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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누누 Nov 09. 2021

퇴사하고 뭐하지?

자기 객관화를 해보았다

퇴사하고 뭐하지?


자기 객관화를 해보았다.


일이 나와 맞지 않아 퇴사를 했으니 이번에는 나와 맞는 일을 하고 싶었다. 내가 잘하고 싶은 일, 잘할 수 있는 일. 그러려면 내가 뭘 잘하고 뭘 잘할 수 있으며 뭘 잘해야 하는지부터 상세히 알아야 했다. 내가 잘하는 게 뭐지? 뭔가 한 번에 탁 떠오르는 게 없다. 내가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는 사람은 아닌데 그래도 나름 성취도 있었고 주변에서 뭔가 잘한다는 말도 해줬던 걸로 아는데 그 뭔가가 뭔지 기억이 안 난다. 어? 나 잘하는 거 없나? 왜 생각이 안나지? 


잘하는 거 찾기는 잠시 뒤로 미뤄두고 잘하고 싶은 일을 찾아보기로 했다. 최근에 깨달은 사실 중 하나인데 나는 잘해야 하는 일보다는 잘하고 싶은 일을 잘하는 사람이다.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면 잘할 수 있게 된다. 이유는 나도 모른다. 아무래도 내가 흥미 위주의 사람이라 그럴지도. 

요즘 잘하고 싶은 건 다름 아닌 배드민턴이다. 지난여름부터 일주일에 한두 번 친구와 집 앞에서 배드민턴을 치기 시작한 게 어느새 세 달이 넘어가고 있다. 처음에 비하면 이제 랠리도 꽤 되고 전보다 더 오래 칠 수도 있게 됐지만 그래도 좀 더 잘 치고 싶다. 그렇다고 내가 배드민턴으로 먹고 살 건 아니니까. 이건 차치하고.  

생업과 연결할 수 있는 잘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 있을까? 실은 그냥 누워있고 싶다. 어쩌면 나는 그냥 낮에 혼자 카페에 가고 싶어서 회사를 관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아마 반 이상은 사실일 것이다. 정말 아무리 생각해도 잘하는 게 뭔지도 모르겠고 잘하고 싶은 게 뭔지도 모르겠다. 친구들이 ‘너 이런 거 잘하잖아’라고 말해줘도 ‘그렇긴 하지만 그걸로 돈 벌어먹고 살 정도는 아니지’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친구들이 내게 말해준 내 장점은 다음과 같다(기억나는 것만 써 본다).

남의 얘기를 잘 들어준다.

농담을 잘한다.

글을 잘 쓴다.

이상한 소리(워딩 그대로 적자면 쌉소리)를 잘한다.

목소리가 좋다.

섬세하다.

특이하다.


더는 기억 안 난다. 아마 저 위에 쓴 것과 어느 정도 비슷한 것들이겠다. 자 이렇게 장점들이 있으면 저걸 활용하면 되지 뭐가 문제냐? 생각할 수도 있을 거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저것들을 모두 반박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남의 얘기를 잘 들어준다->그건 당신이 나와 관계있는 사람이고 내가 당신에게 애정이 있기 때문이다. 모르는 사람 얘기까지 들어주기에는 내가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 아니다. 

농담을 잘한다->농담 잘한다고 누가 돈을 주진 않는다.

글을 잘 쓴다->이건 그냥 돈이 안 된다.

이상한 소리를 잘한다->이것도 농담과 동일하다.

목소리가 좋다->그렇다고 성우를 할 수는 없다.

섬세하다->섬세한 걸로 뭘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사실 내가 섬세한 것도 잘 모르겠다. 그냥 당신이 나를 너무 좋게 봐주는 것 같다.

특이하다->나 솔직히 하나도 안 특이하다. 

모두 반박했다. 이쯤 되면 그냥 스스로에게 어깃장을 놓는 수준이다. 


자기 객관화는 스스로를 높이는 것도 아니지만 스스로를 낮추는 건 더더욱 아니다. 좋은 점과 좋아질 수 있는 점을 동시에 찾는 일이다. 나는 못하는 게 없다고 하는 것도 자기 객관화가 아니고 나는 잘하는 게 없다고 하는 것도 자기 객관화가 아니다. 명백히 나는 후자의 관점에서 자기 객관화에 실패하는 중이었다. 주변에서 일러주는 내 장점이 분명 장점이 맞는 것 같고 나도 어느 정도 인정이 되는데 그걸로 돈을 벌 수 있냐? 생각하면 그 정도는 또 아닌 것 같다. 그냥 주변에서 조금 잘하는 정도. 그걸 가지고 사회에 나가 나만의 무기로 쓴다고 생각하면 또 그 정도 수준은 아닌, 예를 들면 친구들 사이에서 좀 잘생긴 친구 정도인 것이다. 친구들 사이에서 좀 잘생겼다고 연예인이 될 순 없으니까.


퇴사하면 뭐 할 거냐는 질문에 글을 쓰니까 외주 원고 같은 거 하고 그냥 하고 싶은 거 하면서 프리랜서 생활을 좀 해보겠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 말을 뒤에 덧붙였다. 근데 뭐 누가 일을 줘야지. 내가 돈 받을 정도로 할 줄 아는 건 아니라서. 잘 모르겠네. 뭘 해야 할지. 사실 나는 내 글 좋아한다. 내 시도 좋아한다. 엄마한테 맨날 ‘아들 시 잘 써’라고 말한다. 근데 여기에 돈만 개입되면 ‘그걸 누가 사?’ 같은 생각이 든다. 나는 스스로의 시장성을 되게 낮게 보고 있다. 돈을 번다는 걸 아주 커다랗고 무거운 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새로 이력서를 쓸 때도 ‘내가 이런 것도 할 줄 안다고 해야 되나? 관련이 있긴 한데 해본 적은 없는데’ 이런 생각이 들어 지원을 망설인 곳도 있다. 할 수는 있다. 분명히 할 수는 있는데 돈 받고 할 정도는 아닌 것 같다.


엄마는 이런 내 얘기를 듣고는 ‘돈 받고 할 정도가 아니라 돈을 받으면 그게 돈 받고 할 정도인 거다’라는 식으로 말했다. 맞는 말이다. 돈 받고 할 정도가 되려면 그냥 돈을 받으면 그만이다. 돈 받을 만큼이 아니면 그 사람들이 날 안 찾겠지. 근데 진짜 안 찾으면 어떡하지? 내가 공짜면 먹겠는데 돈 주고는 안 사 먹을 메뉴면 어쩌지? 자기 객관화가 이렇게도 어려운지 몰랐다. 나는 내가 자기 객관화를 잘한다 생각하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그런 얘기를 종종 들어왔는데 먹고사는 문제가 개입되니 사람이 팍 쪼그라드는 기분이 든다. 대체 뭘로 돈 벌고 살 수 있을까? 다들 어영부영 어떻게든 산다는데 그 어영부영을 뭘로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나 뭐 잘하지? 도저히 떠오르는 게 없어서 그냥 하고 싶은 걸 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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