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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진 Jan 29. 2022

라가불린 16년

은희경  「중국식 룰렛」


그녀가 떠난 뒤 어느날이었다. 그날 양주장에서 술을 꺼내다가 안쪽에 아내가 따로 모아둔 씽글몰트 위스키병을 무심히 세어보았다. 열여섯병. 공교롭게도 우리가 함께 산 햇수와 똑같았다. 아내가 내려놓고 간 밀봉된 시간의 단위처럼 느껴졌다고나 할까. 그 순간 그녀는 이제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확실히 깨달았다. (...) 아내의 컬렉션 중에는 귀한 술도 몇병 있었다. 거기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어쩐지 그 병들은 우리의 십육년 중에 최고의 시절을 담고 있는 듯 여겨졌기 때문이다.  /14p


아내는 특별한 날에만 라가불린 16년을 마셨다. 언젠가 아내는 행복한 사람에게 특별한 날이란 기쁜 날이 아니라 슬픈 날이라는 말을 했다. 행복하다는 말은 농담이겠지만 어쨌든 라가불린은 아내가 슬플 때 마시는 술이었던 것이다. 그 술이 품고 있는 바다냄새와 연기의 향이 자기가 자란 고향의 저녁 풍경을 떠올리게 해준다고도 말했다. (...) 떠들썩한 모임에 참석하고 있는 내게 휴대전화로 사랑해요, 라고 말해서 나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미안해요. 지금 사랑한다는 말을 꼭 해보고 싶은데, 그 말을 해도 되는 사람이 당신밖에 없어서 전화했어요. 이렇게 말할 때는 혀가 조금 꼬여 있었다.  /36p




술이 식도를 따라 내려갈 때 숨을 자연스럽게 뱉어보세요. 그때가 하이라이트인데, 향이 코끝까지 올라오는 기분을 느껴봐야죠. 삼키고 나서 위장 속으로 떨어지는 뒷맛, 그것도 빼놓으면 서운하고요.


위스키는 숙성시키는동안 매년 2퍼센트에서 3퍼센트 정도가 증발하죠. 그걸 '천사의 몫'이라고 불러요. (...) 천사들은 술을 가리지 않아요. 모든 술에서 공평하게 2퍼센트를 마시죠. 사람의 인생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증발되는 게 있다면, 천사가 가져가는 2퍼센트 정도의 행운 아닐까요. 그 2퍼센트의 증발 때문에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것 같군요.  /44p





은희경  「중국식 룰렛」 (창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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