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날. 하수 : 수건돌리기 2
머그잔이 바닥을 보일 즈음, 드디어 혜수가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온다.
짧은 와인색 플레어스커트에 검은 카디건을 입은 그녀는 언제나처럼 도도해 보이면서도 귀엽다.
혜수가 다가오자 사람들의 시선이 멸치떼처럼 확 몰리는 게 느껴진다. 반면 그녀는 남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선 채로 내 커피를 가져가 쭉 들이켜더니, 똥이라도 씹은 표정으로 쓰다며 한바탕 난리다.
“웩! 걸레 맛이야!”
거침없음. 혜수의 치명적인 매력이라니까?
“그러게 좀 보고나 마시지 그랬어. 찌꺼기만 남았다고.”
아침부터 도통 실감나지 않던, 나를 둘러싼 모든 상황이 이제야 약간이지만 현실감을 되찾는다. 혜수는 핸드백에서 담배 1개비를 꺼내 우아하게 입에 물더니, 폭신한 소파에 모델처럼 날씬한 몸을 기댄다.
“미안, 미안. 소나기가 와서 차가 엄청 밀렸어. 길바닥에 사람은 또 왜 이리 많아? 거기다 승우가 자기를 두고 간다며 칭얼거려서 달래느라 조금 늦었어. 애도 아니고 23살이나 먹은 오빠가 그러니까 대략 난감하다.”
“무슨 말씀! 와 준 게 어디야. 승우 오빤 잘 지내시고?”
“아니, 행시를 준비한다는 고시생이 왜 맨날 여친 타령이냔 말야. 매일 밤을 새면서 쌍코피가 터지게 공부해도 될까 말까 한 상황에 초딩처럼 같이 놀자고 졸라 대니, 나 참.”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남자 친구가 자기밖에 모른다며 은근슬쩍 자랑하는 거라고 여길지 몰라도, 나는 안다. 혜수는 진심이다. 그녀는 다 큰 남자가 징징거리면 어이가 없어진다며 머리를 내두를 정도로 싫어한다.
솔직하고 직선적이면서도 속을 꿰뚫어 보는 예리한 성격이, 내가 혜수를 좋아하는 이유니까. 그러면서도 본인의 감정만 위한답시고 남의 상처를 후벼파는 말이나 함부로 내뱉는, 싸가지가 없는 애들과는 수준이 다르다. 주로 자신과 남친에 대한 말만 거침없이 한다고!
철없는 남자 친구에 대한 푸념을 잠시 늘어놓던 혜수가 문득 말을 멈추더니, 내 얼굴을 꼼꼼히 뜯어보며 묻는다.
“근데 너, 무슨 일이야?”
혜수는 지금, 2년째 고시 준비 중인 후줄근한 연상 남자 친구와 1년째 들이대는 뽀송뽀송한 연하의 고등학생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중이다. 주위에선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장난치는 나쁜 년이라 욕하는 애들도 있지만, 나는 진심으로 이해한다. 1년 365일, 고시 공부하는 남자 친구를 둔 여대생의 슬픔도 알아줘야 하니까. 근사한 레스토랑이나 명품 핸드백에 대한 얘기가 아니다. 우리는 남자의 능력만 따지는 고리타분한 된장녀가 아니라니까?
고시생과의 연애가 힘든 이유는, 여대생이라면 누구나 기대할 법한 가슴 설레는 둘만의 1박 2일 여행, 밤새도록 극장에서 심야 영화 보기, 카페에서 서로에게 기대앉아 알콩달콩 시간 죽이기 같은 평범한 만남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시험을 중심으로 매일 빈틈없이 짠 생활 계획표 속에서 1분 1초를 사는 고시생들은 먹고 싸고 공부하고 자는, 일정한 틀에 박힌 시간표에서 벗어나면 불안에 시달린다.
나도 승우 오빠를 만나고 알았다.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 또래의 남자애들이 지닐 법한, 인생을 대하는 가벼움이나 허세 섞인 농담이 빠진 느낌이랄까? 뚜껑을 따서 며칠 동안 묵혀 둔 밍밍한 사이다 같았다, 사람이. 보이지도 않는 미래를 위해 무작정 참고 기다려야 하는 자신의 처지에 자꾸만 울컥하는, 작은 시한폭탄이 가슴팍에서 째깍거리는 불쌍한 인질 같기도 하고.
그날 나는 혜수가 그를 정말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라면 만날 이유가 없으니까.
돈을 잘 버는 ‘사’자 남편을 만나기 위해 인생의 황금기인 대학 시절부터 고시생 남자 친구를 키울 필요는 없는 시대다. 한 남자만 바라보고 실컷 뒷바라지해 봤자, 합격하고 나면 남자는 부모의 욕심에 떠밀리든 없던 야망이 솟구치든 갖가지 핑계를 들어 여자를 차기 일쑤다. 클럽에 가서 만날 만큼 만나고 미련 없이 즐기다가 부모가 마련한 맞선 자리에 나가서 조건에 맞는 남자를 만나면, 그 이상 편할 수가 없다.
외시를 보고, 비슷한 수준의 남자를 만나서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그저 얄팍한 시대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는 게 내 인생의 목표였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고!
아마도 혜수의 연애를 지켜보면서, 내겐 고시 생활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이 생긴 듯하다. 안쓰럽고 조마조마하던 승우 오빠와의 첫 만남 후, 고시 폐인 따위는 과감히 정리하고 연하남과 풋풋한 썸이나 타라며 나는 한껏 바람을 넣었다. 늘 유쾌한 혜수는 그날따라 이마를 찡그리고 다부지게 팔짱을 끼더니 중얼거렸다.
“그것도 문제야. 걘 지금 고3이잖아. 곧 수능을 봐야 한단 말이지.”
우리는 누가 더라고 할 것도 없이 인생을 함께 배워 가는 사람으로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긴, 다 좋은 게 언제 우리 손에 쥐어지긴 하냐면서.
“근데 너, 정말 무슨 일이 있는 거 아니야?”
그녀가 이럴 때는 방법이 없다. 있는 그대로 말하는 수밖에.
아무 일 없는 듯 꾸며도 한두 번 날카로운 질문을 받으면 결국 다 불고 만다. 물론, 가출은 끝까지 감춰야겠지만.
남들이 보기에 우리집은 대기업에 다니는 능력자 아빠와 고상한 엄마가 그럴듯한 명문대생 딸을 둔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가정이니까. 혜수는 대학에서 사귄 친구라서인지 전공이나 연애, 정치나 취업에 대한 얘기는 서로의 얼굴에 열띤 침을 튀겨 가며 편하게 말해도, 각자의 가족에 관한 이야기는 좀처럼 자세하게 나누게 되질 않는다.
안 지 반년이 넘은 지금, 나 역시 혜수의 아버지가 어느 은행의 강남 지점장이고 엄마는 정부 부처 어딘가의 고위 공무원이라는, 정부 기관이 어디 한두 갠가, 수박 껍데기 같은 사실만 아는 수준이다. 둘 다 먼저 말하지 않는 이상 안 캐묻는 약간 무심한 성격이 우리가 친한 비결이기도 하니까.
가방은 신기루처럼 사라졌고, 집에 돌아가기는 굶기만큼이나 싫어서 도둑놈을 잡아야겠는데 이 나이에 가출 소녀란 놀림은 안 받고 싶어서, 놈을 찾을 반짝이는 아이디어라도 빌릴까 해서 혜수를 부른 거니 목적에 집중하자.
나는 날치기를 당했다며 미리 생각해 둔 말을 줄줄 늘어놓았다. 여행 가방이란 말, 공항에 가던 길이란 말은 쏙 뺐지만, 말을 안 한다고 거짓말은 아니니까.
“들어 보니 완전히 작정하고 덤빈 놈이네! 지하철 문이 닫히기 직전에 내린 거 보면, 시간 계산까지 치밀하게 한 거야. 하필이면 정신없는 역에서 달아났다는 것도 그래. 네가 운 좋게 따라 내렸다 한들 사람도 많고 해서 아마 못 잡았을 거야.”
손뼉을 칠 만큼 신선한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실망스러운 건 어쩔 수 없다.
“꼭 찾아야 된다고! 이제라도 경찰에 신고하면 잡을 수 있을까?”
“아직 경찰에 신고도 안 했어? 날 샜다고 본다. 신고 한들, 경찰이 그깟 날치기 사건까지 신경을 쓰겠어?”
“그래서 안 했던 거라고!”
오늘따라 교과서처럼 상식적인 대꾸만 하는 혜수가 괜스레 얄미워져서 퉁명스럽게 내뱉고 만다. 에휴, 여기까지 달려온 친구에게 잘하는 짓이다!
곧장 따갑게 밀려드는 미안함에 시달리는 나를 신경도 안 쓰고, 혜수는 심각한 생각에 잠길 때면 항상 그렇듯이 턱을 괴더니 눈을 지그시 내리깐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라도 된 걸까? 그나저나 로댕의 남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그렇게 벌거벗고 앉아서 백 년이 훨씬 넘도록 하는 거냐고!
“음, 이름이나 얼굴이라도 확실하게 기억한다면 또 모르겠다. 그 동네의 전과자 중에서 찾을 수 있을지?”
이번에는 교과서보다 약간 나아간 참고서 수준의 말이지만, 심봉사가 눈을 뜨듯 귀가 번쩍 열린다. 하, 사진! 하지만 놈이 모자를 써서 얼굴이 반밖에 안 보이는 데다가, 내가 수백 번을 보고도 단서 하나 찾지 못한 사진인데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실은… 나, 그놈 사진이 있어.”
“엥? 사진을 가지고 있어? 어떻게?”
그놈한테 호감이 있어서 혼자 난리블루스를 추다가 사진까지 찍었단 말은 목구멍에 걸려서, 도저히 안 나온다. 아무리 친구라도 말 못한다. 아니, 안 해!
혜수는 짓궂은 면이 있어서 내가 떤 호들갑을 들으면 평생을 두고두고 놀릴 게 틀림없으니까. 어떻게든 숨기려 이리저리 말을 돌리지만, 결국 그녀가 내민 진실의 손에 목덜미를 잡히고 만다. 최대한 덜 창피하게 바꾼 상황 설명을 듣고서도 그녀는 민망할 정도로 탁자를 치며 카페가 떠나가라 웃는다. 하.
“냉큼 내놓으시라.”
이러면서 오른손을 마구 내민다. 어디 그 잘난 놈의 낯짝이나 좀 보자면서. 어차피 들통난 거, 체면치레할 필요는 없으니까. 나는 꼬리를 내리고 얌전히 디지털 카메라를 건넨다.
“으흥, 이놈이구만? 네가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닌데, 은근히 매력 있다? 은하수가 정신을 놓을 만하네.”
뺨이라도 맞은 듯 볼이 화끈거리고 약이 오르지만, 내가 웃긴 짓을 한 거니까 어쩌겠어.
“나를 계속 쳐다봐서 더 정신이 없었다니까?”
“요새 잘생긴 고딩이 오토바이를 타고 여자애들한테 접근해서 휴대폰 좀 빌려 달라고 하고선 들고튀는 범죄가 유행이라던데, 비슷한 건가? 근데 가만. 얘, 대학생 안 같아! 자세히 보니, 어리게 생겼어. 뭐야, 너 고딩한테 당한 거야? 푸핫. 요 어린놈이 누나를 가지고 놀았네?”
“응? 고딩이라고? 아냐, 교복도 안 입었고, 대학생 같았어.”
아닐 거야, 아니라고! 물론 요즘 연상 연하가 대세라곤 하지만, 고등학생을 내 또래로 보고 나한테 호감이 있느니 어쩌니 착각에 빠져 사진을 찍었다면, 이건 정말 유치찬란한 악몽이다. 고개를 흔들며 손가락으로 머리카락만 꼬아 대는 나는 아랑곳없이, 혜수는 얄미울 정도로 조용히 사진기만 들여다본다. 그러더니 갑자기 흥얼거리듯 입을 연다.
“가만가만. 찾았다, 방법.”
“진짜?”
“근데 어떡하니, 얘는 중딩이야, 하수야.”
“뭐?”
“에이, 얼굴 펴. 초딩이 아닌 게 어디야?”
“말도 안 돼!”
하, 믿을 수 없어! 요즘 애들이 아무리 잘 먹고 잘 컸다 해도,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아직 변성기도 안 겪은 초등학생을 대학생으로 착각했을 리 없다. 가방이 사라졌을 때보다 더 멍할 뿐이고. 사진을 아무리 살펴봐도, 혜수가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지 나는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니까?
“모르겠어? 사진에서 걔 손가락을 잘 봐. 네가 잇달아 찍은 사진들을 빨리 넘기면, 움직이지? 걔가 손가락을 까딱거릴 때마다 그 아래에 가려진 글자들이 조금씩 보여. 이어서 읽으면 ‘백…동…중학…교 도…서…관’이야!”
정말이다! 화면이 작아서 뭉개졌지만 확대해서 모아 보니, 분명 ‘백동중학교 도서관’이란 글자가 된다! 인터넷을 샅샅이 뒤지면 이 학교가 어디에 있는지부터 시작해서, 잘하면 녀석이 몇 학년, 몇 반인지도 알아낼 수 있어!
아니, 반드시 찾아서 경찰서에 내동댕이쳐 주겠어! 이 빌어먹을 자식은 내가 자기 사진을 찍은 줄은 상상도 못할 테니, 마음놓고 있을 거란 말씀. 대리석처럼 반듯한 얼굴에 한 방 세게 먹여 주겠어! 어디 한번 해보자고! 역시, 혜수를 부르길 잘 했다니까!
“혜수 씨, 쌩유 베리 감사!”
지금 내 마음은 순정 만화의 주인공처럼 고마운 눈물이 빗금처럼 흘러내린다고.
“고맙긴 뭘. 그 자식을 잡으러 갈 거면 같이 가 줄까? 요새 중딩들은 장난이 아니라고 하더라. 오죽하면 중2가 무서워서 북한이 못 쳐들어온다잖아.”
“걱정 마. 그래 봤자 중딩이니까.”
“그래그래. 명품 가방 같은 건 금방 처분될 수 있으니 서둘러서 알아 봐. 혹시 내 도움이 필요하면 바로 연락해. 알았지? 근데 너, 휴대폰은 왜 먹통이야! 도둑맞은 그 가방에 넣어 뒀어?”
혜수를 다시 남자 친구에게 돌려보내고, PC방을 찾아 신촌의 밤거리를 두리번거린다. 학교 앞이라 마주칠지 모르는 아는 얼굴들을 피해 최대한 한갓진 골목으로 들어간다.
문득, 유치원에서 배운 수건돌리기가 생각난다. 동그랗게 둘러앉은 아이들의 주위를 술래가 돌다가, 남모르게 좋아하거나 반대로 골려 주고 싶은 아이의 뒤에 수건을 놓고 지나간다.
이때 술래에겐 달리는 속도를 안 떨어뜨리면서 소리 없이 수건을 놓는 기술이 필요하다. 수건을 내려놓은 뒤에도 여전히 손에 쥔 듯 천연덕스레 뛸 수 있으면 최고다. 등뒤의 수건을 알아채고 쫓아가더라도 술래가 내 자리에 앉기 전에 잡지 못하면 술래가 되고, 술래가 한 바퀴를 다 돌고 오도록 모르고 앉아 있다간 엉덩이로 이름을 쓰거나 벌칙을 받아야 하는 놀이.
어느 집에나 있는 평범한 수건은, 내려놓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무시무시한 핵미사일이 되기도, 마음을 고백하는 수줍은 꽃이 되기도 했다.
나는 그저 목청껏 노래를 부르다 이따금 뒤를 돌아보며 적당한 긴장감을 즐겼는데, 혹시라도 수건이 놓일까 불안해서 제대로 노래도 못하는 애들이 있었다. 술래가 다가가면 등 뒤를 끊임없이 손으로 만져 보고 숨소리조차 가늘어졌다.
하, 이제야 그 애들의 마음을 알겠다. 누가 언제 내 뒤통수를 칠지 모르는, 마른땀이 잔뜩 배어나게 만드는, 놀이의 특성 때문이었다.
지금 보니, 인생이 딱 그 짝이라니까? 어느새 등뒤에 수건이 놓였고 나는 세상모르고 앉았다가 가방을 놓쳤다. 단지 인생의 작은 조각 하나가 넘어졌을 뿐인데, 도미노처럼 모든 계획이 잇달아 휘청거리기 시작한다.
삶의 따분한 장난에 그야말로 제대로 당한 셈이다. 수작을 걸어오면 받아 주는 게 예의란 말씀! 긴장해, 이제부터는 내가 술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