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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정희 Feb 28. 2024

오늘 날 잡았구나. 이런 된장...

손가락을 베었다. 어제 뭇국을 하려고 무를 손질하던 차에 칼날이 휙~ 하니 허공을 휩쓸더니 내 손톱의 일부를 싹 배어버렸다. 처음에는 통증이 별로 없었는데 좀 깊게 배었는지 손톱 아래 살에서 피가 퐁퐁 솟아올랐다. 순식간의 일이라 그냥 나도 모르게 넋을 놓고 상처부위를 바라보았다.

퐁퐁퐁.

엄지손톱 주위가 피로 물들었다.

'음.. 슬슬 따갑구먼... '

약상자에서 빨간약을 꺼내 상처에 톡톡 바르니 찌릿한 느낌과 함께 빨갛게 흐르는 이것이 피인지 약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상처에 밴드를 붙였다. 한 겹만으로는 왠지 모자란 것 같아 또 한 장의 밴드를 붙였다.

밴드를 왼쪽 엄지 손가락에 덕지덕지 붙이니 손이 내 손이 아닌 것처럼 낯설었다. 손이 움직임이 굼떠 요리를 마무리하기에 불편했다.

'무를 마저 손질해서 국을 끓여야 하는데...'

물이 묻지 않게 왼손을 조심해서 사용해야 하니 일에 속도가 붙지 않았다.

'겨우 왼쪽 손가락 하나가 이렇게 중요한 존재였던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것의 역습을 받은 듯 꽤 불편했다.


무를 조심조심 손질하고는 국을 끓이다가 엄마가 준 국간장으로 간을 맞췄다.

무의 달큰한 맛과 소고기의 기름진 맛, 짭조름한 간장의 맛이 어우러져 나름 맛있는 국이 완성되었다.

오늘은 다른 반찬 하기도 번거로우니,  뭇국에 밑반찬을 해서 대충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 들고 있던 국간장 병을 스르륵 놓쳐버렸다.

'아우! 오늘 날 잡았구나. 이런 된장...'

슬로비디오로 아주 천천히 떨어지는 국간장이 "저를 좀 구해주세요오오오오."라고 비명을 지르는 것을 같았다.

너무 천천히 떨어지는 모습에 (나의 의식 속의 속도상으로....정말 천!천!히!) 충분히 받아 올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굼뜬 손의 움직임? 또는 작은 상처에 나간 멘털? 뭐 이러저러한 이유로 잡지 못했다.


국간장과 깨진 유리 파편이 냉장고와 싱크대 밑으로 여기저기 대환장 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한숨이 나왔다.

국간장의 찌릿한 냄새며, 조각난 유리파편이 여기저기 튄 주방 바닥. 수습할 일이 산더미다.

휴지로 대충 바닥을 닦은 다음에, 조심조심해서 유리 파편을 두꺼운 봉투에 조심이 넣고 그 위로 또 두꺼운 봉투에 넣고 비닐에 꽁꽁 싸맨다.

바닥에 혹시나 남아 있을 유리파편에 가족들 발이 다칠 새라 바닥을 닦고 또 닦아 내야 한다.


어제와 같은 오늘, 또 오늘과 별 다를 것 없을 내일이라 따분함 또는 권태감을 느끼는 일상이라 불평한다.

하지만 일상의 평안은 순식간의 작은 사고 (겨우 손가락 하나 배인 것) 만으로도 깨질 수 있는 위태로운 그것이라고 생각하니 갑자기 감사한 마음이 올라온다. 밴드를 덕지덕지 붙여 키보드를 치는 것이 불편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나의 따분한 일상이 얼마나 감사한 삶인지 의외의 사건으로 다시 깨닫는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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