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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박 Mar 17. 2024

일곱째 주의 밤들

2024.02.12-18


아직은 미약한 나의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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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약한 꾸준함은 금세 덧없음이 되어버린다. 분명 꾸준한 결과물들을 모아서 만든 빛나는 성들을 많이 보아왔는데도 나의 성을 쌓아 올리는 것이 헛된 꿈만 같다. 내가 느끼는 덧없음은 꾸준함이 불러오는 결과에 대한 의심에서 오는 것일까, 호시탐탐 나를 노리는 권태에서 오는 것일까. 나는 오늘도 저것들에 지지 않으려 어김없이 책상 앞에 앉았다. 하지만 역시나 미약한 나의 모래성은 덧없는 바람들에 계속해서 깎여나간다. 언제쯤 저 모래성에 비가 내려 단단한 성이 될까. 언제쯤 미약했던 그 꾸준함이 쌓여서 평범한 삶을 내려다볼 수 있는 작은 언덕이 될까.


한발 물러서서 하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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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발 물러서서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상처받기 싫어서 한발 물러서 있고, 죄책감 때문에 서성이고, 옅게 깔린 권태 때문에 눈을 거의 다 감아버렸다.


물러나 있다는 것은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고, 서성인다는 것은 나쁜 사람이 되기는 싫다는 것이고, 눈을 반쯤 감았다는 것은 삶 전반에 허무함이라는 감정이 내려앉았다는 것이다. 사랑을 염원하고 쟁취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사랑을 관조하고 언제든 놓을 수 있도록 약하게 움켜쥐고 있는 이 악력은 과연 거짓일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한발 물러서서 하는 사랑은 뜨거운 수증기 같다. 그 옅은 숨막힘.


동화, 어린아이가 서툴게 그려낸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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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책을 선물 받았다. 회색 도시에 사는 풀킴씨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우리네 도시에 숲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들려주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곳에는 초록색의 풀킴씨가 있고 도토리 비가 내리고 다람쥐가 주술을 부린다. 우산을 내려놓고 도토리 비를 맞는 풀킴씨의 모습에서 꽤 오래 멈춰 섰다. 어느덧 나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어떤 ‘현상’들은 당연한 것이 되었고 잊혀지기도 했다. 축축한 요즘 날의 비와 가끔 마주치는 초록의 숲은 그 현상들이고 그것들이 어떻게 변할 수 있고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아, 동화는 어린아이가 읽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시선을 동경하는 것이기도 하다. 매번 새로운 시선으로 서툴게 그려내는 그들의 그림을 동경하는 것이기도 하다.


옷장의 퇴적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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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관계는 서랍 속에 쌓인 옷들 같다. 아래에서부터 차곡차곡 퇴적된다. 잘 입지 않는 옷은 저 밑에 눌려있고 자주 입는 옷은 옷장의 가장 위에서 손 때를 타는 것처럼, 손에 쉽사리 잡히지 않는 관계는 가려진 채로 잊혀지고 자주 만지작거리는 관계는 계속해서 꺼내어 만나게 된다. 언젠가 오랜만에 잔뜩 눌려있는 저 옷이 입고 싶더라. 옷장을 전부 헤집어 놓고 꺼낸 그 옷은 낯설었고, 원래의 형태와 색을 잃었다. 가장 아래에서 빛바랜 관계가 그렇다. 점점 낯설어지고 함께 마찰하며 생겨난 추억들은 멀어져 간다. 잔뜩 눌려버린 저 옷을 ‘그래야만 하는 이유와 방법’이 떠오르지 않은 채로 다시 더듬게 될 수 있을까.  


밤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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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소란스러운 마음을 잠재우는 데에는 밤산책, 겨울에 떠나는 밤산책만큼 좋은 것은 없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었다.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각각의 마음들은 모든 소음을 차단하는 이상한 상자에 담긴 채로 나의 발걸음에 맞춰 조금씩 흔들릴 뿐이었다. 조금은 차가운 바람이 살갗에 스치고 나의 발걸음은 점점 더 느려진다. 나를 혼란스럽게 할 수 있는 저 마음들이 언제든지 쏟아져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까, 나의 발걸음은 점점 더 느려지고 시선은 시커먼 저 풍경들과 끊임없이 이어지는 바닥에 맺혀있다. 나는 그런 느린 밤산책이 좋다. 생각이나 고민, 걱정과 후회가 부재하는 그런 밤산책이 좋다.


웃는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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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적인 페르소나가 아닌, 지극히 의도적인 페르소나를, 그것도 아주 두꺼운 가면을 써본 적이 있는가. 안에서부터 깨져버린 마음을 숨기기 위해서 그 곁을 이상한 모양의 테이프로 칭칭 감싸놓은 것도 모자라 맞지 않는 투박한 가면을 쓰고 서툴게 내뱉는 진심이 아닌 말들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페르소나는 나를 보호하려 한다. 더 이상 마음이 조각나면 그것들이 튀어 올라 상처 낼 것을 알기 때문에 이상한 미소를 띠고 있는 가면을 건넨다. 뭐든지 체에 거르면 맑고 고운 것만이 남고 걸러지지 못한 것들은 버려진다. 페르소나 뒤에 숨은 것들이 그 찌꺼기들이다. 맑고 고운 것은 내가 보여주고 싶은 의도적인 가짜 마음들이고 체 위에 덩그러니 남은 찌꺼기들은 내가 보여주고 싶지 않은 진짜 마음들이다. 버려지지 못한 채 남아버린 마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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