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경제신문 '더봄' 연재 - '단독주택 인문학' 11
우리 가족이 살 집을 지으려면 얼마나 걸릴까? 집을 지으려고 마음먹었으면 후딱 끝을 내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집 짓는 일정을 잡아보면 절대적인 기간이 있고 상대적인 기간이 있다. 절대적 기간은 적정한 근거로 잡은 일정이기에 가능한 지키는 게 옳다. 하지만 상대적 기간은 근거를 만들어가야 하니 일정이 명확해지지 않는다.
집 짓기에서 절대적 기간이란 공사기간이 되겠고 상대적 기간이란 설계에 필요한 시간이다. 공사가 시작되면 하루하루 직접비인 인건비와 재료비가 투입된다. 또 간접비로는 임대자재와 관리비, 금융이자가 되는데 일기불순 등으로 일정이 늘게 된다. 도급 공사라도 공정관리가 잘 되어서 원가를 줄이고 이윤이 늘어나야 마무리 공사가 원만하게 이루어지면서 완성도 높은 집을 지을 수 있다.
집 짓기에서 설계는 건축주가 집을 짓는 목적을 제대로 이루어내는 바탕을 만드는 과정이다. 설계 과정은 기획, 계획, 기본, 실시의 네 단계로 나누어 진행된다. 기획 설계는 건축주가 집을 지으려는 의도를 파악하는 과정이다. 물론 건축주가 집을 지어 어떻게 살고 싶은지 구체적인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 설계자는 기획 설계 과정에서 대화를 통해 건축주의 뜻을 파악하면서 집을 지으려는 목적을 구체화시켜나가야 한다.
기획 설계 단계에서 건축주의 의도를 구체화시키지 못하면 다음 단계에서 피드백이 잦게 된다. 계획 설계는 건축주의 의지를 깔고 대지 조건에 부합하는 안을 그려내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도면이 나오게 되면 건축주는 설계에 적극적인 의사를 표하게 된다. 그렇지만 끝말잇기처럼 대안에 또 다른 대안으로 끊임없이 ‘혹시나?’를 연발하면 설계 기간은 한없이 늘어난다.
계획 설계는 수많은 대안을 작업하는 과정인데 건축주와 건축사가 집에 대한 고민을 함께 나누는 중요한 일정이다. 이 단계에서 설계 기간이 많이 소요되는데 건축사가 입을 닫으면 대안 작업은 단축될 수도 있다. 건축주가 호감을 표하는 대안으로 안을 다듬으면 금방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건축주가 모눈종이에 그려온 스케치를 도면으로 그려 안을 확정하는 건축사도 적지 않다.
기획 설계와 계획 설계 과정을 아예 두지 않고 설계 작업을 마무리하면 설계 기간은 한 달이면 끝날 수도 있다. 건축주의 동의만 구해 바로 허가 도면 작업을 하면 설계가 끝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일하는 건축사는 설계비를 싸게 부르니 쉽게 계약에 이를 수 있다. 이런 건축사는 전문가의 의지를 가지지 못하는 사람이라 하겠다.
부모님과 형제까지 한 집에 살아야 했던 건축주는 고민이 많았다. 부부만 단출하게 사는 집이 대부분인데 대가족이 한 집에 살아야 하니 단독주택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부모님과 형, 그리고 부부와 아이 둘이 한 집에서 함께 살아야 하니 고민이 깊었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건축주는 이 고민의 답을 구하려고 착공까지 2년을 설계 기간으로 잡아 설계를 의뢰했다.
지금은 우리네 주거 생활에는 찾아보기 어려운 삼 세대 주택이다. 옛날에는 가장의 권위가 지엄해서 대가족으로 살아도 질서가 유지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다르지 않은가? 노부모, 형, 부부, 아이들이 프라이버시를 가질 수 있고 한 가족으로 공동체 생활도 원만하게 이루고 사는 게 가능할까? 건축주는 따로 살아보기도 했고 큰 아파트에서 같이 살아도 보았지만 가족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고 했다.
건축주가 단독주택을 지어야 하는 절실한 이유를 전해 듣고 심사숙고에 들어갔다. 대안 작업만 얼마나 했는지 모르는데 건축주는 가능한 설계에 개입하지 않고 건축사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오로지 건축주는 건축사에게 자신의 처지만 던져 주고는 진행되는 대안에 대해 설명만 듣는 식으로 시간이 흘러갔다. 삼 세대 주택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따로 또 같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 집에 살지만 또 식구 각자의 생활도 편해야 한다. 모이면 한 식구의 생활공간을 가지고 부부와 아이들로 건축주 식구의 소그룹의 생활도 보장되어야 한다. 그리고 스트레스를 받는 일을 하는 건축주가 온전하게 쉴 수 있는 사적 공간도 필요한 집이었다. 건축주가 설계 기간을 2년이나 잡고 자신의 인생 숙제를 맡길 수 있는 건축사를 찾는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건축사는 엔지니어라거나 디자이너가 아니다. 건축사의 일인 설계의 시작은 건축주와 그의 가족들이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는 삶에 대한 성찰이다. 건축 설계를 인문학과 연관시키는 근거일 수 있다. ‘어떤 집’을 설계한다면 디자이너이거나 엔지니어의 일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어떻게 살 집’은 건축사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집을 계약하면서 건축주에게 견적서를 내밀었다. 설계를 맡으면서 쉽지 않은 작업이 될 것이라 예상했으므로 설계비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건축주는 인생 숙제를 드리며 견적서를 볼 자격이 없다면서 설계비는 내가 정하면 된다고 했다. 설계 계약서에 기입했던 설계비는 견적서에 적었던 금액에서 내가 스스로 양보한 금액이었다.
계약이 이루어지고 일을 시작하면서 바로 벽에 부딪히게 되었다. 지금의 대지에서는 바다가 내려다보이지만 앞 집을 짓고 난 뒤에는 전망이 나오지 않아 갑갑한 집이 되고 마는 상황이었다. 건축주의 전폭적인 신뢰가 아니었으면 아마도 이런 상황의 얘기는 묻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바다가 보이는 집을 꿈꾸다가 그 프리미엄이 사라진 땅이니 건축주가 집 짓기를 포기한다면 일이 날아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건축주는 그런 집이 될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해보지 않았다면서 고마워했다. 우리 대지 앞의 두 필지를 협의해서 한 필지를 추가로 매입하여 설계를 진행하게 되었다. 2년 간 수십 가지의 대안을 만들고 다듬어서 확정한 설계안은 설계자인 나도 만족하고 건축주도 인생 숙제가 풀렸다며 흡족하게 받아들였다. 이제 그 집에서 십 년째 살고 있을 건축주 가족은 행복한 인생을 누리고 있을까?
십여 년 전에 설계했던 단독주택 건축주는 내가 제시했던 설계비에 동의한다고 하면서 근거가 궁금하다고 했다. 건축주의 지인이었던 몇몇 건축사들은 천만 원 이하로 설계비를 얘기했다고 했다. 그 건축주가 지을 단독주택의 지가는 18억을 호가했고 50 평정도 되는 공사비는 5억 이상이어야 했다. 내가 이렇게 설계비의 근거를 이야기하니 건축주는 무릎을 치면서 동의했다.
“건축주 분이 건축사라면 23억 이상 들어가야 하는 집을 설계하면서 천만 원을 받아 얼마나 일에 집중할 수 있겠습니까?”
30평이든 100평이든 단독주택을 짓고자 하는 목표는 그 집에서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것일 테다.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집은 외관 디자인이나 인테리어를 멋지게 설계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건축주와 그 가족이 행복하게 살 수 있어야 하는 집이라는 추상적인 명제를 '단독주택'으로 구체화시킬 수 있도록 충분한 설계 기간을 보장받을 수 있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