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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하루 Aug 16. 2023

번아웃이 왔다

뇌신경 재활센터, 노년 내과



몸이 고장 났다 깨닫게 된 건 올해 3월에 걸린 폐렴부터였다. 아마 병동에서 옮았을 폐렴은 일주일이 꼬박 넘게 고열과 기침에 시달리게 했다. 바이러스성이었는지 항생제가 듣지 않았다. 아마 한국이었으면 입원을 했을 텐데, 부족한 병상과 엄격한 의료체계를 가진 영국만큼 진료 또한 잘 봐주지 않았다. 응급실에 가기에는 괜한 죄책감이 들어 집에서 끝까지 버텼다. 그때 이후로 부터 5개월이 넘게 만성적으로 기침을 하고 있다. 롱코비드가 아닌가 의심도 했으나 당시 PCR 검사가 음성이었다. 3개월이 넘어가는 즈음에 드디어 GP (영국의 1차병원) 에서 흉부 엑스레이와 피검사를 시켜줬다. 결과는 모두 정상이었다. 증상은 유의미한데 검사 결과는 모두 정상이니, 병원에서는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답을 들었다. 그렇게 또 2개월이 지났다. 최근 약학과에 사람이 너무 부족한 상황인지라 거의 매주 주말에 근무를 했고, 충분히 쉬지 못한 채 또 근무를 나가다 보니 몸상태는 점점 떨어졌다. 그나마 겨우 쉬는 일요일에는 몸이 아팠고, 조금 회복했다 싶으면 월요일이 왔다. 사람이 부족한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상황에서 몸이 버티지 못하는 날이 종종 생겼고, 결국 조퇴를 했어야 했다. 다들 응급실에 가라 했으나 반복적으로 진행되는 의사들의 파업에서 당장 위독하지 않은 내가 응급실에 가기에는 눈치가 보였다. 병원을 위해 일하면서, 병원에 가는 걸 눈치를 보는 스스로가 참 씁쓸했다.


생전 겪어보지 못한 구토와 멀미 증상, 주기적으로 오는 발열 증상에 약사인 나도 내 스스로가 어떤 상태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저 처방받은 항구토제와 해열제를 먹으며 일할 뿐이었다. 그러다 문득 떠올랐다.


아, 이게 말로만 듣던 번아웃이구나.






노년 내과를 1년 가까이 담당하면서 매일 보는 건 누군가의 마지막이다. 건강을 되찾아 퇴원하는 외과 병동과는 다르게 노년 내과는 대부분 삶의 마지막 단계를 지나가며 삶을 정리하는 - 혹은 해야만 하는 - 환자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평생을 버텨온 신체가 방전 되어가는 상황에서는 아무리 작은 질환이라도 위협적이다. 환자들의 차트를 보면 대부분 입원을 하게 된 계기가 비교적 가벼우나, 누군가에게는 감기처럼 쉽게 지나가는 것들이 노년 환자들에겐 폐렴이 되고, 요로 감염이 되고, 패혈증이 된다. 과부하 된 신체는 어떤 약물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고, 그렇게 마지막 단계인 palliative care (완화 치료)로 넘어간다. 약사로서 그런 상황들을 지켜봐야만 하는 것이 많이 지친 듯 하다. 인력 또한 부족하니 다양한 병동을 경험하지 못하고, 노년의학과 이외의 경험과 지식을 배울 수가 없는 현실이 답답하기도 하다. 병동 간호사들과도 반복되는 의사소통의 오류로 크고 작은 다툼이 잦아졌다. 가슴에 늘 품고 다니는 사직서를 내던지고 다른 병원의 일을 찾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비자가 전부인 외노자의 입장에서는 불평은 사치였다.


엎친 대 덮친 격, 한국에 있는 할머니께서 반복된 입원을 하셨다. 유방 절제 수술을 받으신 후, Provoked Deep Vein Thrombosis (심부 정맥 혈전증: 수술 부위에서 생긴 혈전이 허벅지나 골반에 있는 심부 정맥으로 이동해 혈관을 막은 질환)을 진단받으셨다. 국가마다 처방 가이드라인이 다르겠지만, 할머니께서 처음 유방암을 진단받으시고 절제 수술을 받으셨을 때 영국과는 다르게 Enoxaparin 같은 예방적 항응고제가 처방되지 않았다. 수술 후 당연히 움직임이 적어진 할머니는 대부분 침대에서 생활을 하셨고, 혈전 위험성이 매우 높았다. 결국 할머니는 심부 정맥 혈전이 생겼고, 혈전 용해 치료를 위해 재입원을 하셨어야 했다. 입원 과정에서 할머니는 원인을 알 수 없는 통증을 호소하셨고, 섬망과 혼란 증세를 보이셨다. 할머니는 입원 중 알츠하이머 초기 진단을 받으셨고, 치매약을 처방받으셨다.


혈전 용해 치료 후 경구약 (apixaban)으로 넘어갔는데, 할머니께 쓰인 용량이 나의 지식과는 매우 달랐다. Apixaban 은 반감기가 12시간이기에 하루에 두 번 복용하는 게 가이드라인인데, 할머니는 하루에 한 번으로 처방이 됐다. 진통제로 처방된 약 (Tramadol/ibuprofen) 또한 영국에서는 잘 쓰이지 않는 것으로, 특히 이부프로펜 같은 경우 항혈전제와 상호작용 - 내부 출혈의 위험을 높임 - 때문에 낙상의 위험을 가진 노인 환자에게는 금기인 약이었다. 결국 할머니는 입원 기간 동안 혈변을 보셨고, 항응고제 투약을 잠시 멈췄었다. 그 외의 할머니께 처방된 약들이 영국 약사의 입장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았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도 없었다. 그저 엄마에게 이런 부분이 걱정되니, 담당 의사와 꼭 상담해 달라 부탁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이 또한 한국 의료진들에 대한 월권일 수 도 있으니 조심스러웠다. 할머니께서 내 병동에 입원하셨더라면, 이런 저런 부분을 바꿔달라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드니 심적으로 괴로웠다. 타지에서 매일매일 돌보는 환자가 할머니와 같은 분들임에도 불구하고 막상 내 가족을 위해선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할머니는 현재 집에서 조금씩 기력을 되찾으시는 중이라 전해 들었다. 참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마음에 돌덩이가 들어앉은 느낌이다. 일은 점점 버거워지고, 할머니의 곁에 있어드릴 수 없는 현실이 서럽고, 그럼에도 하루하루 살아내려면 이곳에서 버텨야 하는 상황이 나를 번아웃 되게 만든 듯하다. 나의 개인적인 상황이 환자에게 피해가 되지 않도록 늘 명심하고 있다. 그래서 3일 휴가를 신청했고, 서류상 이유 또한 "번아웃"이라 작성했다. 3일 동안 아마 대부분 밀린 학업과 일을 하겠지만, 하루 정도는 늦잠도 자고 밀린 드라마도 볼 예정이다.


이 또한 지나가겠지, 오늘도 버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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