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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의집고양이 Jun 09. 2021

죽은 자와 산 자의 밀당, 문학의 글쓰기

마거릿 애트우드, 글쓰기에 대하여


글을 쓰는 행위는 바로 앨리스가 거울을 통과하는 순간에 벌어집니다. 바로 그 순간, 똑 닮은 두 존재를 가로막던 유리 장벽이 녹아내리고 앨리스는 이곳도 저곳도, 예술도 삶도, 이쪽도 저쪽도 아닌 곳에 존재하게 됩니다. 동시에 그 모든 곳에 존재하게도 되지요. 그 순간 시간이 멈추면서 또한 확장되고, 작가와 독자 모두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시간을 경험하게 되는 겁니다.

- 마거릿 애트우드, <글쓰기에 대하여>


나는 마거릿 애트우드의 수많은 작품들 중에서 딱 두 권을 읽었다. 이 책이 세 번째.... 주로 어떤 작가의 작품을 어느 날 우연히 서점에서 만나면 내 리스트에 새겨놓는다. 그런 뒤 스마트폰을 뒤적거릴 때 늘 그러듯 온라인 서점 앱에서 논다. 그러다가 어느 특별히 스트레스 많이 받는 날 (주로 분기별로) 장바구니에 그간 참고 있었던 화인지 분노인지 욕구인지 욕망인지 모를 것들을 막 쓸어 담는다. 무지막지한 택배가 도착한다. 새 책의 빳빳한 냄새를 맡으면서 일단 책장에 가지런히 정리한다. 그리고 그중에 한 권을 골라 읽기도 하지만, 대개는 택배가 도착했을 때 이미 읽고 있는 게 있으므로 그냥 정리만 한다. 그리고 잘 묵힌다. 그게 익어서 언젠가는 내가 읽게 될 때가 온다. 그러면 읽기 시작하는데, 그러다가 반쯤 미쳐버리는 작가를 만난다. 그러면 그 작가의 다른 작품을 또 온라인 서점 앱에서 놀다 질러버리거나 중고서점을 뒤지다가 발견한다. 그러고 나면 또 묵혀둔다. 그러다가 또 읽는다. 그런 수순으로 그 작가의 책들을 뒤져낸다. 물론 이건 문학의 이야기다. 문학이 아닌 경우는 한 작가에게 미치는 경우가 거의 드물다.


내가 한 작가를 발견해서 그 작가의 책을 두루 섭렵하는 데만도 다작인 작가들은 평생이 걸릴 것이다. (물론 살면서 어떤 작가와 인연이 닿는 것도 연애만큼이나 신기한 일이지만.) 책은 묵혔다 읽어야 제맛이기 때문이다. 마거릿 애트우드도 그랬다. 그녀의 작품 리스트를 다 알고 있고 바이럴 해지는 책들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고, 그녀가 초기에 시인으로 등단했다는 것도 알고 있으며, 먹고살기 위해서인지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해도, 첫 작품은 늘 번역되어 들어오는데 시간이 걸린다는 것도.  (그래서 그것도 최근에 새로 출판되었다.)  초기 작품들이 그러하듯 그녀는 냅킨에도 휘갈겼다고 했다. 그런 내용들이 모여서 그녀는 <먹을 수 있는 여자(The Edible Woman)>을 완성했다. 그녀가 그 책을 쓴 건 60년대 정도였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에는 <케이크를 굽는 여자>라는 제목으로 들어왔었다. (여자를 먹는다는 적나라한 표현이 거슬렸나 이게 뭐야.)


어쨌거나 내가 그녀의 모든 작품들을 다 섭렵하고 나면 그녀는 이미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도 더 이상 분노에 가득 차서 페미니즘 해시태그를 달고 끄적거리기에는 너무 늙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작가와 독자의 관계가 아닐까. 세상에는 셀 수도 없는 사람들이 글을 쓰지만, 그중에서 우리가 흔히 예술을 하는, 대문자로 첫자를 써줘야 하는 Writer들, 그러니까 위대한 작가들은 늘 인류와 그런 관계에 있다. 이 책은 제목에 나오는 것처럼 '글쓰기에 관해' 알려주는 책이 아니다. 한마디로 작가론이고 작가에 관해 우리가 묻고 싶은 수많은 질문들에 대한 강연의 묶음이다.


나는 이 강연집을 통해 그녀가 인용하고 말하는 모든 작가론들 중에서, 이 이중성에 대한 대목이 제일 중요하게 여겨졌다. 그러니까 작가는 방귀를 뀌고 코를 골고 잠을 자는 인격과 글을 쓰는 인격이라는 이중성을 갖는다는 문제에 관해 사람들은 일종의 환상을 가진다. 그리고 과연 그중에 누가 글을 쓰는 것이냐에 관해 질문한다. 누군가가 미성년자와의 사랑에 관한 글을 쓴다면 그 작가가 소아성애자냐고 물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작가론에 대한 논쟁에서 그녀의 대답은 하나같이 위트가 있다. 그리고 캐나다 북부의 멀리 떨어진 오지를 탐험하며 어린 시절 어마 무시한 독서량을 채운 후광을 강연에서 드러낸다. 수많은 적절한 인용구들과 작가들에 관한 그녀의 설명들은 그녀의 소설이 보여주던 암울한 세계와는 달리 재미있고, 경이롭다. 나 같은 독자에게는 이 책을 통해 더 읽어내야 할 작가 리스트가 늘어나는 결과를 낳게도 하고.


위에서 인용한 부분처럼, 작가는 글을 쓰는 동안 두 개의 인격 중 하나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 시공간을 뛰어넘는다. 그리고 작가들은 그래야만 한다. 몇 가지의 글을 쓰는 인격들이 존재하든 그 숫자는 중요치 않을 테지만, 작가라는 존재가 예술을 하는 행위는 그냥 단순히 글을 쓰기만 하는 행위가 아니라 그 수많은 자아들과 타협을 하고 저 멀리의 세계로부터 중요한 이야기들을 가지고 오는 행위이다. 그런 작품들의 리스트는 끝이 없고, 21세기를 살아가는 나는 1700년대에 써진 소설을 읽으면서 그 시대가 아닌 전혀 다른 시대의 시공간을 경험한다. 소설이 만들어내는 시공간은 그 소설을 쓴 시대와 완전히 같을 수가 없다.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른 시공간이 되어버릴 테니.


이 책의 원제는 <Negotiating with the Dead: A Writer on Writing>이다. 그러니까 작가의 글쓰기는 죽은 자와 협상을 하는 것이라는 뜻이겠다. 그녀는 마지막에 오비디우스가 무녀 시빌에게 허락해줌으로써 이루어진 발언을 인용한다.




하지만 운명이 내게 목소리를 남겨놓아, 사람들이 그 목소리로 나를 알아보게 될 겁니다.
- 같은 책, 248p


그녀는 작가가 죽은 자의 공간으로 가서 산자를 위해 이야기를 가져온다고 말한다. 이야기의 원형인 신화들처럼 죽은 자의 땅, 그러니까 다른 시공간에서 과거의 권위로 이야기를 가지고 와 산자들에게 말을 하고, 그 안에서 변화를 일으키고 그곳에다가 새로운 시공간을 펼쳐놓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작가의 시공간은 어디에도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그 과거에서 이야기를 가지고 다시 이 곳으로 돌아오는 일은 매우 어렵기 때문에 (신화에서 죽은 자의 공간으로 들어섰다가 모험 끝에 다시 산자의 영역으로 돌아오는 일부의 이야기처럼) 작가는 애를 써야 한다. 흔히 하는 말로 모든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자 소설 한 권쯤은 들어있고 마음만 먹으면 풀어낼 수 있다고도 하지만, 문학에서 작가의 존재는 그렇게 녹록지는 않은 이유다.


아마도 내가 마거릿 애트우드의 모든 소설들을 다 섭렵하는 순간이 오면, 그녀가 첫 장편을 썼던 시절로부터 한참은 지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식민지 시절을 그렇게 모호한 시공간으로 이해하듯이 말이다. 그때가 되면 그녀가 썼던 페미니즘 소설들은 전혀 다른 시공간의 이야기가 되어있을 것이지만, 또한 그녀가 <시녀 이야기> 등에서 시도했듯, 전혀 현재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새로운 세상의 그림을 통해서 현재의 독자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이 책의 작가론에서는 작가의 사회참여 문제 등 다양한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지만, 처음과 끝을 통틀어 내게는 이 이야기가 가장 중요하게 여겨졌다. 나도 이따금 끄적거리고 기록을 하고 나의 일상을 토로해내지만 그렇다고 내가 작가는 될 수 없는 이유랄까. 그것은 내가 감히 진짜 위대한 작가들처럼 저 먼 과거의 죽은 자 들의 땅으로 가서 어떤 것을 훔치든, 가져오든, 빌려오든 해서 새로운 시공간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달할 이야기를 만들어내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그런 별개의 자아가 없다. 에밀리 디킨슨처럼 철저한 고독 속에서 그 누구도 써내지 못했던 그녀만의 새로운 리듬을 만들어낼 수도 없고, 온전히 죽은 자가 된 이후의 사람들이 경탄해 마지않을 시적 세계를 창조할 수도 없다. 더군다나 지금 당장의 한국사회를 어떻게든 잘근잘근 씹어대기 위해 유용한 관계를 그려낼 수도 없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여기, 지금 이 순간의 시간 속에서 경외의 대상이 되는 수많은 작가들을 어떻게든 더 만나기 위해 애쓰는 것뿐이다.


바라건대, 살아가는 동안 셀 수 없이 많은 시공간들을 타 넘을 수 있다면 좋겠다.

그것이 그런 재능들을 바라보며 늘 부러워하는 미물의 꿈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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