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하루 Feb 04. 2023

크리스마스를 부탁해 2


나에게 크리스마스는 여보슈 할머니의 기일, 그리고 사촌동생의 생일이다. 진주 사투리를 쓰시던 증조할머니는 전화를 받으실 때면 늘 “여보슈~” 라 답하셨고, 나는 그를 여보슈 할머니라 불렀다. 전화 넘어 할머니의 목소리는 언제나 예외 없이 같은 분위기를 담고 있었다. 늘 같은 방식과 목소리로 전화를 받아주시는 여보슈 할머니의 일정함은 참 평화로웠고 소중했다. 거동이 불편하셨던 여보슈 할머니는 대부분의 시간을 이불 위에서 누워 보내셨는데, 나와 언니가 오는 매주 토요일에는 자리에 앉아서 우리를 맞이해 주셨다. 여보슈 할머니께서 자리를 고쳐 앉으실 때 들리던 이불의 바스락 소리, 작은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 그의 얇은 머리카락과 부드러운 손 등 모든 장면이 좋았다. 여보슈 할머니의 억양과 사투리를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우리를 향한 사랑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 날, 여보슈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과 함께 사촌 동생이 태어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부모님은 장례식 준비에 정신없이 집을 나서셨고, 외할머니 댁에 맡겨진 나와 언니는 새로운 여동생이 생겼다는 사실에 설렐 뿐이었다.


여보슈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일주일 정도 매일 같은 꿈을 꿨다. 평소처럼 언니와 놀고 있었는데, 현관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여보슈 할머니와 친구분들이 들어오셨다. 우리가 착하고 순하다며 예뻐해 주셨고, 덕담도 해주셨다. 조금의 시간이 지난 , 여보슈 할머니께서  손을 잡으시더니 어딘가 같이 가자고 하셨다. 여보슈 할머니가 좋았던 나는 의심 없이 그의 손을 잡고 따라나서는데, 옆에 있던 언니가 크게 울며 나의 다른 손을 붙잡았다. 나를 데려가지 말아 달라는 언니의 울음 섞인 부탁에 여보슈 할머니와 친구분들은 그대로 떠나셨다. 알고 보니 언니 또한 같은 꿈을 꿨다고 한다. 그때부터였는지,   죽음이 궁금했고 두려웠다. 주변 사람들이 어느 순간 떠날 것이라는 이유 없는 두려움에 밤잠을 설치는 날도 자주 있었다. 교과서나 드라마에서 누군가 죽는 장면이 나오면, 근본 없는 무서움에 휩싸여 할머니, 할아버지를 찾아갔다. ‘할아버지 시계라는 동요를 들으면서 울었고, '운수 좋은 ' 배우면서도 울었다. 삶과 죽음을 마주하는 직업을 가진 어른이  지금도, 깊이를 모르는 불안의 바다에 스스로를 표류시킬 때가 종종 있다.


이러한 이유로 연말 공휴일이 달가웠던 적이 없었다. 타지 생활을 하면서 특히 크리스마스는 더욱이 피하고 싶은 날이었다. 세상 모두가 특별한 날이라며 한 달 전부터 준비하기 바쁜데, 내게는 방 안에서 영화 몇 편 보고 잠드는 것이 다인 날이었다. 만날 가족도 친구도 없고, 모든 가게는 문을 닫고, 딱히 할 일도 없으니 그저 눈 딱 감고 다시 뜨면 26일이 되어있기를 바랐다. 특별한 날을 특별하게 보내지 못하는 나 자신을 견디기 어려웠다.


다행이게도 이번 크리스마스는 좀 달랐다. 이틀간의 크리스마스 근무를 마치고, 친한 동료 약사들과 함께 연말을 보낼 수 있었다. 칠면조 오븐구이, 베이컨 소시지 말이, 소고기 스튜, 티라미수 등등 각자 준비해 온 음식들로 매우 배부르고 행복한 저녁을 먹었다. 요리를 잘 못하는 나는 깍두기로 술과 음료를 사갔다. 한참 웃고 떠들던 와중에도 병원에서 응급 전화가 오면 모두 약속이나 한 듯 침묵했다. 누구는 노트북을 꺼내고, 누구는 패드를 꺼내며 최선의 방법을 찾아내는 모습을 보며 좋은 동료들과 함께 일 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나의 노력이 누군가의 삶을 바꿀 수만 있다면, 기꺼이 더 공부하고 더 행동할 것이라 다시 한번 다짐했던 밤이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크리스마스를 부탁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