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백수"
대학교 3학년, 한창 병원 실습을 나가 있을 때쯤 새로운 동네로 이사를 갔다.
이번에는 전세가 아닌 우리 집이었다. 텃밭이 있는 단독주택에 리모델링을 마쳐 깔끔하고 새것처럼 보여 만족스러웠다. 큰 방에서 친구처럼 지내는 작은 언니와 방을 함께 썼다. 텅 비어있는 집에 냉장고, 텔레비전, 책상 등등 새 가전과 가구들을 채워 넣었다. 가구와 가전들이 제 자리를 찾아가고 우리 가족의 사이도 제법 끈끈해져있음을 느꼈다.
가정에는 평화가 찾아왔지만 나의 진로는 알 수 없는 길로 향하고 있었다.
휴학없이 무사히 대학교 4년 과정을 마쳤지만 대부분 진로를 정해 졸업 전 취업을 마친 대학 동기들과는 다르게 나는 졸업까지도 진로 고민을 해결하지 못하고 미취업 상태였다.
누가 내게 간호사가 되라고 강요한 것도 아니었고 스스로 간호사가 되겠다고 간호학과에 와놓고서는 간호사를 안 하겠다니.
요즘 애들은 해보기도 전에 포기를 해서 문제야
취업 전 지도 교수님과의 면담에서 이와같은 말을 듣고 나서도 나는 안된다고 되뇌었다.
당시 간호사하면 떠오르는 '태움'을 견딜만한 멘탈조차 형성되어있지 않았고 수전증도 있어 실습시험때만 되면 벌벌 떨려오는 심장과 손가락으로 어떻게 주사를 놓는단 말인가. 온갖 핑계를 덧붙여가며 내가 안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었다.
결국 나의 최종 결정은 간호사가 되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그리고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보건교사가 되겠다며 임용준비를 해나갔다. 결과는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해보기도 전에 진로를 저울질하며 갈팡질팡 했던 나는 졸업 후 백수가 되었다.
아버지는 내 졸업식에 가겠다고 못을 박아 두었지만 졸업은 했으나 취업을 못한 나로써는 열등감에 사로잡혀 졸업식에 가고 싶지 않았다.
졸업식이 코 앞에 다가온 2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한 시대를 바꾼 전염병이 나타났다.
‘우한폐렴’
코로나가 찾아왔다. 전 국민 마스크 착용이 의무가 되었고 초기 감염자들에게는 번호가 붙여져 동선이 알려졌다. 재난문자알림이 시도 때도 없이 울려대고 사회적 거리두기가 실시되기 시작했다.
대면 행사들이 모두 취소가 되는 지경에 이르러 한 번뿐인 대학교 졸업식도 취소가 되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취업도 하지 못한 나는 코로나 상황이 종료되기 만을 간절히 바랬을 뿐이었다. 달력에 코로나 상황을 적어가며 불안과 두려움에 떨었고 기회가 나타나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코로나는 종식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속수무책으로 장기화 되고 있었고 생활비도 점점 바닥을 보였다. 부모님은 이런 나의 상황을 헤아려주지 않았다. 오히려 백수취급을 하며 나를 보면 한숨을 쉴 따름이었다.
나를 위로해주는 사람 하나 없었다.
이제는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았다. 시골의 작은 병원에 간호사 아르바이트 공고 소식을 보고 무작정 지원을 했다. 아르바이트라고 하니 쉽게 도전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