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플스테이에서 스님과의 담소
어떤 상황을 만들었을 때
내가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그 생각을 솔직하게 직면할 것.
다른 사람을 위해서 또는 다른 사람 탓에
그러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솔직하게 들여다보고 인정할 것.
그러고 나서 생기는 모든 일들은
타인의 결정일 뿐이다.
그러니 함부로 그 사람이 잘했느니 잘못했느니
판단하며 즐거워하거나 괴로워하는 것은
굉장한 오만이다.
다소 이기적으로 들릴 수 있겠으나
오직 내 생각에만 집중한다.
아픈 고양이를 엄마에게 키워달라고 한 것은
내 탓이다.
불쌍한 고양이를 위한다는 핑계로
하루 종일 낮에 집에 있을 수 있는 엄마에게 보냈다. 그 때는 정말 고양이가 불쌍해서 미칠 것 같았다.
고양이를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해왔지만
사실 내가 케어할 수도 있었다는 스님의 말에 적잖이 당황했다.
그저 주어진 상황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함께 할 수 있었다. 몸이 마비된 인간도 간병인이 하루에 몇 시간 돌보진 않는다. 하물며 고양이도 그렇게 내가 돌볼 수 있었다는 거다. 퇴근 전과 똑같은 자세로 밥도 못먹고 있는 고양이가 너무 불쌍했다고 하니 동물은 삼시세끼 안챙겨 먹어도 된다고 한다..또한 고양이가 그렇게 팔다리가 마비되었을 때 본인 같으면 안락사를 시켰을 것이라 하셨다. 너무나 T스러운 스님의 말에 당황했다. 스님, 안락사라뇨. 자식이 장애가 있다고 해서 안락사를 시키지 않잖아요??? 고양이가 살아있는동안 그저 행복하게 살 수 있게 온 가족이 최선을 다했습니다. 우리 가족의 손길에 골골송을 부르던 그 소리, 우리를 따스하게 바라보던 그 눈빛. 그건 어떻게 설명하실 건가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언어적인 느낌. 서로 교감하며 서로가 느껴지는 그 공기. 스님은 안느껴보셨나요? 세상만물을 어떻게 과학적으로만 생각할 수 있을까요?
고양이가 장애를 얻게 되었던 7년 전, 절실한 기독교 신자인 친구가 하나님에겐 동물을 기도하지 않는다고 해서 적잖이 놀란 적이 있다. 종교는 기본적으로 인간을 위한 것이라고 했었다. 갑자기 그 말이 기억이 나면서 불교 또한 그런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명상을 괜히 신청했다 싶었다.
스님은 템플스테이 오티시간에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을 하라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명상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스님은 첫 날 저녁에 명상을 하자고 하시더니 갑자기 바쁜 일이 생겼다며 다음 날 아침공양 후에 하자고 하셨다. 아침을 서둘러 먹고 약속한 시간에 스님께 연락을 했으나 답이 없었다. 바쁘신가보다 싶어서 방에서 쉬고 있었는데 30분 후에 연락이 왔다. 깜빡하셨다고 미안하다고 하신다.
명상을 시작할 때 스물 토크를 하면서
스님이 어제 외출을 해서 새벽 두시쯤 잠들었다고 한다. 그러고 아까 나에게 연락했을 쯤에 일어나신 것 같다. 명상을 가르쳐 주시며 하품을 하시는 모습에 스님 또한 사람이구나 싶었다. 아차, 스님은 부처가 아니지. 직업으로서의 종교인으로 인식하니 더 친근해지면서 스님의 말씀들이 곧 부처는 아니기에 모두 100%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사주를 볼 때 나에게 필요한 부분만 배우고 새기면 그만이다.
스님이 우리 가족의 상황을 자세히 알지 못하고
호통만 치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지만
이 중에서 나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해석하기로 했다. 일단,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필요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퇴근하고 하루종일 그 자리에 있는 고양이를 보며 울었던 나날들은 결국 내 자신이 힘든 탓이였다. 그러한 답이 안보였던 상황에서도 어찌됐든 내가 데리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엄마에게 키워달라고 했다. 낮에 혼자 있는 고양이가 불쌍하다고 말하며 부탁했다.
그런데 사실 난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혼자서 이 엄청난 것을 해낼 자신이 없었다. 이 사실을 애써 외면해왔다.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하니까.
그러므로 엄마가 고양이의 죽음을 두 달 가까이가 되어 알린 것은 내가 원망할 일이 아니다. 내가 못키운다고 맡겨 놓고, 그저 영상통화로 안부만 물어놓고 이제와서 다른 사람을 탓하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일이다.
고양이의 죽음으로 괴로워하는 엄마를 보며
나는 이게 다 내 탓이란 생각에 괴로웠다. 엄청난 불효를 저지른 것만 같았다.
이 괴로운 마음을 어떻게 극복해야하냐고 묻자
스님은 내가 아주 오만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고양이를 키워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겠다고 선택한 사람은 엄마다. 그 사이에 안락사를 시킬 수도, 다시 나에게 보냈을 수도 있었는데 8년이나 같이 살았던 것도 엄마의 선택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선택에 대해 함부로 내가 괴로워하는 것은 굉장한 오만이라 하셨다. 이 말씀을 듣고 당시에는 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모든 것이 나로 인해 자초한 일인데 엄마한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니. 이기적인 딸이 된 것만 같았다. 그러나 스님은 자신의 생각에 집중하라고 하셨다. 타인의 결정에 대해 내가 함부로 판단하고 슬퍼하지도 기뻐하지도 말라는 것 같았다.
그럼 우리 고양이는 8년을 움직이지 못한 채로 살면서 괴로웠을까요? 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것 또한 내가 아닌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알 수 없다고 했다. 1박조차 집을 비우지 못하고, 최고급 사료만 먹이며 최선을 다해 고양이를 키웠던 우리 부모님이 들었다면 너무나 슬퍼하실 것 같았다. 난 고양이가 그래도 우리 가족 곁에서 행복했다고 믿고 있었고 스님께도 그렇다고 확인받고 싶었다. 그러나 스님의 대답은 어찌보면 너무 냉정했다. 자연의 순리대로라면 우리 고양이는 아픈 상태니 자연도태될 대상이였고 언제든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다. 더군다나 동물이 제 생을 다 산다고 해도 인간보단 짧게 사니 그 죽음은 언젠간 보아야 한다고 하셨다.
부모님에게 고양이를 떠맡긴 것에 대한 괴로움도
우리 고양이가 살면서 행복했을지 힘들었을지에 대한 것도 모두 나 자신이 아니라서 함부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다른 것에 대해 함부로 판단하는 것은 굉장한 오만이다. 좀 이기적으로 들릴 지 몰라도 오직 나 자신의 결정과 생각에만 집중하고 판단해야한다. 다른 것에 대해 괴로워하는 것은 오만함이 있어서다. 감히 부모님의 결정을 내가 판단하고 괴로워하는 꼴이다.
명상을 배우면서
갑자기 생각이 났던 고양이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스님이 어떻게 이렇게 냉정하게 말할 수 있나하며
모든 스님이 다 현자는 아니니까~하며 생각을 날려버리려고 했는데
템플스테이를 마치고 조용한 카페에서 생각을 해보니
결국은 내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해 자초한 일들이다.
남 탓으로 돌리면 내 마음은 편해진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유통기한이 있다. 언제나 내 마음을 회피하지 말고 직면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여기까지 생각에 미치니 모든 것이 또 하나로 귀결된다.
‘내 마음의 주인은 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