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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골 샌님 Aug 06. 2023

인생이 대하소설인데 왜 못쓸까?

서사욕망과 이야기,  서사, 담론

 질곡 많은 인생을 살아온 팔십 대 후반의 어떤 분이 나를 붙들고 한참 자신의 이야기를 하셨다.

"내 인생을 풀어보자면 소설책 10권도 모자라. 내 얘길 소설로 쓰면 불티나게 팔릴 거야."

 한국의 현대사와 같이하며 이민 생활의 고충까지 더해진 인생이 파란만장했다. 그런데 소설책 몇권 분량의 인생사,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다.   소설보다 더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종종 이렇게 말하곤 한다. 또  "조용한 시골에 내려가 살며 인생을 글로 고 싶다"는 말 역시 자주 접한다.  그런데  실제로 실천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그래서 사람들은 쓰는 대신 읽기를 선택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 하는 동시에 다른 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인생을 반추하고,공감한다. 문학이론에서 이를 인간의 내러티브(서사) 욕망이라고 한다.  심리, 정신 분석학적으로 사람은 삶의 의미를 끓임 없이 찾으며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욕구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신의 인생이 대하소설이라는 분께  "직접 인생이야기를 써 보세요. 인생 회고하시며 자서전....."라고 했더니 자서전 소리에 손사래를 치며 막으셨다..  

" 내가 정주영 회장도 아니고 자서전은 무슨.... 요즘 자서전 누가 읽는다고. 난 소설이 좋은데  글재주가 없으니 나를 주인공으로 대신 소설 안 써보려오?."

앞서 불티나게 팔릴 거라고 호언장담하시던 패기는 간대 없이 나에게 본인 이야기를 소설로 쓰라고 강권하신다.  "장편은 써본 적도 없고 무엇보다 제가 몸이 안 좋아서..." 암환라는 핑계로 난감한 상황을 종료시켰다.

 이런 상황을 가끔 겪는다. 그런데 왜 소설이라는 장르로 인생을 기록하고 싶어 할까?  사람은 다큐멘터리리나 자서전등의 논픽션보다는 문학 서사가 한 개인의 파란만장한 경험과 사고의 흐름을 보다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인지한다. 그런데  하필 사람들이 비꼬며  "소설 쓰고 있네"라고 말하는 거짓인 소설을 왜 읽고 쓰려고 할까?   문학적으로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현실에서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알지만 아직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의 끝을 모르기에 인생을 총 체화 할 수 없고 삶의 의미를 이끌어내기 어렵다. 의미는 처음과 끝이 있는 완결된 형태의 서사에서 발생한다. 그래서 동시대의 세상과 인간군상을 가상현실로 재현(representation)한, 현대 서사문학의 대표 격인 소설을 욕망한다. '나와 닮은 삶' 만들기, 야망을 가진 개인의 일생을 서서화 하려면  주인공의 인생을  그/그녀가 사는 제한된 세계를 만들고  총체화 할 수 있는 원칙을 따라야한다, 한 개인의 이야기가 시작되며  사건이 발생하고 발전하며 주인공은 세상과 인간관계 내의 갈등에 직면한다. 주인공은 갈등의 골이 깊어지며 위기를 맞는. 주인공이 이를 해결하려 노력하다 파국에 이르게 되기도 하고  행복한 결말을 맞기도하며  대단원에 이른다는 원칙이다. 그런데  우리 삶은 끝을 설정할 수 없기에 자신의 인생을 그대로 소설로 만들기가 어렵다. 물론 작가들이 자전적 소설을 쓰기도 하지만 '작가 인이 이야기 자체가 될 수 없기에 나와 닮은 사람과 세상을 만들고 시간을 한정하여 소설 세계를 구축할 수밖에 없다.  또는 내 인생서사  대신 다른 완결된 서사를 읽거나 보고 들으며  이러쿵저러쿵 평을 하며 의미를 찾는다.   

 

  문학이론가인 피터 브룩스(Peter Brooks)는 인간의 서사 욕구(narrative desire)를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쾌락원칙을 넘어서(Beyond the Pleasure Principle) 참고해 이 세상에서 치열하게 사는 인간의 서사 욕망은 죽음, 쾌락, 충동이 현실원리와 충돌하면서 발생한다고 말한다.  브룩스는 현실 세계를 살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인간은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 존재라는 사실을 극복하기 위해 현재  삶의 의미를  지 속적으로 찾는다.  그는 인간의 독서 충동에 대해, 파편화되어 혼란한 인간이 삶의 혼돈 양상에 맞서서 끝을 알 수 있는 제한적이며 의미를 얻을  수는 총체적인 질서를 찾고자 하는 충동 때문에 독서를 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브룩스는 독서의 즐거움을 프로이트가 설명하는 정신역학과 동일시하며, 인간은 성적 욕망의 메커니즘 때문에 글을 읽는다고 말한다.  서사(내러티브) 욕망은  독서를 하게 하고 인간은 읽기가 끝이 나면 만족감을 얻게 된다. 하지만 그 만족감은 또다시 새로운 서사를 찾아 읽으려는 충동으로 연결된다.  이는 역으로  작가가 고통스럽게 창작을 하고 나면 끝냈다는 만족을 얻지만 곧바로 더 나은 작품을  쓰고자 하는 욕망이 작동하는 원리다.  욕망의 끝은 곧 시작을 의미하며 끝은 죽음으로 표현될 수 있고 프로이트는 이를 '죽음충동(death-drive)이라 말한다.  인간의 성적욕구는 만족감을 얻기 위해 달려가고 만족 감을 얻으며 욕구는 끝이 나지만 곧  또다시 욕구가 성행위를 갈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서사는 죽음 있어야 존재가능하고 또 새로운 시작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인간은 존재하는 시작부터  서사라는 형태로 이 지구상의 공간에 벌어진 사건을 끊임없이 이야기로 만들어내며 이 세계를 조망하려고 해왔다. 이야기가 형성되고 전달되는 과정에서 필수 적인 것은 시간, 공간, 개연성에 대한 이해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중성을 띠게 된다. 왜냐하면 서사체는 이야기와 이야기 전달 방식인 담론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즉 소설 속의 이야기 세계와 독자가 사는 세계가 존재한다.  이야기가 전달의 행위를 통해서 의미를 가진다는 앞선 전제를 통해 이야기와 담론을 설명할 때 제라르 주네뜨가 강조하는 이야기의 특성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제라르는 주네트는 모든 사사의 기본적 특성으로서-청각적 서사든, 쓰인 서사든지, 영화적 서사든지-이중적 시간성의 동시 공존을 지적했었다. 그것은 이야기된 것의 시간 혹은 이야기 시간(기의의 시간:the time of the signified))과 이야기하는 시간(기표의 시간: the time of the signifier)이다.  

  서사(narrative)는 이야기(story)와 담론(discourse)으로 구성된다.  이야기가 서사 표현의 내용이라면  담론은 그 표현 양식이다. 즉 이야기를 소설로 전달할지 영화로 전달할지 혹은 만화로 전달할지 이야기를 담아 전달하는 행위가 담론이다. 이때 중요하게 관찰되는 것은 이야기가 전달매체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하나의 구조라는 것이다. 하나의 서사는 매체를 통하여 조직된 텍스트이며 이 텍스트의 조직은 계획될 수 있다는 것이다.  구조 주의자들은 어떠한 매체를 이용하든 전체의 전달 내용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 자율적인 의미의 층, 즉 이야기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소설 속 이야기가 영화화되기도 하고 그 반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야기는 개별적이고 독립적이라 말하지만 어떤 매체로 전달하느냐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면 장편 소설을 읽고 줄거리를 요약하라는 과제 내라고 하면 많은 학생들이 며칠씩 읽어야 하는 소설대신 길어야 2시간  반을 넘지 않는 각색영화를 보고 줄거리를 요약해 낼 수 있다. 간혹 시간 제약을 많이 받는 영화가 결말을 틀게 되면 문제가 생기기도 하지만...

 이야기는 독립적이지만 담론에 담아 이야기를 전달할 때 이야기 전달자 혹은  매체의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이야기를 하는 소설이나 영화는 이데올로기를 선전하는 다큐멘터리나 상업 광고에 이용되기도 한다. 특히  영화는 정치․사회적 억압과 대중 선동 장치로 악용되곤 하였다.  이야기를 전달하는 담론은 사건들의 시간적 배열인 이야기보다  개인의 정신세계를 만들고 전달할 수 있는  창작의 근간이라고 볼 수 있다.  소설과 영화는 현대 담론의 대표적인 매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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