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정희 Mar 21. 2024

영화 "가여운 것들"을 보고 (약스포 포함)

독서가 답이다!

지난번 영화 "송곳니"를 보고 최근 개봉작 "가여운 것들"을 빨리 보고 싶었는데 오늘에서야 겨우 봤다. 좋은 작품인데 상영관과 상영시간이 너무 적어 안타깝다. 곧 OTT로 넘어올 테니 요로고스 란티모스 작품세계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꼭 찾아보시라 말씀드리고 싶다.

대단한 성장 스토리를 보고 와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한 뼘 자란 것 같고 내면도 조금 단단해진 느낌적인 느낌이다. 좋은 문학작품은 사람을 성장시킨다고 하는 데, 오늘 좋은 작품을 내 속으로 이따만큼 주입시켰으니 그 약발이 좀 오래갔으면 좋겠다. 마흔 중반의 나이지만 죽기 전까지 쑥쑥 자랐으면 좋겠다.


영화 "가여운 것들"은 표면적으로는 여성 프랑켄슈타인 서사이다. 자살한 여성의 시체에 그녀 뱃속에 있는 태아의 뇌를 이식시켜 벨라라는 인간을 탄생시킨다. (설정이 꽤나 괴기스럽지만 영화적 표현은 그다지 징그럽거나 하지 않으니 별로 겁낼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녀를 탄생시킨 괴짜 과학자의 이름은 갓 윈 벡스터이다. 이름마저 창조주란다. 그 과학자마저 그의 아버지의 실험체 노릇을 하며 성장해 왔고 과학으로 창조주 노릇에 탐닉하다, 벨라라는 인간까지 탄생시키기에 이른다. 그로 인해 그의 몸은 남자 프랑켄슈타인처럼 괴물모습이고 정신은 황폐 그 자체다.

(요로고스 란티모스의 영화에서 대부분의 아버지 모습은 독재, 폭력, 잔혹, 한마디로 인간성 결여된 괴물의 모습이다. 영화 "킬링 디어"에서 아버지도 다르지 않다. 도대체 어린 시절 무엇을 겪었길래 이런 형편없는 아버지상만 그리는지 좀 안쓰러울 지경이다. 내면의 상처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모습은 존경스럽다. 물론 내 지레짐작이다.)


벨라는 성인 여자의 몸으로 정신은 갓난아기다. 인지적으로 빠른 성장을 보인다. (영화적으로, 인간의 성장 모습을 한 호흡으로 보여주기에는 아주 영리한 설정이 아닐 수 없다.) 성인 여자의 몸인 관계로 금방 성에 눈을 뜨고, 통제적인 남성들 사이에서 교묘히 이용을 당하는 듯 보이다가 금방 싫증을 내고 지적 성장에 눈을 뜬다. 영화의 꽤 많은 부분이 성교장면에 할애되는 데, 단 1도 에로틱하지 않다. 혹시 야한 영화를 보고 싶다면 이 영화는 선택하지 마시라~


영화에는 많은 인물들이 나온다. 각각 인물들은 인간의 한 가지 성정만을 대표하는 듯이 단순하다. 메인 캐릭터 벨라도 성장이라는 면모로만 대표되는 듯하고, 그녀를 둘러싼 남성들은 집착, 통제, 폭력, 부성애, 포용 등 한 가지 면모로만 부각되는 데, 이런 설정도 꽤나 흥미롭다. 한 인간의 다양한 모습을 여러 캐릭터로 잘게 분해해 놓았다고 할까? 그래서 그런지 영화는 인간을 해부해 놓은 모습을 자주 등장 시킨다. 또 윤리, 도덕적인 잣대는 별로 사용되지 않는다. 매음굴의 늙은 포주로부터 깨달음을 얻기도 하고, 동료 매춘부를 통해 사회주의 개념을 얻기도 한다. 싯다르타처럼 가난한 죽음을 목도하고 연민을 배운다. 의도적인 것인지 아닌 지는 모르겠으나 벨라는 혼란, 자기 연민, 후회, 편견, 의존성이 아예 없다. 그녀의 탄생과정과 양육환경으로 인해 복잡하게 엃히고 설켜 있을 법한 흔하디 흔한 인간의 부정적인 밑바닥 감정은 거세된 것처럼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설정이 그녀가 쑥쑥 성장하며 세상으로 당당히 나아가는데 도움을 준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이 매우 경쾌하고 즐겁다.


어찌 보면 통제적인 남성으로부터 독립하여 성장하는 한 여인의 이야기다. 성장 서사의 중심이 여성으로, 페미니즘 영화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를 조금 더 곱씹어보면 한 인간이 어떻게 성장하고 세상에 맞설 수 있는 진정한 성인으로 자랄 수 있는 지로도 해석 가능하다. 영화 "송곳니"에서는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책"이 이 영화에서는 벨라를 성장시키는 가장 중요한 도구로 사용된다. 또, 영화 "송곳니"는 모노톤의 솔로곡이라면 영화 "가여운 것들"은 오케스트라 곡으로 비교할 수 있을 것 같다. 할리우드 자본의 힘인 것인지, 미술적으로도, 음향적으로도, 캐릭터의 다양성면으로도 영화 "가여운 것들"은 매우 풍성하다. 배우 엠마 스톤이 이 영화로 이번 아카데미 여우 주연상을 받았다. 시상식에서 보인 인종차별적인 모습으로 오해받을(?) 행동을 해서 좀 별로였지만, 일단 그녀의 연기는 압권이다.  


오늘도 아들에게 잔소리할 명분을 얻었다. "독서했니?"

작가의 이전글 행복한 삶이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