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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유진 Feb 18. 2022

웰컴 투 항암월드 63화

실화 소설

  바깥노인이 일어나 깍듯하게 인사를 하자 날카로운 얼굴의 젊은 의사가 물었다.


  “보호자 분, 결정하셨어요?”


  “그게, 아직. 너무 갑자기라….”


  이때 휴대폰이 또 울렸다.


  “시~계바늘처럼~ 돌고 돌~다가~.”


  “아이쿠, 죄송합니다. 애비야, 지금 주치의 선생님과 말씀을 나누는 중이다.”


  노인은 서둘러 전화를 끊은 다음, 고개를 연신 숙이며 부탁했다.


  “선생님, 저희에게 하루만 더 시간을 주세요.”


  “흐읍. 가급적 빨리 결정해 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의사는 아무런 표정 없이 나갔다. 노부부가 걱정스레 나누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항암 치료를 안 받겠다는 안노인을 바깥노인이 설득하는 분위기였다.


  “아이쿠, 이 사람아. 치료를 받으면 낫는다잖아. 왜 미리부터 포기를 하나.”


  “난 살 만큼 살았어요. 살아서는 못 만났으니 이제라도 저 세상에 가서 우리 언니도 보고, 이북에 남은 아부지랑 어무이, 오라버니도 만날랍니다.”


  “자네는 어찌 자네 생각만 하나? 내 생각은 안 해? 우리 애들은?”


  “아유, 그러니 가족들한테 고생 안 시키고 가려고 그러는 거 아니유.”


  “어허, 이 사람이.”


  말문이 막힌 노인을 효도 폰이 도왔다.


  “시~계바늘처럼~ 돌고 돌~다가~ 가는 길을 잃~은 사~람아.”


  “그래, 애비야.”


  바깥노인은 목소리를 낮추며 복도로 나갔다.


  “병실에서 벨소리로 해 두시면 안 되는데.”


  금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격리 병동에 들어온 뒤로 처음 듣는 벨소리였다. 여기선 모두가 무음이나 진동으로 해 두었기 때문에, 오랜만에 구수한 트로트를 들으니 오히려 양은 기분이 산뜻하고 좋았다.


  바깥노인은 한참 만에야 돌아왔다. 그사이에 잠든 안노인을 확인하자 그는 양의 자리로 오더니 금희에게 말을 걸었다. 양은 얼른 다시 마스크를 썼다.


  “몇 번째 항암인가?”


  “우리 애도 이번이 처음이에요.”


  “시작할 때 고민이 많았겠구먼. 그래도 젊으니까, 잘 이겨 내겠지?”


  “그래야 하는데, 항암 치료라는 게 정말 쉽지가 않네요.”


  “으흠. 우리 집사람이 올해 81세요. 실은, 의사가 보호자인 나만 불러서 그럽디다. 급성백혈병으로 항암 치료를 안 받으면 두 달 남았다고… 받으면 조금 연장되는데 어떻게 하겠느냐… 내가 도저히 입이 안 떨어져서 아직까지 집사람한테 말을 못했어. 빨리 결정해야 한다고 다그치길래 반대로 교수한테 내가 물어봤소. 당신의 아내면 어쩌겠냐고. 우물쭈물하며 바로 대답을 못하더구먼.”


  “맞으세요, 내 문제가 되니 참 어렵네요. 어르신, 자제 분들과는 상의해 보셨어요?”


  “내가 자식이 넷이오. 우리가 낳은 아들딸에, 전쟁 통에 부모를 잃은 남매를 거둬서 넷 다 우리가 낳았다 하고 키웠지. 다행히 다들 모나지 않고 잘 커 줬어. 넷 중 둘이 서로 정이 들어 결혼을 시켰으니 이젠 법적으로도 정말로 한 가족이고. 그러니 아이들은 넷 다 울고불고 난리지… 엄마가 죽는다는데… 평생 남한테 욕먹을 일을 안 하고 살아왔는데 왜 이런 일이 우리한테 생기는지… 흐음.”


  “안어른이 평소에 건강은 괜찮으셨어요?”


  “아무렴은. 아주 건강했지. 근데 최근에 마음이 힘든 일을 겪었어. 그게 컸지… 우리 집사람이 이북에서 내려왔거든. 6.25전쟁이 터지기 전에 사촌 언니랑 서울 공장에 일하러 왔다가 전쟁이 나면서 가족들하고 생이별하고 말았지. 3.8선이 쳐지고 나를 만나기 전까진 사촌 언니랑 둘이서 의지하며 지냈고. 근데 그렇게 한평생을 자매처럼 지내던 사촌 언니가 반년 전에 갑자기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해 눈도 못 감고 죽고 말았어. 그 뒤로 매일 울고 괴로워하더니 기어코 따라가는구먼. 나는 도저히 이대로 보낼 수는 없으이… 항암 치료라도 해 봐야 후회가 없겠는데, 받으면 싹 낫는다고 해도 집사람이 저렇게 싫다네 그려.”


  양이 조심스레 말했다.


  “저, 할아버지. 할머니께 사실대로 말씀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으흠.”


  “항암 치료가 얼마나 힘든지… 모르시죠? 저는 알아요. 치료를 받다가 언제 어떻게 죽을지도 몰라요. 자기 목숨이 달린 일인데 아무것도 모르고 낫는 줄 알고 시작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끝까지 뭐라도 해 보고 싶은 가족들의 마음도 알겠고, 그래야 남는 사람들에게 후회가 적으리란 생각도 들어요. 하지만, 결국은 본인이 선택할 문제라고 생각해요, 저는.”


  “흐음.”


  “얘가 참. 어른들끼리 이야기하는데.”


  “아가씨가 똑 부러지는구먼. 여기에 있긴 아까워.”


  바깥노인의 말을 타고 밀려드는 침묵을 벨소리가 깨뜨렸다.


  “시~계바늘처럼~ 돌고 돌~다가~ 가는 길을 잃~은 사~람아. 미련 따윈 없는 거야~ 후회~도 없~는 거야.”


  “아이쿠, 전화가 또 왔구먼. 받아야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바깥노인은 발걸음이 안 떨어지는 듯했다. 그사이에도 벨소리는 구성지게 울렸다.


  “아아아~ 아~아아~아~아 세상살이 뭐, 다 그런 거지~ 뭐. 세상살이 뭐, 다 그런 거지 뭐.”


  “아유, 시끄러워. 얼른 이리 와서 전화 좀 받아요, 여보.”


  언제 깼는지 모를 안노인의 훌쩍거리는 목소릴 듣고서야 바깥노인은 허둥지둥 달려갔다.


  “가네, 가.”





  안노인의 잔소리에 결국 바깥노인은 휴대폰을 진동 모드로 바꾸었다.


  아쉬웠다, 양은. 사라진 노랫가락이 귓가며 입가에 자꾸만 맴돌았다.


나야. 시계바늘처럼 돌고 돌다가 길을 잃어버린 사람. 여기 있는 우리 모두가 다 그렇지. 그래, 미련이나 후회 따윈 말자. 모두 내려놓자.


   두려운 건 죽음이 아니다. 고통이다.


 죽음에 대해 제대로 안 사람은 소크라테스뿐이야.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모르면서 무서워하는 건 알지 못하면서 안다고 생각하는 무지라고 말했어. 어쩌면 죽음은 가장 좋은 것일 수도 있다면서.


맞아, 우리는 죽음에 대해 모르지. 그래서 두려워하는 거야. 하지만… 끝없이 고통스러운 삶은 죽음보다 무서워.


  결론을 내리자 삶에 대한 집착이 가벼워졌다. 몸이 나아지고 있다는 믿음은 그대로면서도 반드시 살아야 할 이유가 사라지면서, 양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며 잠들었다.






  이날 밤 꿈에서 양은 자신이 아는 모든 사람의 기억 속에서 지워졌다.


  금희도, 수상도, 대양도, 세하도, 호수도 아무도 양이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다.


  양은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했다.


  기억을 못하면 안 슬프겠지. 내가 죽는다면 차라리 이게 낫겠어.


  양은 그런 마음으로 잠에서 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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