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로맹 가리.
좋은 이야기들은 끝이 없지만, 평생 부캐가 넘쳐났던 로맹 가리의 작품들 중에서 하나를 꼽는다면, 나는 이 단편을 꼽을 것이다. 묵혀놓았다 읽는 습성대로 구수한 장맛이 될 때까지 책을 발효시켰는데 16편의 단편은 부패하지 않고 풍부하게 발효되었다. 시간이 흘러서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 더 이상 그 모습으로 살아남지 않는다 해도 유효한 이야기들이 있는데, 아마 이 단편집도 그럴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부캐로 말할 것 같으면 이 로맹 가리라는 작가도 아쉬울 것 없이 부캐로 흥한 자의 삶을 누렸다. 그는 모스크바를 탈출한 유태인의 후손이었고, 프랑스에서 정착해 외교관의 신분까지 이르게 된다. 그는 작가였고, 때로는 성공하고 화려했으며 그렇지 않은 순간도 겪었다. 자신이 쓰는 글들이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할 때면 부캐를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우리도 너무 잘 아는 에밀 아자르가 되어 <자기 앞의 생>이라는 멋진 소설을 내놓았지만, 화려했던 삶의 기복은 그다지 좋지 않게 끝났다. 파란만장했던 새는 시간이 다 되기도 전에 어느 모래사장으로 추락했다. 그 새가 추락한 뒤 한참이 지나서야 사람들은 에밀 아자르가 그의 부캐였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는 때로는 잘 쓰기도 했고 잊히기도 했지만 나는 이 단편들만큼은 천재적인 이야기꾼이 하는 상상초월의 메타포로 가득 찬 대반전의 이야기들이라는 생각을 했다. 새들은 페루 리마 해변의 자크가 운영하는 카페 앞의 모래사장에 떨어지며 생을 마감한다. 그 종말의 공간에서 자크는 문제의 여자를 도와준다. 문제의 여자는 자신이 모래사장 위에 널브러진 광대들에게 겁탈당했다고 주장하지만 태연한 나이 든 남편은 유유히 그녀를 데리고 돌아간다. 물론 내가 부실하게 기록해놓은 이 줄거리만으로 소설을 판단할 수는 없다. 그녀가 희망을 잃은 자크에게 찾아왔다가 슬며시 유유히 사라지기까지 그의 삶은 놓을 수 없는 희망으로 잠시 번뜩여보려고 애쓰지만 다시 모래사장으로 곤두박질치는 것이다.
사람이란, 결국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절망 속에서 덤덤하게 내려놓는 존재이기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무맹랑할지라도 희망을 조금이나마 붙잡는 존재다. 그가 쓴 나머지 열다섯 편의 단편들도 이 <새들은 페루에서 죽다>라는 제목의 단편만큼이나 여러 번 앞뒤를 왔다 갔다 하게 만든다. 그것이 희망인지, 절망인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탁월한 이야기꾼이었다는 것을 전반적으로 모든 작품들에서 깨닫게 되는데, 아주 짧은 이야기 속에서도 얼마든지 "이 소설은 희망을 이야기할 거야"라고 감히 단정 지을 수 없는 반전을 마지막에 던져버린다는 것. 그러니 오래 묵혀서 발효시켜도 썩지 않는 단편들이다.
희망과 절망을 오락가락하며 인간에 대해 성찰하는 로맹 가리 그 자신은, 결국 희망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의 굴곡진 인생사가 여기저기에 묻어있곤 하는데, 나는 특히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의 섬뜩함이 그의 절망을 드러낸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다. 마치 가스 라이팅을 당하듯, 나를 가장 오래 괴롭힌 어떤 무서운 존재가 "다음에는 잘해줄게"라는 말로 존재하지도 않는 희망을 갖게 하는 것처럼 그는 희망을 가졌었는지도 모르고, 그게 아닌 것을 알았을 때에 얼어붙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무엇이 되었건, 어떤 작가들은 지극히 평범한 가운데 비범한 글을 쓰고, 어떤 작가들은 극적인 삶을 살면서 냉소적인 통찰을 하기도 한다. 아마도 로맹 가리는 후자가 아니었을까.
아마도 이 소설에 대해서 찾아보면 가장 많이 떠다니는 명문장이 <새들은 페루에서 죽다>에 있는 이 구절일 것 같다. 길지 않은 그 단편을 읽다 보면 이 문장이 날아와 꽂히기 때문에. 인간이라는 존재를 어떤 측면에서 꿰뚫어 본 것 같기도 한 이 문장이 인간 그 자체이기도 하고, 로맹 가리 그 자신이기도 하지 않을까 생각해봤다. 물론 쓰는 동안에 누가 어떻게 형상화 되었을지는 그 자신만이 간직하고 떠났을테지만 말이다.
그가 대책 없는 어리석음이라고 스스로 이름 붙인 그 무엇에 다시 점령당하고 만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충분히 의식하고 있었고, 자신의 손 안에서 모든 것이 부서지는 걸 목격하는 일에 습관이 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늘 이런 식이었으므로 속수무책이었다. 그의 내부에 있는 무언가가 체념을 거부하고 줄곧 희망이라는 미끼를 물고 싶어 했다. 그는 삶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는, 황혼의 순간 문득 다가와 모든 것을 환하게 밝혀줄 그런 행복의 가능성을 은근이 믿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