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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의집고양이 Jun 10. 2021

초콜릿의 맛

우리가 아는 인생의 그 맛에 관한 베이킹



코코아 열매는 기름이 나오기 시작할 때까지 볶아야 한다. 그전에 불에서 내리면 색깔도 곱지 않고 먹었을 때 소화도 잘 안 된다. 반대로 불 위에 너무 오래 두면 열매가 거의 다 타서 씁쓰름하면서도 시큼한 맛이 나게 된다.

티타는 이 기름에서 반 스푼 정도를 떠내어 달짝지근한 아몬드 유와 섞어서 훌륭한 립글로스를 만들었다. 겨울이면 늘 입술이 사정없이 갈라졌기 때문에 미리 준비해두어야 했다. 어렸을 때는 웃을 때마다 통통한 입술이 갈라지고 피가 나면서 엄청 아팠기 때문에 상당히 괴로웠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체념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웃을 일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별로 개의치 않았다. 갈라진 게 가라앉는 봄이 올 때까지 묵묵히 기다릴 수 있었다.

- 라우라 에스키벨,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중에서.



어느 눅눅한 날, 발효가 잘 되는 이점을 활용해 열심히 빵을 만들었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쇼콜라 빵. 나는 표면이 딱딱한 바게트 같은 종류의 빵을 좋아하니 이런저런 레시피를 찾다가 적당한 두께의 껍질에 속은 아이들이 좋아할 만큼 부드럽고 쫄깃한 빵으로 만들었다. 발효시간이 꽤 길어서 밤 12시를 넘기고서야 빵이 구워지는 냄새가 진동하게 되었는데, 솔직히 밤중에 먹는 것이 죄악처럼 여겨지는 세상만 아니었으면 한밤중에라도 한 덩어리는 거뜬히 뜯어먹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강요에 굴복해 그대로 식혔다가 아침이 되어 세 덩어리의 빵을 슬라이스 했다. 그리고 차곡차곡 냉동실에 쌓았다. 아침에 맛볼 빵은 따로 토스터기에 살짝 구운 뒤, 궁극의 초콜릿 범벅을 위해 악마의 잼 누텔라를 발랐다. 아이들은 아침부터 입 주변에 초콜릿 자국을 선명하게 남겼다. 혈당이 아침부터 치솟는 게 좋은 일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보기에는 좋았다. 어린 날들에는 그런 것이 가장 운 좋은 아침이다. 엄마가 아침부터 먹기 싫은 것을 억지로 쑤셔 넣고 학교로 뛰라고 내쫓지 않으면 괜찮은 하루.






결코 달지 않은 초콜릿


문득 오래전 읽었던 라우라 에스키벨의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이라는 소설과 동명의 영화가 생각났다. 초콜릿에 관한 영화는 많고도 많지만, 이 소설은 원조격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여기서 등장하는 초콜릿은 1년 중 9월의 주현절에 주현절 빵과 같이 먹는 초콜릿 음료에서 등장한다. 직접 초콜릿 열매를 볶아서 빵과 곁들이기 위해 초콜릿을 끓여 음료를 만드는 장면이 나오는데, 중간중간 오랜만에 옛집에 모습을 나타낸 가족들이 서로에게 연결된 초콜릿에 얽힌 추억들을 회상하며 초콜릿 음료를 들이켠다. 프루스트에게 마들렌이 그러했듯이 이들을 지난 시간으로 안내하는 것은 뭉근한 초콜릿이다. 전 세계 어디서나 맛의 궁극은 '엄마의 맛'이다. (물론 엄마의 맛이 최선이 아닌 경우도 아주 많이 있기는 하다.) 엄마의 맛을 그대로 물려받은 막내딸 티타는 초콜릿을 휘젓고 주현절 빵을 만들던 어린 시절을 곱씹으면서 생각한다. 삶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고, 바라던 대로 다 이루어지는 것도 아닌 데다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위해서는 사실 너무도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감내해야 한다는 어른의 쓴맛을 말이다.


초콜릿 마니아를 위한 초콜릿 타르트

초콜릿은 원래 달콤하지 않다. 일부러 달게 만들기 위해 가공하지 않는 한 달기만 한 것은 아니다. 라우라 에스키벨의 버전에서 초콜릿이 은유하는 바는 <찰리의 초콜릿 공장>에 등장하는 것처럼 탐욕스럽지도 않고, 줄리엣 비노쉬가 나왔던 영화 <초콜릿>처럼 힐링의 주제도 아니다. 그래서 이 제목이 더 어울리는지 모르겠지만, 원제인 'Como agua para chocolate'은 초콜릿이 끓어오르는 상태를 말한다고 한다. 더 찾아보니 멕시코에서 이 말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어떤 상태를 가리킨다고 한다.  아마도 삶에 있어서 임계점 같은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초콜릿만 넣고 끓여본 일은 잘 없지만, 정말 바글바글 끓이게 된다면 곳곳에서 폭폭 소리를 내며 뭔가가 솟구치듯 끓어오를 것이다. 이건 양 극단의 은유다. 사랑의 모습이든지, 폭발하기 직전의 인간이든지.





초콜렛 구겔호프와 얼그레이 초콜렛 마들렌



초콜릿이라는 무서운 성지


초콜릿 중에서도 거의 분필 맛에 가까운 완전한 다크를 좋아한다. 또 뭔가가 첨가된 것보다는 베이킹하려고 사다 놓은 질 좋은 커버춰를 그냥 아메리카노와 함께 먹는 것이 좋다. 물론 나는 세상에 능력 넘치는 쇼콜라티에들이 세상에 내놓은 다양한 속재료의 초콜릿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지만, 초콜릿 그 자체의 맛이 제일 좋다.


그렇게 나로서는 베이킹에 넣거나 그냥 마구 씹어먹고 있는 커버춰를 가지고 템퍼링 하는 법을 배웠지만, 솔직히 템퍼링은 마카롱만큼 무서웠다. 마카롱은 그래도 좀 정복했으니 이제는 크로와상 만드는 것만큼 무섭다고 해야 하나? 온도에 민감한 초콜릿을 제대로 온도를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안정화 작업을 시키지 않으면 초콜릿이 여기저기 틀에 끼여 떨어지지 않아서 일일이 드라이기로 녹여 닦아내아 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그나마도 나의 소중한 폴리카보네이트 초콜릿 틀은 수세미로 박박 닦을 수도 없으니 한 번의 실패가 가져올 뒷 일은 상상하고 싶지가 않다.



초콜릿 마블 식빵

그래서 나는 그저 커버춰를 이용해 가나슈를 만들거나 해서 베이킹에 활용하는 이상은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 습하고 더운 날에는 그나마도 손에 익지 않은 템퍼링을 말아먹을 것이 뻔하고, 그때부터 시작될 초콜릿 지옥은 나를 끓어 넘치게 할 것이 분명하니까. 그나마도 시도해볼 수 있었던 것은 가나슈를 굳혀 만드는 일본식 생초콜릿인 나마 초콜릿 정도를 만들어보는 것뿐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아몬드에 템퍼링 한 초콜릿을 겹겹이 입혀 만드는 캐러멜 아몬드 초콜릿 정도. 그러나 템퍼링을 해서 뭔가를 만들 때에는, 거기에 들어간 초콜릿의 양보다도 내가 흘린 식은땀이 더 많았을 것이다. 세상 달콤한 초콜릿이 눈물 젖은 김밥만큼이나 처절하게 땀에 절고 있는 것을 먹어치우는 우리 집 동거인들은 영원히 알지 못할 테지만.






영화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포토 중에서.

코코아 열매유의 립밤이 필요 없는 시간


내가 초콜릿을 정복하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문득 궁금해졌다. 나는 과연 이 포비아를 극복할 수 있을까. 쉽지는 않을 것이다. 끓어 넘치는 초콜릿만큼이나 폭발하기도 쉬운 나는 실패를 인내할 자신이 별로 없다. 이따금씩 내가 하는 모든 일에 급브레이크가 걸리거나 사고가 나는 상황이 벌어지면 피가 끓어서 내 얼굴의 모든 구멍으로 솟구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에 그 우아하지 못한 모습은 사랑하는 초콜릿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아마도 어렸을 때는 이렇지 않았을 것이다. 실패가 무엇이고 성공이 무엇인지조차 별로 구별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초콜릿은 초콜릿이면 되었다. 틀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되어 있다 하더라도 초콜릿은 초콜릿일 것이고 핥아먹으며 놀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그때는 초콜릿을 만들면서 나오는 열매의 기름으로 만든 립밤이 절실했을 시절이었을 터.


그러나 이제는 봄까지도 웃지 않고 찢어진 입술이 낫도록 기다릴 수 있다. 라우라 에스키벨은 우리가 포기하거나 얻는 삶의 달콤하고 씁쓸한 모든 것들을 초콜릿으로 은유했다. 결국은 끓어 넘치다가도 어느 순간엔 잠잠해질 테지만, 삶에는 임계점이 분명히 있다. 사람마다 해석은 다르겠지만, 어떤 이에게는 그것이 가장 절정으로 행복한 시간이었다가 가라앉는 순간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절정으로 폭발하는 괴로움을 겪다가 평온해지는 시간일 수도 있다. 그러나 라우라 에스키벨의 은유가 오래도록 통했다고 여겨지는 건, 초콜릿의 양극단의 맛은 그 모두를 아우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은 초콜릿


평생 쇼콜라티에가 될 일은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초콜릿을 다루는 일에 도전하겠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어쩌면 초콜릿을 다루는 법을 연습하는 동안, 안그래도 불안정한 멘탈이 끓어 넘칠 일이 숱하게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경험상 끓어오르던 것들은 어느 순간 잠잠해진다. 지나고 보면 별것 아닌 즐거운 추억이 되어 있을 테니까. 한 몇 년쯤 초콜릿과 싸우고 나면, 내가 초콜릿을 잘 다루든 그렇지 못하든 웃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때는 정말 주방이 초콜릿 지옥이었지.' 할머니가 되어 뭐 이런 소회 정도는 남길 수 있을 테니까. 애증의 초콜릿과는 그렇게 격렬하게 싸우고 난 뒤에 화해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 속의 초콜릿이 그러했듯이. 우리가 아는 삶의 맛도 다 그렇지 않을까? 격렬하게 끓어 넘치듯 증기를 내뿜으며 녹아 섞이고 나면 달콤함과 씁쓸함이 뒤섞이는 우리가 다 아는 그 맛이 남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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