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효심연 Jan 03. 2023

모태신앙이 내린 두 개의 이름

나의 이름과 법명에 대하여

독실한 불교 신앙을 지닌 가정에서 자란 나는, 어릴 때부터 최소 한 달에 한 번씩은 절에 방문했다. 그 때문에 거의 휘발된 유년 시절 기억 속에서도 한 가지 뚜렷하게 기억에 남는 것이 있는데, 그건 바로 어머니가 소리 내어 외우던 기도문이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가피지묘력(加被之妙力), 굽어 살펴 돌봐주시옵소서. 어머니는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근엄하고 정중한 자세로 두 손을 합장하고 그 기도문을 외웠다. 내가 그런 어머니를 따라 멋모르고 합장하면, 어머니는 항상 말씀하시곤 했다.


“유정아, 너는 관세음보살님이 엄마한테 점지해준 아이야. 힘든 일이 있을 때는 항상 관세음보살님을 염불하렴.”


신실한 목소리는 내 마음속에 깊은 뿌리를 내렸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가피지묘력, 굽어 살펴 돌봐주시옵소서. 힘들거나 걱정되는 일이 있을 때마다 그리 합장하고 염불하면, 들쑥날쑥 심란했던 마음이 정갈하게 정돈됐다. 신묘한 일이었다. 불행한 일이 닥쳐도 기도를 했으니 이 정도로 끝난 거라고 긍정적으로 여기고, 일이 좋게 풀려도 기도 덕분이라며 겸손할 수 있었다. 혹자가 보면 내가 매우 독실한 신자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만도 않다. 이건 애당초 불교라는 것이 종교보다는 철학에 가까운 존재여서 그렇다. 유일신을 섬기는 종교와 달리, 불교는 누구나 고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으면 열반에 들고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타 종교인이 보기에 한낱 일반인에 불과한 일개 신자조차에게도 그런 가능성이 펼쳐져 있다는 얘기다. 이 얼마나 놀라운가? 후천적 전지전능의 존재라니.


또 어떤 스님은 불교의 궁극적인 믿음이란 자기 주변의 모든 이들에게서 부처를 찾는 것이라 했다. 모든 이가 부처이고, 그 때문에 인생의 모든 길은 수행으로 이어진다는 얘기였다. 솔직히 단번에 이해하고 수용하기엔 어려운 이야기다. 이렇게 적는 순간에도 반이나 이해했을까. 가족들만큼이나 내가 종교 공부를 깊게 한 건 아닐뿐더러, 다시 말하지만 실상 나는 그다지 독실한 신자가 아니다. 물론 성실하다고는 할 수 있겠다. 일주일에 한 번씩 절에 방문하는 것도, 생각날 때마다 기도문을 외는 것도 게으르면 못할 일이니까. 그렇다고 해도 역시 나는 신자라기보다는 그저 종교를 이용하는 자에 가깝다. 수행 따위엔 관심도 없으면서 내 복됨만 바라는 것은 불교의 진정한 교리가 아니니까. 그렇다 보니 나도 양심이라는 게 있어서, 항상 ‘이 정도나마 평화로이 살아갈 수 있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감사 기도부터 올리고 시작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독실해지는 건 아니다. 양의 탈을 쓴 늑대가 양이 아니듯이.


본인 좋을 대로만 종교를 이용할 거라면 그다지 성실할 필요도 없지 않으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사람의 팔자는 이름과 탄생으로 정해지니 성실하기라도 해야 탈이 없을 거라고. 그렇다. 불교가 모태신앙인 나는 태몽부터가 남달랐다. 내 태몽은 이모가 대신 꿔주셨는데, 꿈에서 웬 산을 헤맸더란다. 어딘가에서 밝은 빛이 쬐기에 그 빛을 따라가 보았더니 후광이 비치는 관세음보살님이 품에 갓난아기를 안고 있었다. 마침 아이를 가지는 게 소원이었던 이모는 냉큼 달려가서 그 아기를 받으려고 했다. 그런데 뒤에서 웬 산신령이 나타나 지팡이 손잡이로 뒷덜미를 죽 잡아끌고 그러더란다. “그 아이는 네 아이가 아니다.” 그 말에 원통하게 울면서 관세음보살님을 봤더니, 우리 엄마가 홀연히 나타나 그 아기를 받아 갔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우리 가족은 내 이름을 작명소가 아닌 스님에게 받아왔다.


도울 유(侑)

바칠 정(呈)


어떻게 해석해보나 헌신하면서 살라는 이름이다. 작명해주신 스님조차도 법명이 ‘유정’이었다고 했다. 나는 내게 주어진 그 이름에 아주 걸맞게도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다. 애착 관계를 형성하지 못할 만큼 가출이 잦았던 어머니가 빚을 한 아름 지고 집으로 돌아 온 날. 나는 그녀와 지금까지 같이 살면서 빚을 전부 대신 갚아주고 있으며, 네 살 터울 남동생을 돌보고 있고, 어머니 몫을 대신해 외할머니에게 효도하고 있다. 아버지와 이혼해 집 한 칸 없어 이모 집에 세 들어 사는 궁핍한 환경에도, 힘들다는 군소리 하나 없이 일주일 내내 일하고 생계를 책임진다. 이렇게 당당하게 쓸 수 있을 만큼 나는 부끄러움 없는 장녀이자 가장이다.


내 팔자가 참 기구하다 싶은 게 이름뿐 아니라 법명 역시 그런 비슷한 뜻이다. 법명은 그냥 아무렇게나 멋있는 것으로 지어주는 게 아니다. 수계식(受戒式)이 시작되기 며칠 전부터 스님께서 직접 신자들의 인적 사항을 받아 사주팔자를 다 봐주시면서 지어주시는 거다. 그렇게 해서 내가 수계식에 받은 법명은 효심연(孝心緣)이다. 효도할 효자에 마음 심자, 인연 연자를 써서 효도하는 마음으로 모든 인연을 이어 나간다는, 내 지금까지의 인생에 더없이 어울리는 법명이라 놀랍기도 조금 우습기도 했다. 희생도 헌신도 효도도 전부 그 안에서 나를 수도 없이 깎고 죽이면서 하는 것이다 보니,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지쳐 있어서, 자조적인 웃음이 안 나오려야 안 나올 수 없었다. 그런 나의 마음을 읽은 건지, 스님께서는 내 머리 위에 손을 한 번 얹어주셨다. 그것이 꽤 의미 깊은 행동이었다는 걸 알게 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아무 신자에게나 그래 주시지는 않는 거라나. 그것만큼은 지금의 내게 조금의 위안이 됐다.


스물여덟 살이 된 지금까지도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절에 방문하며 하루에도 수도 없이 염불을 외운다. 이 세상에 나를 점지해준 뜻을 향해, 살아가고 있던 나에게 내린 뜻을 향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가피지묘력, 굽어 살펴 돌봐주시옵소서. 언젠가는 오로지 나 자신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꿈같은 평화와 안정이 오기를. 그렇게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

작가의 이전글 선풍기가 고장난다하여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