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누누 Nov 04. 2021

퇴사하고 뭐하지?

불안한 마음에 이력서를 마구 넣었다

퇴사하고 뭐하지?


불안한 마음에 이력서를 마구 넣었다


최근에 새로 알게 된 내 버릇이 하나 있다. 바로 앞날이 불안할 때면 구인구직 사이트에 들어가 이력서를 마구잡이로 넣는 버릇이다. 가령 예를 들면 대학을 졸업할 때, 통장 잔고가 완전 바닥났을 때, 퇴사를 결심했을 때, 퇴사를 앞두고, 등등 이제 앞으로 뭐 먹고살지? 하는 생각이 들 때면 어김없이 구직 사이트에 들어가 이력서를 넣었다. 그럼 그중에서 몇 군데 정도 면접을 보자는 연락이 오고 면접을 봐서 합격하면 그 회사에 다니는 식이다.


하지만 그렇게 마구잡이로 넣은 회사가 나와 잘 맞을 리 없었다. 내가 회사랑 안 맞거나, 회사가 나랑 안 맞거나, 회사에 문제가 있거나 셋 중 하나였다. 그럼 또 퇴사를 하고 다시 불안해져서 이력서를 넣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여지없이 구인구직 사이트에 들어가 이력서를 마구 넣었다. 심지어 회사에서 일하던 중에도 그랬다. 수시로 구인구직 사이트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결코 아무 데나 가지 않으리라 다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도 모르게 구인구직 사이트의 추천채용 페이지를 읽고 있었다. 어차피 맨 위에서부터 차례대로 전부 이력서 넣을 거면서. 


아니 그래도 내가 뭐라도 하겠지 설마 손가락만 빨고 살겠어? 내가 나 한 몸 건사 못하겠어?


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어느새 내 손은 구인구직 사이트에 가있다. 혹시 모르니까. 진짜 내 앞날이 캄캄하고 나는 이 퇴사로 인해서 망해버릴 수도 있으니까. 뭐라도 해야겠다 싶은 마음이 나를 적신다. 그렇게 마구잡이로 이력서를 넣고 나면 불안이 좀 가시는 것 같다. 진짜 가시는 지는 모르겠다. 그냥 그런 기분이 든다. 선택권을 상대에게 양보했을 때 생기는 안도감과 흡사하다. 내 손을 떠난 문제다. 나와 잘 맞는 좋은 조건의 회사가 내 이력서를 보고 마음에 들어 해서 내게 연락을 주고 면접을 통해 입사를 한다는 내가 결정할 수 없는 과정들. 나는 이력서와 함께 이 앞날의 불안을 다른 이의 손에 맡기는 것이다. 


물론 연락은 오지 않는다. 열 군데 중 하나라도 오면 많이 오는 거다. 보통은 하나도 안 온다. 온다고 해도 블로그 바이럴 마케팅 업체 같은 곳에서 온다. 블로그 바이럴 마케팅 업체가 안 좋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별로 하고 싶은 일도 아니다. 


구인구직 사이트에 들어가 입사지원 현황을 보니 스무 개가 넘는 회사에 지원을 했다. 어느새 메일함도 ‘00 회사에 지원을 완료했습니다. 비슷한 회사에도 지원해 보세요.’라는 내용의 메일과 ‘00 회사가 김보섭 님의 이력서를 열람했습니다.’ 같은 내용의 메일로 가득 차있었다. 나중에는 추천 채용에 뜨는 회사들이 이미 모두 지원했거나 나중에 지원하려고 스크랩해놓은 회사일 정도였다.


마구잡이로 넣은 이력서이지만 너무 감사하게도 면접 제의를 주는 회사들이 더러 있다. ‘잡코리아 지원서 보고 연락드립니다’ 같은 내용으로 문자가 오는데 사실 어떤 회사인지 모른다. 너무 많은 회사에 지원을 했으니까. 그래도 최대한 당신네 회사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대답하며 어떤 회사인지 유추한다. 회사는 모르고 나만 알고 있는 심리 서스펜스 시간이다. 면접 일자와 시간을 정하고 장소를 알아낸다. 면접을 거절하는 일은 거의 없다. 왜냐면 마구잡이로 이력서를 넣는 순간부터 이미 난 나에 대한 객관성을 잃어버린 상태이기 때문이다.


여기 안 가면 또 누가 연락을 주나? 아무도 안 주면 어떡하지? 그래도 엄청 좋진 않지만 이 정도면 그냥저냥 다녀볼 만하지 않을까? 물론 별로지. 굳이 따지자면 별로인데 내가 지금 찬 밥 더운밥 가릴 처지야? 지금 여기 말고 연락 주는 곳도 없잖아. 일단 면접이라도 가보자. 


면접까지 가면 객관성은 더욱 무너져 내린다. 괜히 결정을 미루다가 그쪽에서 안 불러주면 낭패니까. 이력서를 넣으면서 나는 끊임없이 뒷걸음질 친다. 뒤로 걸으면서 이력서를 뿌리는 기분이다. 절벽에 다다를 때까지. 그래서 누군가 손을 뻗었을 때 그게 누구든 잡아야 하는 상황까지 나를 내몬다. 불안해서. 불안해서 그렇다. 절벽에 간 적도 없는데 절벽에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내가 뭐 얼마나 좋은 스펙이라고 회사를 가리겠어 같은 생각이었다. 나는 이력서를 마구 넣는 방식으로 나 스스로를 축소시키고 있었다. 정말 대단치 않은 사람이 될 때까지. 사람이 뭐 어떻게든 살겠지 하는 쪽으로 생각을 돌리려 했으나 나는 이내 다시 어떻게든 되는 건 하나도 없다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구인구직 사이트에 스크랩해놓은 회사가 백 개를 넘기고 있었다. 


누가 저 좀 써주세요. 아무나 좀 저 좀 써주세요. 전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사실 이 이력서도 그냥 돌려 막기 하는 이력서지만 그래도 잘 봐주세요. 왜냐면 제가 절벽에 떨어지는 것 같거든요. 실은 떨어지지 않는 걸 알면서도. 떨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퇴사하고 뭐하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