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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하루 Nov 18. 2023

대단한 사람이 되어있을 줄 알았다

노년내과


육 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진단이 되지 않은 증상들로 여러 번 병가를 내면서, 감염내과의 진료를 보게 되었다. 같은 병원, 같은 빌딩에서 일하는 의료진임에도 불구하고 전문의에게 진료를 받기까지 매우 오랜 대기가 있었다. 친분이 있는 감염내과 약사분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족히 6개월은 더 기다렸어야 할 것이다. 심지어 3월 달부터 대기 리스트에 있는 소화기내과에서는 연락조차 오지 않은 상황이다. 결론은 아직도 불명열과 기침, 부은 림프절로 고생 중이다. 이제는 고열에 익숙해져서 열이 올라도 느껴지는 증상 (예: 두통, 어지럼증)이 사라진 바람에 주기적으로 열을 재지 않으면 열이 나는지 나지 않는지 조차 모르는 상황까지 왔다. 진단명이 없으니 치료라고 할 것도 없다. 정기적으로 열을 재는 것, 열이 나면 해열제를 먹는 것, 구토감이 있으면 항구토제를 먹는 것. 그렇게 버티고 있다. 평소처럼 Pharmacist handover (다음 약사를 위한 환자 인계 노트)를 적는 중이었다. PC (Presenting Compliant; 진단명)으로 시작하는 핸드오버가 새삼 서러웠다. 나의 환자들은 진단명이 있고, 진단명이 있기에 치료가 가능한데, 정작 나는 왜 없을까. 나는 언제쯤 괜찮아지는 걸까? 언제까지 기다리기만 해야 하는 걸까?


이 나라에서 나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쯤 되면 무척이나 대단한 사람이 되어있을 줄 알았다. 초등학교 시절, 이승복 박사님의 자서전 <기적은 당신 안에 있습니다>에 감동을 받았던 나는 이 박사님처럼 존스홉킨스 의과 대학에 진학할 미래를 꿈꿨다. 이후 밴드 <두 번째 달>과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에 푹 빠지게 되어,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윤정 언니와 은주 언니 같은 뮤지션이 되고 싶었다. 바이올리니스트라는 꿈은 꽤 오래 이어졌으나 집안의 반대로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어떤 사람이 되던, 어떤 방식으로 던, 꼭 세상을 구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의사로던, 바이올리니스트로던, 누군가의 세상을 조금이나마 낫게 해주는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 마치 이 박사님, 윤정 언니, 은주 언니가 한 초등학생의 세상을 꿈으로 가득 차게 만들어 준 것처럼 말이다.


어렸을 적부터 스스로보다는 남들의 감정과 상황에 더 관심이 많았다. 달이 지구를 중심으로 도는 듯, 나는 타인을 중심으로 돌았다. 마이쮸가 있으면 친구들에게 나눠주느라 바빴고, 혹여 못 받은 친구가 속상해할까 싶어 마지막 남은 하나를 친구에게 준 후 엉엉 울었다. 야채를 싫어했지만 어른들께 짐이 될까 억지로 먹었다. 좋은 성적과 많은 상장들을 받으려 노력했던 이유도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자랑스러운 손녀가 되고 싶어서였다. 약대에 지원을 하게 된 것도 어렸을 적 아팠던 언니에게 도움이 되는 동생이 되고 싶어 선택한 일이었다. 속히 말하는 명문대에 졸업하기 위해 아득바득 공부했던 이유도 나의 대외적 성공을 바라는 아빠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약사가 되고 대학 병원에 취직을 한 후, 기피과로 여겨지는 노년내과에 2년 가까이 배치가 되었음에도 투정 없이 다녔다. 기피과라면 다른 사람들도 기피할 테이니, 차라리 내가 할머니, 할아버지를 더 이해하라는 신의 뜻이라 여기며 다니면 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도 운이 참 좋은 편이라 믿었다. 스스로가 진심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 본 경험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나름 안정적이고 존경받는 직업을 가지게 되었다. 매일 아침 커피를 사 마실 수 있을 정도의 경제적 여유도 얻었다. 혼자의 노력만으로는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거라는 것을 잘 알기에 늘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힘이 드는 건 힘이 드는 것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공부에 재능이 전혀 없었다. 남들은 한 시간에 배울 것을 최소 세네 시간은 할애해야 겨우 따라잡을 수 있었다. 공부 머리가 없던 내가 성적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은 스스로의 약점을 강조하고 새뇌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것도 못 외울 거면 죽어야지, ' '이 정도 점수도 못 받을 거면 존재할 이유가 없는 거야' 등의 부정적인 생각들로 스스로를 깎아내렸다. 그렇게 자존감이 바닥을 쳤던 고등학교 시절에는 현재 졸업한 대학교에 들어가지 못했을 경우를 대비해 죽을 계획을 짜기도 했다. 일단 한국에 돌아가서, 부모님 몰래 집을 떠나, 땅끝 마을 통영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새벽 바다에 잠길 생각이었다. 기차 시간표까지 찾아가며 엑셀로 정리한 '자살 계획표'는 꽤 오랜 시간 나의 공부 동력이 되었다. 죽고 싶으면서도, 죽고 싶지 않아 발버둥을 쳤다. 명문 대학에만 들어가면 해결될 줄 알았던 문제들은 대학에 재학하면서도 끝나지 않았다. 마음을 나눴던 친구들이 매 년 학기 말 시험에 통과하지 못해 퇴학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늘 절벽 끝에 서있는 기분이었다. 다음에 떨어지는 사람은 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두 발에, 온몸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결국 3학년 학기 말, 시험을 보던 도중 공황 발작이 와 중도 포기를 하게 되었고 1년 동안 강제 휴학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겨우 겨우 졸업을 했다. 졸업을 하니 취업이 문제였다. 영국 약대는 졸업 후 1년 동안 Pre-Registration (이하 프리레지)라 해서 인턴 약사로서 트레이닝을 받은 후 자격증 취득시험을 볼 수 있다. 프리레지를 어디서 하냐에 따라 이후 약사로서의 커리어가 달라지는데, 프리레지 시험에서 성적을 낮게 받는 바람에 원하던 병원 자리를 얻지 못했다. 결국 뜻하지 않던 약국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약국 프리레지는 병원 프리레지와 다르게 의학적인 부분을 배운다기보다는 약국 운영을 위한 능력 - 처방전 조제, 재고 관리, 통제약물 (controlled drug) 및 마약류 관리, 백신 클리닉 운영, 금연 클리닉 운영 등 - 을 중점으로 경험한다. 의료적 실력을 확인하는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기에 최선의 공간이라고 보기는 어려웠지만, 돌아보면 또 다른 분야를 경험하고 배웠다고 생각한다. 병원 약사들은 대부분 병원에서 커리어를 시작하기에 약국 경험이 없는데, (현재 같이 일하는 약사들 중에 약국에서 프리레지를 한 사람은 나 포함 단 두 명뿐이다) 약국에서 프리레지를 하며 배웠던 리더십과 환자들과의 소통 능력 등이 현재의 또 다른 나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아직까지도 병원에서 프리레지를 한 친구들과 배움의 차이가 있어 열심히 따라가려 노력 중이긴 하다.


결론적으로 어렸을 적 상상했던 대단한 사람이 되지는 못 한 것 같다. 그러나 적어도 환자들을 위해 매일 공부하는 사람은 되었다. 나의 무지가, 부족한 경험이, 실수가, 환자들에게 악역향이 갈까 두려운 마음이 동기일지라도 말이다. 앞으로는 환자에게 악영향을 끼칠 까 두려운 마음보다는 나의 능력으로 환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약사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 날이 언젠가는 오지 않을까.






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를 봤다. 정신병동 간호사가 정신병동 환자가 되어 치료를 받는 장면이 참 인상적이었다. 마치 현재의 나와 비슷하다 생각했다. 증상들의 원인을 찾지 못하는 의료진이 원망스러우면서도, 그들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입장으로서 불평이 죄책감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환자가 되어본 지금의 경험이 미래의 환자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믿으며 위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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