 받죠. 구도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어요.”
“네에.”
얼빠진 맞장구밖에 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시라하 씨 말을 완전히 부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편의점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교체되고 있을 뿐, 줄곧 같은 광경이 계속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후루쿠라 씨는 왜 그렇게 태연해요? 자신이 부끄럽지 않아요?”
“예? 왜냐고요?”
“알바만 하다가 할망구가 되어 이제 시집갈 데도 없잖아요. 당신 같은 여자는 처녀라도 중고예요. 너저분한. 한 무리에서 짐이 될 뿐이죠. 나는 남자니까 아직 만회할 수 있지만, 후루쿠라 씨는 이제 어떻게 할 수도 없잖아요.”
"시라하 씨, 결혼만이 목적이라면 나랑 혼인신고를 하는 게 어때요?”
내 자리에 두 잔째 뜨거운 물을 놓고 의자에 앉으면서 말을 꺼내자, 시라하 씨가 “예?”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간섭받는 게 싫고, 무리에서 겉돌기 싫다면 결혼하면 되잖아요? 그러니까 취직에 관해서는 모르지만, 결혼하면 우선 연애 경험이나 성 경험에 대해 간섭당할 위험은 없어지지 않을까요?”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어이가 없군요. 미안하지만 나는 후루쿠라 씨한테는 발기가 되지 않습니다.”
“발기요? 그게 결혼과 무슨 관계가 있죠? 결혼은 서류상의 문제고, 발기는 생리 현상인데요.”
시라하 씨가 입을 다물었다.
이 막장 드라마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게이코의 '공격'에 순순히 '순응'하는 시라하의 답변이 가관이다.
시라하 씨는 잠시 침묵을 지킨 뒤,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나를 숨겨줘요.”
“네?”
“나를 세상으로부터 숨겨달라고요. 나 자신은 계속 여기에 숨어 있고 싶습니다. 생판 남한테 간섭받는 건 이제 진저리가 나요. 밖에 나가면 내 인생은 또 강간당합니다. 남자라면 일을 해라, 결혼해라, 결혼을 했다면 돈을 벌어라, 애를 낳아라. 무리의 노예예요. 평생 일하라고 세상은 명령하죠. 내 불알조차 무리의 소유예요. 나는 평생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죽을 때까지 평생 누구한테도 간섭받지 않고, 그냥 숨을 쉬고 싶어요. 그것만 바라고 있습니다.”
시라하 씨는 기도하듯 두 손을 모았다.
그렇게 시작한 동거. 동거 이야기는 그리 길게 묘사되지는 않는다. 무탈하게 지내는 정도랄까. 예컨대 CGV 알바생 '미소지기'로 연애를 시작해서 동거까지 이어지는 로맨틱한 이야기가 아니다. 시작점 자체가 다르다. 삶의 끝자락에서 만난 두 사람이 어기적거리며 동거를 시작한 이야기다. '사랑'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 동행하기 시작한 거다.
둘의 이야기가 또 한 번 퀀텀 점프를 뛰는 지점은 비로소 18년 만에 편의점을 그만두겠다고 한 장면이다. 의외로 '퇴사'를 기쁘게 이해하는 사람들에게서 게이코는 낯섦을 느낀다. 특히 자신이 만난 편의점 8번째 점장은 아예 퇴사 따윈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말한다.
나는 2주 전의 일을 생각해 냈다. “그만두게 해 주세요” 하고 말했는데, 점장은 무척 기뻐하는 것 같았다.
“아, 드디어!? 시라하 씨가 남자다움을 보여준 건가?”
알바를 그만두는 것은 곤란하다, 일손이 부족하니까 후임자를 소개한 뒤에 그만둬달라고 늘 말하던 점장인데, 웬일로 기뻐하는 것 같았다. 아니, 이제 점장이라는 인간은 어디에도 없는지 모른다. 눈앞에 있는 것은 인간 수컷이고, 자기와 같은 생물이 번식하기를 바라고 있다.
18년 동안 그만두는 사람을 몇 명이나 보았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그 빈틈은 메워져 버린다. 내가 없어진 자리도 눈 깜짝할 사이에 충원되고, 편의점은 내일부터 전과 똑같이 굴러갈 것이다.
이 대목의 핵심은 마지막이다. irreplaceable(대체 불가능한). 편의점에서 18년간 일해도 irreplaceable 해지지 않는다. 단순 반복 작업은 '미얀마에서 온 신입 종업원'에게 쉽게 대물림된다. 게이코가 내뱉은 약간의 탄식과 한탄 속에 책은 비로소 막바지를 향해 간다.
새로운 일을 구하기 위해 면접장에 가는 길. 잠시 시라하는 화장실에 들르고, 게이코는 편의점으로 향한다. 편의점 매대 앞에서 게이코는 무언가에 사로잡힌다.
나에게는 편의점의 ‘목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편의점이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 어떻게 되고 싶어 하는지, 손에 잡힐 듯이 알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초콜릿 몇 개와 가격표를 잘 보이는 위치로 옮긴다. 손에 익어버린 노하우를 막 쏟아내는 찰나.
시라하 씨는 어느새 화장실에서 나와 내 손목을 움켜잡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까불지 마!”
그는 “무슨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거야!”라고 소리치며 나를 가게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길까지 나를 질질 끌고 가면서 호통을 치는 시라하 씨에게 나는 말했다.
“편의점의 ‘목소리’가 들려요.”
내 말에 시라하 씨는 역겨운 것을 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나는 물러나지 않았다.
“몸속에 편의점의 ‘목소리’가 흘러들어 와서 멈추질 않아요. 나는 이 목소리를 듣기 위해 태어났어요.”
“무슨……..”
시라하 씨에게 여유를 주지 않고 내 말을 이어나갔다.
“이제 깨달았어요. 나는 인간인 것 이상으로 편의점 점원이에요. 인간으로서는 비뚤어져 있어도, 먹고살 수 없어서 결국 길가에 쓰러져 죽어도,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내 모든 세포가 편의점을 위해 존재하고 있다고요.”
웃긴다고? 천만에. 이 책의 절정은 편의점에게 보내는 작가의 편지다. 작가는 '편의점과 성관계'까지 생각할 정도로 진심이다.
[부록] 편의점에게 보내는 편지.
퇴근할 때, 문득 당신의 난처한 얼굴이 보고 싶어 이렇게 말을 걸었지요.
“편의점과 인간이 섹스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난 당신의 얼굴이 빨개지거나 곤혹스러워할 줄 알았어요. 근데 당신은 거리낌 없이 대답했습니다.
“무슨 말이야? 벌써 하고 있잖아? 당신은 날마다 내 안에 들어와 있는걸.”
고지식한 얼굴로 당신이 그렇게 말했을 때, 우리는 연인 사이가 되었구나 하고 생각했답니다.
내가 당신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당신이 나를 인간으로 만들어주었기 때문입니다. 다들 당신은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당신을 만날 때까지 사람이 아니었던 건 오히려 나였습니다. 적어도 능숙하게 인간 노릇을 할 수 있는 인간은 아니었지요. 당신 옆에 있음으로써 비로소 나는 인간이 되었던 것입니다.
게이코가 말하는 '편의점 인간'이란, '인간 그 이상'이다. 본인의 정체성이 확립된 곳이자, 심리적인 안정감을 제공하는 곳. 편의점에 열과 성을 다하는 사람이다.
게이코를 '편의점에 있는 인간'이라고 폄하할 수도 없다. '편의점에 있는 인간'이라는 표현은 방점이 여전히 '인간'에게 있기 때문이다. '편의점 인간'이라고 말해야 비로소 편의점과 인간이 같은 무게를 지닌다.
어떤 면에서는 대단히 일본스러웠다. 사무라이 시대에서부터 이어지는 일종의 장인정신처럼 말이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스시 장인: 지로의 꿈>을 보면 초밥을 만드는 셰프 지로가 나온다. 미슐랭 3 스타를 받은 셰프다. <흑백요리사> 심사위원 안성재 셰프가 미슐랭 3 스타니까, 그와 비슷한 체급이라고 보면 되겠다. 지로 셰프가 하는 일은 묵묵히 매일매일을 누적해 나가는 것뿐이다. 너무 단순해서 민망할 지경이다. 지로와 같이 편의점을 정상화시키는 장인정신을 발휘한다고 해야 이해가 쉬울까.
김웅(현 국회의원) 작가가 쓴 책 <검사내전> 맨 앞부분 프롤로그엔 '나사못처럼 살아가겠다던 선배를 기억하며'라는 글이 있다.
거대한 여객선의 작은 나사못인 자신의 임무는 배가 어디로 가는지를 걱정하기보다 자신이 맡은 철판을 꼭 물고 있는 것이라는 한 선배의 말에 '존경'이란 감정을 느꼈다.
게이코는 '편의점 인간'이 아니라 '편의점 장인'이라고 불러야 한다. 그리고 편의점 장인은 '사회'라는 배가 순항하도록 철판을 꼭 물고 있는 사람이겠다.
그러니 이제는, 내용과는 무관하게 일본을 휩쓴 이유도 알 수 있겠다.
제목 : <편의점 인간>
저자 : 무라타 사야카
번역 : 김석희
출판 : 살림
발행 : 2016.11.01.
가격 : 12,600원
수상 : 2016 야쿠타가와상 / 2016 일본 서점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