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치 앞을 모르는 일러스트레이터 부부의 하루 <귀여워서 그래>
포롱과 난 가장 좋아하는 것과 가장 싫어하는 것이 같다. 그림 스타일부터 식성과 생활패턴, 걸음걸이, 그림도구와 재료, 선호하는 연습장의 크기까지 다른 우리는 너무 달라서 끌렸고 감정의 끄트러미만 살짝 닿아 있어서 편했다. 참, 그 끄트러미가 뭐라고 엄청난 힘이 있어서 결혼까지 바람개비 돌듯이 이루어졌다. 너무 같았다면 딱 붙어서 그대로 툭 떨어져 버렸을 텐데 빙글빙글 잘도 살아왔다. 바람개비를 정신없이 돌렸던 돌풍 같은 사건이 2개가 있는데 사귀기 전의 ‘하라주쿠 분실사건’과 사귀고 난 후의 ‘파리 낮잠 여행’이다. 이 두 이야기보따리를 모두 풀려면 주말 그림 작업까지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라 다음에 하라주쿠 분실사건과 파리 낮잠 여행을 다시 풀어보는 걸로 하겠다.
2018년 초봄, 그날도 둘이 조그만 사당 작업실에 있었다. 세로로 길쭉한 형태의 좁은 작업실이었어서 마치 기차 속에 사는 것 같았다. 그날은 전날 다녀온 행사가 힘들었어서 그림도 그리지 않고 너무나 많이 와버린 8절 도화지만 한 포두부*를 두드리며 히히덕거렸다.
*지류함에 넣어야 되나 고민이 될 정도로 너무 크고 양도 많아서 한 달 내내 둘이 포두부만 먹었다. 왜 이렇게 많이 샀냐고 물으신다면 (갑자기 눈물이) 건강해지려고 샀다. 사당은 술안주만 파는 동네라 매일 치킨과 누룽지통닭과 맥주로 하루를 살았는데 포롱이 이렇게 살 순 없다며 시킨 두부였다. 한 달이 지난 후 포롱은 신장이 급속도로 나빠졌고 포두부 프로젝트는 중단되었다.
커다란 포두부를 바닥에 내려놓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포두부 요리법이었나.. 별 시덥지도 않은 이야기로 새벽까지 떠들었다. 그러다 포롱이의 이야기로 넘어갔고 까맣게 타버린 저 마음을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하다 프랑스 이야기를 꺼냈다.
“뽀롱, 죽기 전에 프랑스는 가봐야 하지 않겠어?”
포롱의 눈동자가 떨렸다. 긍정의 떨림인지 두려움의 떨림인지는 모르겠지만 포롱의 멈춘 마음이 떨리는 것 같았다. 가야겠어, 파리
그 자리에서 2주 뒤 파리 비행기표를 왕복으로 끊었다.
샤를드골 공항에 도착한 포롱의 얼굴은 밝게 상기되어 있었지만 약간의 긴장이 파르르 보였다. 리무진 버스를 타고 에펠탑 근처 숙소로 향했다. 하나 둘 제법 유럽 같은 건물들이 보이더니 개선문을 지나고 에펠탑도 지났다. 창 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에펠탑을 보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포롱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생각보다 좋을까, 생각만큼일까. 옆눈으로 힐끔 쳐다본 포롱은 아무 말도 없이 댕그란 눈으로 창 밖을 보기만 했다. 그때 조용히 바라보던 파란 파리 하늘은 지금도 꿈만 같다.
포롱과 나는 조용하게 파리를 돌아다녔다. 말을 하지 않아도 어색하지 않은 사이가 되어서 좋았다. 그냥 말없이 벤치에 앉으면 따라 앉고, 길에 멈춰 서면 우와-라는 추임새와 함께 따라 서서 바라보았다. 우리의 조용한 여행은 아침 일곱 시부터 시작했다. 아침 일곱 시에 일어나 한 시간 동안 그림을 그리고 아침을 먹고 여섯 시간 동안 파리 시내를 돌아다녔다. 오후 네시 반 즘 숙소에 돌아오면 오후 다섯 시에 낮잠을 잤다. 열네 시간 동안 잠을 잔 후 눈을 뜨면 다시 아침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9박 10일의 여행 동안 밤의 파리를 본 적이 없다. 낮잠을 잔다고 둘 중 누구 하나 불평도 없고 짜증도 없었다. 오히려 낮잠 맛집이라고 엄지 손가락을 세우고 춤을 추며 꺄르르 웃었다. 어딜 가나 변함이 없는 우리를 보며 어느 곳이든 무섭지 않고 우스워졌다. 그리고 동시에 이 친구와 평생 함께 하고 싶다고 생각이 들었다.(난 어릴 때부터 이렇게 가볍고 우습고 귀엽게 당황스럽게 살고 싶었다) 이 얘기를 지인들에게 말하면 어떻게 에펠탑 야경을 안 볼 수 있냐고 화들짝 놀라는 게 대다수이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꺄르르 웃으며 답한다. ‘얼마나 사치스럽고 낭만적이야, 파리에서 낮잠이라니!’
아직도 둘이 그 여행의 낮잠을 얘기하며 낮잠을 잔다. 늙어서도 같이 누워서 낮잠을 자고 있었으면 좋겠다. 포두부 얘기도 하고 에펠탑 얘기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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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쓰리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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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포롱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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