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치 앞을 모르는 일러스트레이터 부부의 하루 <귀여워서 그래>
*오늘의 이야기는 첫 번째 글에서 지나가며 말했던 <하라주쿠 분실사건> 에 대한 얘기다. 3박 4일 동안의 여행이다 보니 이틀씩 상, 하편으로 나누어서 이야기를 적어 보았다. 생각보다 밍밍한 이야기일지라도 나에겐 시큼달달한 충격이었던,
이게 다 귀여운 인형부터 시작됐다. 저 조그만 콩눈에 옥수수알 같은 코, 퉁실한 발바닥은 나를 정신 못 차리게 만든다. 어릴 때부터 인형을 끼고 놀았던 나는 내 맘대로 골라 데려올 수 있는 어른이 된 나를 좀 좋아하게 되었다. 밥 대신에 솜뭉치 인형을 고르던 2016년 늦가을, 나와 다르지 않던 컬렉터 포롱이와 사당 작업실에 있을 적이었다.
“선배*-! 이 일본 작가님 알아요?”
응응, 당연 알고 있었다.
“나 그 작가님 사랑해”
그 작가님의 인형들만 생각하면 미간이 절로 찌푸려지고 이빨에 힘이 들어간다. 자세를 고쳐 잡고 앉아서 그간 캡쳐해놓은 작가님의 인형들을 훑어 보여주었다. 직접 그린 듯한 길쭉 동그란 눈, 입까지 쭉 떨어진 동그란 코는 날 끙끙 앓게 만들었다.
“포롱! 11월에 도쿄 디페* 같이 갈래? 이 작가님 도쿄 디페나온대!”
*선배 - 대학교 때 포롱을 처음 알았다. 항상 그림을 그리고 있거나 호탕하게 웃고 있던 후배였다. 2017년 봄까지는 날 선배라고 불렀다.
*도쿄 디페 - 도쿄 디자인페스타의 줄임말. 1년에 2~3번 도쿄 빅사이트에서 열리는 디자인 행사. 수많은 작가 부스들과 작업들을 보면 느슨했던 정신이 바짝 차려진다. 작업에 대한 자극을 받는 제일 쉬운 방법은 ‘잘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이라 생각한다.
마침 여행 경비도 한번 다녀올 정도로 통장에 모여 있었고, 날짜도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그리고 하나부터 일곱까지 잘 맞는 여행 멤버까지 완벽했다. 남하고 하나부터 일곱까지 맞는 게 쉬운 일인가, 하물며 작업하다가 춤추는 타이밍, 갑자기 콧구멍까지 넓혀가며 노래를 불러보는 타이밍까지 어긋나는 것이 없었다.(나름의 변주와 기교, 엇박, 추임새, 뛰어나지 않은 음악 실력까지 너무나 잘 맞았다) 이렇게 잘 맞는 동료라면 이 여행 괜찮지 않을까? 도쿄 골목에서는 어떤 춤을 추게 될까, 노래는?
2016년 11월 25일. 도쿄 롯폰기
말로만 듣던 롯폰기. 숙소에서 조금만 걸어 나오면 빨간 도쿄타워가 보였다. 도쿄타워에 대한 대단한 로망이 있어서가 아니라 어플에서 제일 할인을 많이 한 3.5성 호텔이 롯폰기에 있었다. 숙소가 높은 곳에 있어서 지하철역에서 꽤 걸어 올라가야 했지만 에스컬레이터도 많았고 걸어오는 지하에 가게들이 빼곡해서 걷는 지루함이 없었다. 가게들 중에선 한정판 사과 햄버거를 팔던 곳이 가장 맘에 들었다.
숙소에 짐들을 던져 넣고 나니 힘이 쭉 빠졌다. 김포공항에서부터 떠들며 온 것이 큰 문제였다. 포롱의 눈도 초점이 없었다. 초점을 읽을 수가 없어서 내 얘기에 웃는 건지 내 웃긴 모자를 보며 웃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많이 위험해 보이네. 콜라..콜라나 감자튀김? 햄버거를 먹으면 될까.
“포롱, 여행 시작부터 좀 그럴라나 싶은데..일단 저기서 햄버거 먹으면서 쉴래?”
햄버거 먹으면서 쉬자는 소리가 왜 그렇게 부끄러웠던지. 그날따라 치즈버거같이 옷을 입어서 더 그랬다.
“왁! 나도 너무 피곤했어. 여행이고 뭐고 일단 앉자.”
다행이다, 너도 체력 게이지가 짧구나.
햄버거집은 식사 시간이 지나서인지 쉬기 좋게 조용했다. 적당히 떨어져 앉은 사람들과 누런 조명, 푹신한 의자까지 적당했다. 여기서도 둘이 사람이 없는 애매한 시간에 애매한 식사를 한다는 게 웃음이 났다. 의자에 널브러져 있는 포롱은 메론소다를 원했다. 난 삼십 분 전에 먹고 싶었던 사과 햄버거와 메론소다를 시켰다. 그리고는 다음 일정도 없이 멍하니 앉아서 느릿느릿 햄버거를 슴슴하게 먹었다.
2016년 11월 26일 오전. 신주쿠
신주쿠에 오는 이유는 단 하나, 커다란 빌딩 화방 '세카이도 SEKAIDO'가 있어서다. 길 끝에 솟아있는 세카이도 건물을 볼 때면 언제나 감탄을 하게 된다. 이 높은 건물 안에 온통 미술재료들이 차있다니! 언제나 활짝 열려있는 1층으로 들어가면 일단 고개도 돌리지 않고 에스컬레이터로 향한다. 1층은 각종 사무용품과 잡화, 엽서, 카드, 스티커들이 있는데 정말 위험하다. 각 층마다 계산대가 있어서 그 층에서 고른 물건은 해당 층에서 계산을 해야 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1층에서 귀여운 고양이 사무용품을 사느라 돈을 다 써서 3층에서 물감을 못 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장바구니를 2층에서부터 든다.
다시 한번 주의드립니다. 장바구니를 1층에서부터 들고 다닌다면 3층을 가기도 전에 돈이 바닥납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오면 온갖 종이와 디자인 용품, 미술 서적들이 가득한 2층이 보인다. 참 결도 제각각이고 크기도 제각각이고 두께도 다 다르네, 종이를 다섯 종류 집게 되면 심호흡을 한번 한다. 심장이 간신히 조용해지면 눈을 반만 뜨고 세 종류를 내려놓는다. 그리고는 필요한 수채화 종이만 계산대에서 재빠르게 계산한 뒤 3층으로 올라간다. 3층에서는 포롱이 오일파스텔 오만 오천 개를 손에 들고 고민을 하고 있을 것이다.
대망의 3층은 내 주재료인 수채화 물감과 포롱의 주재료인 오일파스텔이 함께 있는 (우리에게는) 메인층이다. 브랜드별로 정리되어 있는 재료들을 보면 정신이 혼미해진다. 간혹 일본에서만 구할 수 있는 한정판 색깔들이 있으니 자세히 잘 살펴보면 보물 같은 재료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역시나 포롱은 일본에서만 구할 수 있는 오일파스텔과 처음 보는 오일파스텔들을 바구니에 가득 담고 있었다.
"우리 이러다가 내일 도쿄 디페가서 아무것도 못 사면 어떡해?"
정말 걱정이었다. 이렇게 되면 도쿄 디페에 가서 인형을 못 산다.
포롱과 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한동안 바구니 속 오일파스텔을 덜그럭거리던 포롱은 특유의 결심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포롱의 결심한 표정 - 눈썹 근육에 힘을 단단히 주고 입모양을 정확히 움직여서 말하는 표정을 말한다.
"일단, 이 가격 안으로 계산해서 다시 담자. 이러다가 우리 인형 못 사."
"그래그래, 우리 인형 사야지. 난 이만큼만 살래."
마음속으로 '물감 월드컵'을 128강까지 한 후에 16강까지 오른 물감들을 비장하게 계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포롱도 씩씩하게 계산한 후 조그만 종이가방을 들고 등장했다. 오일파스텔을 얼마나 덜어낸 거야, 잘 참았다 우리, 어려웠다 정말.
"나 잠깐 4층에 화장실 좀 다녀올게."
"그럼 난 4층 구경하고 있을게."
생각 없이 오른 3-4층 에스컬레이터 끝에 네모난 것들이 보였다. <액자>. 우리가 가장 못 참는 물건 중 하나였다. 액자는 그림의 메시지와 분위기까지 바꿀 뿐만 아니라 강한 힘을 실어줄 수도 약하게 빼줄 수도 있는 마법 같은 물건이.. 아니 아니, 정말 이러다 진짜 인형을 못 산다. 나와 포롱은 엉덩이에 불이 붙은 듯 4층을 종종걸음으로 가로질러서 다시 3층으로 내려왔다. 멈추지 않고 1층까지 뛰어오듯 걸어 내려오고 나니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그 상황에 왜 그 말을 했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지만 '하라주쿠 가고 싶네'라고 말했다. 갑자기 무슨 하라주쿠?
순간 포롱의 눈썹 근육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가자 그럼!!!, 하라주쿠!!!!"
이유를 묻지도 않고 종이가방을 배낭에 척척 집어넣더니 씩씩하게 신주쿠 지하철역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는 포롱을 보니 웃음이 났다. 빙빙 돌아가더라도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