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사이비 종교의 비극, 백백교 사건
현재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종교의 자유를 헌법으로 보장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4대 종교(천주교,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뿐만 아니라 세계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종교가 존재한다. 필자가 기독교이긴 하지만 그들의 종교나 믿음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다. 다만 그 믿음이 비뚤어지는 순간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일본에서 대표적인 사이비교인 '옴진리교'가 벌였던 살육만큼이나 우리나라의 '백백교' 역시 엄청난 만행을 저질렀다.
사이비교 중 일부는 탄생부터 사이비(겉으로는 비슷하나 속은 완전히 다름. 또는 그런 것) 냄새를 물씬 풍기기도 하지만, 어떤 사이비교는 처음 의도는 그렇지 않았으나 차츰 변질되기도 한다. 전자가 옴진리교라면 후자가 바로 백백교이다.
사실 백백교는 나름 역사와 전통이 있는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뿌리를 두고 있는 백도교가 백백교가 된 것이다. 1919년 백도교의 교주였던 전정운이 사망하자 교주의 자리를 놓고 다툼이 벌어져 백백교, 인천교, 도화교로 분리되었다. 하지만 사실 백도교 역시 문제가 많은 사이비였다. 동학 자체는 그렇지 않았건만 백도교는 이미 전정운 시절에 전정운은 자신의 첩 4명과 일가족 8명을 죽이고 암매장하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기도 했다. 이 범죄 행각이 드러나면 박살이 났었다.
그러나 이 사태에서 도망쳤던 전정운의 차남 전용해가 다시 백백교를 재건하는 데에 성공한다. 그리고 종말의 날이 오면 서양은 불로, 동양은 물로 심판을 받아 인류가 멸망할 것인데, 이때 살아남기 위해서는 백백교에서 마련한 본소에서 생활하다가 금강산의 피수궁으로 옮겨가야 한다고 전파했다. 그러면서 대원님(백백교의 교주)가 불로장생을 원하는 사람은 동해 천리 밖의 신대륙으로 보내주실 것이며, 부귀영화를 원하는 사람은 계룡산으로 인도한다는 교리를 전파했다. 동해 천리 밖에 신대륙이 있다니...콜럼버스인가?
아무튼 혼란했던 당시의 사람들은 이런 백백교의 교리에 빠지기 쉬웠으며, 폐광에 금괴를 묻어놓고 전용해의 힘으로 다시 금광이 생겼다는 사기 행위로 사람들을 속이며 교세를 확장했다. 일제 역시 조선 안에서 퍼진 사이비 교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기에 이들의 만행은 단순 사이비교에서 광신의 범죄단체로 변해갔다.
우선 전용해는 스스로를 '신의 아들'이라 믿었는데, 불로장생과 부귀영화를 내려준다는 거짓말로 신도들에게 과도한 헌금을 받치도록 강요했다. 또한 간부들을 각지로 보내 예쁜 딸이 있는 부모들을 집요하게 전도하여 백백교에 입교시킨 다음 딸을 전용해의 시녀로 바치게 한 뒤 강간하였고, 이 여성들이 싫증나면 바로 살해했다. 특히 그 여성들이 임신을 하면 아예 여신도와 태아까지 전부 살해하여 비밀을 유지했다. 백백교 해체 당시 전용해의 첩은 60명이 넘었다고 하니 그의 변태적인 성향을 짐작할 수 있다.
뿐만아니라 백백교를 탈출한 사람이나 비판을 하는 사람이 있을 때는 그와 그의 가족들까지 모조리 살해하는 잔인함을 보였다. 나중에는 재산을 바치고 본소에 들어온 신도들이 너무 많아지자 먹여 살리기 힘들다고 죽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부교주와 내부적인 알력이 생기자 부교주와 그를 따르는 사람까지 죽이고 암매장했다.
1937.4.13 조선일보 기사
백백교에서는 '부엉이부대'란 일종의 정보원들을 곳곳에 심어 놓고, 신도들의 행동을 감시했으며 이때 조금이라도 이상한 점이 발각되면 바로 간부들이 행동대원을 풀어 잡아왔다고 한다. 게다가 신도의 가족들을 지역별 지부에 흩어놓아 자신이 도망가면 다른 가족들이 죽임을 당할까 봐 도망치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용기있게 전용해에게 맞서 결국 백백교의 악행을 세상에 알린 인물이 있었다. 바로 유곤룡이라는 청년이었는데, 한약방을 운영하며 나름대로 자수성가한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조부와 부친이 백백교에 빠져 여동생을 교주에게 바치고 집안의 재산마저 빼앗기자 교주와의 면담을 빌미로 전용해와 그 주변의 일당을 때려눕히고 바로 탈출하여 동대문 왕십리 경찰주재소에 달려가 이들을 고발한다.
1937년 일본 경찰들은 8개월에 걸쳐 전용해의 아지트와 각지역 백백교 지소의 비밀 장소들을 탐색하여 무려 346구의 시체를 발굴했다. 물론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발굴된 시신의 숫자만 346구이니 찾아내지 못한 시신 역시 많았을 것이란 사실이다.
전용해는 당시 백백교 아지트에서 도망쳐 사라졌는데, 몇 달 뒤 목을 찌른 사체로 발견이 된다. 문제는 당시 전용해는 자신의 얼굴을 흰 천으로 감싸고 다녀 그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나중에 그의 아들이 직접 보고 아버지임을 확인했다고 한다.
어쨌든 백백교는 그렇게 해체되었고, 이 사건은 서양에까지 전파됐을 정도로 화제가 되었다. 당시 체포된 인원만 100명이 넘었으며, 확인된 살인만 300건이 넘었기에 3년 동안이나 수사와 공판 준비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1941년 1월 이루어진 첫 공판에서 혼자서 170명을 죽인 김서진과 167명을 죽인 이경득, 127명을 죽인 문봉조 등 간부급은 사형이 선고되었으며, 나머지 인원들에게도 징역형이 선고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일본은 태평양 전쟁을 벌이며 혼란한 정세에 빠져들었고, 이후 광복을 맞이했기에 공식적으로 이들이 사형되었다는 기록은 없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들이 광복 후 사회에 나와 다시 여러 가지 사이비 종교를 만드는데 관여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워낙 충격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에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한 소설도 여러 편(<금은탑>, <백백교>, <유다의 별> 등)이며, 영화도 2편이 제작되었다.
영화 <백백교>의 포스터
결국 잠재적으로 천 명에 이르는 사상자를 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백백교 사건은 이렇게 막을 내렸지만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사이비교로 불리는 많은 종교들이 온갖 사기와 기망으로 피해자를 양산하고 있다.
다만 다시는 이렇게 끔찍한 사건은 벌어지지 않기를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