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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심연 Aug 23. 2023

다시는 듣고 싶지 않은 바이올린 소리

 인산인해를 이루는 1호선 노량진역. 1호선 역사 내에 풍기는 퀴퀴한 냄새가 여름 더위와 합쳐져 기승을 부렸다. 때는 7월 1일. 내가 몸담은 사이버 대학교 문예창작학과의 종강 파티가 개최되는 날이었다. 학과 부대표 직책을 맡고 있는 나는, 이번 파티 때 참석 인원에게 명찰을 나누어주고 최종 참석 명단을 확인하는 임무가 있었기에 약속 시각보다 여유롭게 출발했다. 워낙 긴장해서였을까, 푹푹 찌는 더위에도 크게 더운 줄을 모르고 바쁘게 다리를 움직였다. 1호선은 연착도 잦은 만큼 오히려 열차 시간표보다 역에 빨리 올 때도 있었다. 그러니 서둘러서 나쁠 건 없었으나, 문득 내 걸음은 어딘가에서 우뚝 멈추어 서고 만다.


 심금을 울리는 아름다운 바이올린 음색.

 웬 남루한 행색의 신사가 역사 복도에 우뚝 선 채로 바이올린을 켜고 있었다.


 그는 머리가 하얗게 센 나이 지긋한 외국인이었다. 계절에 맞지 않는 옷을 엉성하게 껴입고 모자를 푹 눌러쓴 채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붉은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발치에 바이올린 가방을 열어 둔 채 연주하고 있었기에 그가 버스킹으로 돈을 벌고자 한다는 걸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나는 서울역과 영등포역에 자주 갈 일은 없었으나, 갈 때마다 노숙자들을 잔뜩 보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제 앞에 그릇을 놓은 채 자리에 눕거나 앉은 채로 돈을 구걸했다.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바구니에 오천 원 정도씩은 벌었다. 나는 문득 그 생각이 떠올라, 스쳐 지나며 외국인의 바이올린 가방을 바라보았다. 가방에는 천 원짜리 단 두 장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종이가 한 장 붙어 있었다.



< For Back to Ukraine >



 그 글자가 내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세계 정치에 관심이 깊지 않은 나였다. 내 나라 돌아가는 정세를 따라가기에도 벅찬 나였다. 그렇지만 아무리 무지한 나여도 우크라이나의 소식은 모를 수 없었다.


 나는 내 지갑을 열어보았다. 나는 현금을 아예 안 가지고 다니거나, 간혹 가지고 다니면 기껏해야 오천 원 정도 겨우 들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현금을 들고 다니는 건 귀찮았다. 애초에 지갑이랄 것도 스마트폰 케이스에 달린, 좁고 얇은 지폐 주머니가 전부였다. 그런데 아주 운이 좋게도, 나는 오늘 통장에 입금하려고 넣어둔 현금 만 원이 있었다.


 나는 잠시 머릿속으로 내가 만 원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떠올려보았다. 일단 한 끼 식사를 할 수 있을 터였다. 15평 남짓 좁다란 우리 집에 에어컨을 며칠 정도 빵빵 틀어도 되는 돈이었고, 두 장만 더 모여도 종강 파티 회비를 한 번 더 낼 수 있을 것이었다. 무엇보다 만 원을 벌려면 내가 대략 한 시간을 뼈 빠지게 일해야 했다. 거의 최저시급에 가까운 금액을 받으며 고되게 일하는 내게 만 원은 내 몸살과 등가 교환한 가치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여름, 이 더위에, 봄가을에 입을 만한 긴팔을 입은 채로 진땀을 빼며 쉴 새 없이 바이올린을 연주하면서 이 낯선 타지에서 고향을 그리는 외국인을 위해, 내가 고작 만 원을 쓰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내 손에 오만 원이 있었다고 해도 나는 거뜬히 그 돈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영어 실력이 우수하지 않다. 읽고 듣는 건 어느 정도 독해할 수 있으나 회화가 안 된다. 그렇기에 나는 만 원을 바이올린 가방 안에 내려놓고 외국인에게 눈인사조차 하지 않은 채 돌아 나왔다. 시선이 마주치면 내가 겨우 만 원어치밖에 돕지 못한 것이, 그리고 그의 사정을 지금까지도 자세히 알지 못한 것이 수치스러워질 것 같아서.


 종강 파티가 종료되고 집에 돌아가는 길, 나는 노량진역에서 그가 서 있던 자리를 한참이나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 곡의 제목이 무엇인지라도 물어볼 걸 그랬다. 당신의 연주는 심금을 울린다고 이야기해줄 걸 그랬다. 당신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한다고, 몸짓을 사용해서든 번역기 앱을 이용해서든 표현할 걸 그랬다.


 나는 지금도 그 아름다운 음색을 떠올린다. 그 음색이 다시는 이 한국 땅에서 들릴 일이 없었으면 하고 바란다. 허심탄회한 그의 웃음과 함께, 그 언젠가 한국이란 나라에서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기 위해 연주했던 곡이라며 그가 태어난 나라에서 다시 울려 퍼지기를 바란다. 여전히, 간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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