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여니 새소리가밀려든다. 때맞춰 휴대폰이 울렸다. '일어났어? 조식 먹고 동네 산책 할까?' 남편의 톡을 확인하고 창 밖으로 손을 내밀어 보니쪼로롱 대는 새소리가 손끝에 떨어지는 듯하다. 옅은 새벽빛에 고요한 스위스 마을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스위스는 정말 가봐야 할 거 같아. 결혼 20주년에 아이들이랑 같이 가자."
몇 해 전 해외 출장을 다녀온 남편이 스위스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유럽 여행을 약속했다. 생각만으로도 좋은지 들뜬 목소리로 말하는 남편을 보며 그거 좋겠다 맞장구를 쳤던 기억이 있다.
드디어 올해결혼 20주년. 남편과강산이 두 번 변할 세월을 살았다는 것에 감탄할 새도 없이 연초부터 바쁘고 신경 쓸 일이 많았다. 특히 돈 들어갈 일이 줄을 서 있었다. 어머님 수술과 장기 입원, 아들 대학 입학금, 대출금 이자는 몇 배로 올라 힘든 상황이었다. 거기다 시댁에 어려운 일들은 왜 그리 겹치는지 작년에 미리 예약해 둔 유럽 패키지여행을 취소해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그러나 남편은 생각이 달랐다. 당연히 가야지 무슨 소리냐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연히! 지금 상황이 당연히 갈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 항상 계획적인 소비를 하는 남편이 때로 야성적 충동을 보일 때면 사람 속은 알 수 없다 싶으면서도 좋았다. 부랴부랴 나나(반려묘) 맡길 곳을 찾고 아이들에게 여행 날짜를 알려주니(여행을 갈 수 있다고만 말해 둔 상태였다) 반응이 제각각이었다. 대학생이 된 아들은 환영하는 눈치고, 중1 딸은 하필 체육대회 기간이라고 짜증을 냈다. 그런딸에게 같이 좀 가자고 부탁하고 시댁 식구들 모르게 다녀와야 하는 유럽 여행은 준비부터 힘들었고 그 힘듦은 스위스에 도착해서도 이어졌다.
취리히 공항에 내려 기다리고 있던 버스를 타고 루체른과 베른을 갔는데 장거리 비행에 지치고 긴장한 탓인지 백조가 떠다니는 호수와 중세의 도시 풍광을 고스란히 간직한 이국적인 길을 걸으면서도 그 아름다움이 마음에 머물 새가 없었다. 배탈이 자주 나는 아들은 관광지마다 화장실을 찾느라 바쁘고, 체육대회에 참석 못해 한이 맺힌 딸은 계속 뚱한 얼굴로 뒤쳐져 걸었다. 아이들을 챙기며 기대와 달리 처음은 실망스러울 수 있지 체념하며 일정을 마치고 마티니에 있는 작은 호텔에 짐을 풀었다. 해가 지고 들어간 호텔이라 씻고 바로 잠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눈앞에 높은 산이 우뚝 서있고 산등성이엔 목조 주택들이 올망졸망 모여 있는 소박하고 예쁜 산골 마을이었다. 특히 맑은 새소리가 상쾌했다.잠을 푹 잤는지 아이들과 남편 얼굴도 한결 좋아 보였다. 시작이 괜찮다.
"Buongiorno"
이탈리아 기사님의 인사를 받으며 버스에 올랐다. 이제 두어 시간을 달려 파라마운틴사의 로고로 유명한, 아이들에겐 토블론 초콜릿의 표지에 있는 산봉우리 마터호른을 보러 갈 예정이다. 산악열차를 타고 오월의 설산을 밟을 생각을 하니 설렌다. 또 차창 밖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이 흥을 더했다. 파랗다 못해 눈부신 하늘, 잘 부푼 생크림 같은 뭉게구름, 푸른 목초지, 이끼 낀 사과나무, 민들레 홀씨가 가득 핀 들판, 잔잔한 호수 등의 풍경이 휙휙 지나가더니 어느새 버스는 산길로 접어들었다. 보이는 풍광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양 옆으로 하늘을 찌를 듯 거대한 돌산이 솟아있고 그 사이로 눈이 녹아 만들어 낸 여러 개의 폭포가 하얀 물줄기를 뿜으며 쏟아져 내렸다. 그 아래로는 비취색 개울을 품은 소담한 산골 마을이 이어졌다. 버스는 계속해서 오르막을 달리고, 내려다보이는 교량들은 아찔했다. 그렇게 높은 고개를 오르고 올라 우리는 체르마트에 도착했다. 하이킹과 사계절 스키장으로 유명한 산악 리조트 마을이라 관광객들로 붐빌 줄 알았는데 의외로한산하고 산골마을 특유의 고즈넉함이 느껴졌다. 짙은 갈색의 목조 건물들 사이 무심한 듯 서 있는 마터호른이 보였다. 우리는 한가닥 구름 스카프를 두르고 우뚝 서 있는 그 봉우리를 가리키며 연예인이라도 발견한 듯 환호했다. 세계의 많은 산악인들이 정복하려 노력했던 마터호른을 열차를 타고 올라가 볼 수 있다니! 경이로운 자연 가까이 인간을 데려다 놓는 스위스의 기술력도, 이곳으로 우리를 데리고 온 남편도 새삼 고마웠다.
오른쪽에는 마터호른을왼쪽으로는 알프스 산맥의 역동적인 풍광을 펼쳐 보이며산악 열차는 눈 골짜기를 달렸다. 어느덧우리의 주인공마터호른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워지자 사진을 찍는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열기로 실내가 후끈 달아올랐다. 아들은 여자친구가 준 곰돌이 인형으로 인증샷을 찍느라 분주하고 딸은 딸대로 친구에게 보여줄 사진을 찍느라 바빴다. 또 그 모습을 열심히 카메라에 담고 있는 남편을 내가 찍고, 그러다 남편과 눈이 마주친 나는 풋 웃음이 났다. 왜 이리 사진에 집착하는지! 식구들 모두 사진으로 기록을 남길 테니 나는 글로 남기기 위해 휴대폰을 내려놓고시리도록 푸른 하늘에 새하얀 알프스 산맥들이 그린 듯 이어지며 넘실대는 모습을 마음에담았다. 삼십 분 가까이 산을 오르던 열차는 고르너그라트 역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전망대를 향해 걸어가는 길은 따뜻한 햇살이 함께했다. 가까이 다가선 마터호른은 밀로의 비너스나 모나리자처럼 산봉우리 자체의 비율과 분위기가 단연 독보적이라 인기의 이유를 실감했다. 포근한 겨울 공기가 좋아 관광객들이 앉아 있는 벤치에 끼어 앉아고르너 빙하의 깊이를 알 수 없는 신비로운 푸른빛에 감탄하며설산 봉우리를 날렵하게 날아다니는 알프스 까마귀의 비행을 구경했다. 쉽게 경험할 수 없는 대자연의 비경을 접하고 한껏 기분이 좋아진 우리는 내친김에 눈밭으로 내려가 눈싸움을 하고 썰매를 타며 아이처럼 뛰어놀았다. 오기 싫다고 입이 한 발 나왔던 딸도 언제 그랬냐는 듯 깔깔대며 신이 났다. 자연은 무엇을 하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 넉넉한 품을 내어주며 우리 가족을 하나로 뭉쳐주었다. 눈부신 알프스 설원에 오래 간직할 추억을 하나씩 가슴에 품고 우리는 다시 체르마트로 내려왔다.
마음껏 놀아 생기가 오른 아이들이 젤라토를 먹으며 역전거리를걸어 내려오는 모습이 흥겹다. 우리는배가고파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을 찾아 들어가파스타, 퐁듀, 뢰스티(감자전 같은 스위스 대표 음식)를 시켰다. 나는음식을 기다리며 이번 여행이 어떤지 궁금해져 아이들에게 물어보았다.
"나쁘지 않아. 스위스 자연이 진짜 멋있어. 다음에 또 오고 싶어." 아들의 나쁘지 않다는 꽤 괜찮다는 말이다.
"나는 지금도 체육대회에 못 간 게 아쉽지만 여기 오길 잘했다 싶어. 좋아. 특히 눈에서 우리 가족이 너무 재미있게 놀아서 오래 기억날 듯 해."
아이들의 말을 듣고 있으니 무리가 되어도 참 잘 왔구나 보상받는 기분이 들었다
"오늘은 엄마, 아빠 결혼기념일이야. 그것도 20주년. 우리 가족이 탄생한 날이지. 이렇게 좋은 곳에 함께 있으니 더 좋네."
내 말에 아이들이 알고 있다며 작게 박수를 쳐주었다. 딸은 우리가 어떻게 만났는지, 프러포즈는 누가 했는지 그런 걸 물었고 식사를 하며 우리 가족은 과거, 현재, 미래가 뒤섞인 이야기들을 나누며 오랜만에 서로의 감정이 부드럽게 녹아드는 시간을 가졌다. 사실아들은 자취 중이고 딸은 방문을 잠그는 나이가 되어 평소 대화가 아쉬웠는데 우리 각자의속내가 자연스럽게 버무려지며 조금 더 친밀해지는 시간을 보낸 것 같아 체르마트의 식사는 오래 기억에 남을 듯하다. 여행이 주는 맛이 이런 것일 테다. 시간이 우리 삶의 모습을 바꾸어 놓아도 우리를 행복으로 채우던 장소와 그때의 분위기, 서로의 웃음소리를 기억하게 하는 것. 서로의 기억에 기대 영원해지는 것. 아이들이 오늘의 기억을 지도삼아 다시 이곳을 여행할 때 우리 함께 했던 이 시간을 기쁘게 떠올려주기를. 조금은 더 젊었던 엄마, 아빠를 기억해 주기를. 이 모든 시간이 사랑이었음을 가슴 뻐근하게 느껴주기를! 엄마의 바람을 이곳에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