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시받는 아파트 경비 노동자
'23.3.16일 자 한 신문의 헤드라인이다. 주민들에게 멸시받던 아파트 경비원이 결국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내용이다. 이런 뉴스를 접할 때마다, 정말 가슴이 먹먹해진다.
나의 아버지는 지금 오피스텔 경비원이시다. 아버지는 칠십 대 중반이신데, 아파트, 오피스텔, 상가 등의 경비원을 하신 지 벌써 10년 정도 되셨다. 아버지의 인생을 거꾸로 올라가 보면, 아마도 이럴 것이다. 경비원으로 10년, 목욕탕 카운터 아저씨로 15년, 정선 탄광의 부장으로 5년, 대한 석탄공사 계장으로 20년, 육군 공병 하사로 3년...
그렇다. 아버지는 농고를 나와, 입대 후 탄광에서 광부로 오랫동안 일을 하셨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광산이 문을 닫으며 퇴직을 하셨고, 그 후로 이 일 저 일을 하시면서 나를 키워주셨다.
아버지는 공기업이었던 '석탄 공사'에서 당신이 일을 하셨다는 사실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시며, 부장으로 회사를 퇴직했다는 사실에도 매우 뿌듯해하신다. 아버지가 회사를 퇴직하시고 새로운 일자리를 알아보신다고 하셨을 때가, 내가 중학교 올라갈 무렵쯤이었으니까, 계산해 보면 지금의 내 나이가 딱 아버지의 그때였다. 당시는 굉장히 연로하셨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렇지가 않았나 보다.
아버지를 떠 올리면, 눈시울이 먼저 젖는다. 평생을 소처럼 일만 하시다가 규폐증에 시달리시면서 가시는 게 아닌가 싶어서 말이다. 지인분들한테 '아들 자랑'하면서 술 한잔 드시는 게, 일상의 가장 큰 행복이시다. 내 삶의 많은 부분을 본인의 삶이라고 생각하시고 살아가신다. 마치 본인 삶은 없는 듯, 내 삶에 대리 만족을 하면서 말이다.
오랫동안 엄마와 사이가 안 좋으셨다. 성격이며, 스타일, 생활패턴등의 차이로 대부분 엄마가 아버지를 비난하시지만, 또 그냥저냥 살아오고 계신다. 두 분만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을 본 것은 언제인지 생각도 나지 않는다. 특히, 내가 해외로 나오면서 두 분 사이의 벽은 더 높아지셨겠지.
가끔씩 아버지는 집을 나가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엄마의 잔소리가 견딜 수 없다고 말이다. 그러다가도 어느 날이면, '이게 다 내 업보다'하고 평생 짊어지고 살아가야 한다며 웃어넘기신다.
무슨 낙으로 사실까? 가끔씩 드리는 나의 안부전화 한 통, 며칠에 한 번씩 드시는 막걸리 한 병 정도... 요새는 축농증이 심해져서 잠을 잘 못 주무신다고 한다. 규폐증으로 항상 기침을 달고 사시는데, 코까지 막히니 삶의 질이 많이 떨어지셨을 것이다. 작년에는 허리도 많이 아프셔서 앉기도 어려웠던 적도 있었는데, 매일 새벽 4시 반이면 일어나셔서 일터로 나가셨으니... 그 얼마나 힘드셨을까!
아버지께서 '어쩔 수 없지'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신다. 원래 당신이 지향하고자 하는 바가 있으나, 설령 어떤 사유로든 그 일이 잘 안 되게 되면 '어쩔 수 없지 뭐'라고 하며 바로 체념해 버리신다. 사실 '어쩔 수 없지'라는 말처럼 힘 빠지는 말이 없다. 아마도, 이런 부분들이 엄마와의 갈등에 큰 축이 아니었던가 싶다. 아버지께서는 '사람 좋다'는 말을 많이 들으신다. '사람 좋고, 평생 소처럼 일만 하신 분' 감히 아버지를 한 줄로 표현하자면 이렇다.
평생을 그렇게 일을 하셨지만, 제대로 돈을 모으지도 못하셨으며, 조금씩 모았던 돈도 사기로 또는 잘못된 판단으로 날기기 일쑤였다. 목욕탕 카운터는 슈퍼나 고깃집등과 마찬가지로 '보증금' 몇천만 원씩을 먼저 투자해야 된다. 목욕탕이 망하거나, 장사가 잘 안 되거나, 건물에 문제가 있는데 속아서 계약한 경우라면, 보증금은 모두 날리게 된다. 아마도 탄광에서 나오실 때 받으셨던 퇴직금의 상당 부분을 목욕탕 일을 하시면서 날리셨던 것 같다. 그 후 다시 월급쟁이인 '경비원'이 되셨다.
추우나 더우나 새벽 4시 반에 기상해야 하는 삶... 다섯 시에 식사를 하시고 두 개의 도시락을 챙겨, 전철 첫차를 타야지만 한 평짜리 작은 공간이라도 차지할 수 있는 치열한 삶... 때로는 하루종일 차량 통제 바 를 올리고 내려야 하며, 눈이 오는 겨울날은 매일같이 단지 내 눈을 치워야 하고, 낙엽이 쌓이는 가을은 한 달 내내 낙엽을 치워야만 하는 삶... 비 오는 날 아파트 공용 쓰레기 분리수거를 정말 하기 싫어도 해야만 하는 삶이 바로 아버지의 삶이다. 쉬는 날은 없다. 24시간 맞교대... 즉, 하루 24시간을 온종일 경비실에서 지내다가 다음날 아침이 되어야 해제된다. 물론 고용회사의 규모에 따라 가끔은 대체 근무자가 있기도 하고, 일 년에 하루이틀 휴가를 받기도 한다.
어쩌다 대한민국은 이런 경비원분들을 함부로 대해도 괜찮은 그런 사회가 되었을까? 왜 여전히 자신의 자식들에게 '공부 못하면 경비원이 된다'라고 주입시키며, 경비원 분들께 비교 우위를 느끼려고 하는 것일까?
아버지의 동생이신, 나의 작은아버지는 5년 전쯤 고등학교 교사로 정년퇴직을 하셨다. 퇴직 후 2년까지는 즐겁게 놀면서 지내시더니, 3~4년 차 때는 지인분의 회사에 취직하셔서 행정업무를 하시다가 작년인가 그만두셨다. 그리고 얼마 전 작은 회사의 경비원이 되셨다고 한다. 연금이 나와서 먹고살만하시지만, 그냥 '일'을 하고 싶다고 하셨다. 그 연세에 새롭게 하실 만한 일은 없다.
결국 남자들은 누구나 마지막엔 경비원을 하고 나와야지만 , 삶의 일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마치 우리의 인생에 정해져 있는 마지막 관문처럼 말이다.
백세 인생에 60세에 퇴사를 하면 (그것도 많이 잡아준 것이지만,,, 통계청 자료로, 우리나라 직장인 평균 퇴직 연령이 47세라고 한다), 남은 인생은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인가. 대학을 졸업 후, 취업준비, 결혼준비, 육아, 교육, 승진, 은퇴, 노후 준비를 거쳐, 어디 병원 그럴듯한 일인실에서 사망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 우리 인생이 아닌가.
가슴이 답답하다. 아버지가 조금 더 행복한 삶을 사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