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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스혜영 Jul 12. 2023

와이파이 없는 홀리데이

스코틀랜드 - '리스몰 섬'(Isle of Lismore)

닭 우는 소리에 깼다. 어제처럼 새벽 4시였다, 썰물 때다. 뒷 문만 열면 코 앞에서 일렁이던 바다가 저 멀리 보이는 섬까지 밀려갔다. 그사이 모래 위로 누런 미역들이 반갑게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여기는 스코틀랜드의 서해 바다, 리스몰(Lismore). 줌을 해도 눈 깜박하면 지도에서 지나칠 법한 그런 작은 섬이다. 

오번이라는 항구에서 배를 탔다. 이 배는 6대의 차가 코와 코를 아슬아슬하게 맞대며 주차할 만큼의 크기다. 덜덜 덜덜. 처음 배를 타는 일곱 살 막내는 45분 내내 신이 나서 끊임없이 재잘거리고 둘째는 재잘거리는 막내에게 가끔씩 짧은 대꾸를 하면서도 혹시라도 고래를 만날까 바닷속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십 대인 첫 째는 몇십 분째 선반 위에 서 있다. 같은 하늘과 물 배경에 이리저리 핸드폰을 돌려가며 사진 찍기에 바쁘다. 남편은 리스몰에 산 다는 한 아저씨와 진지하게 인생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내가 제일  신나 보인다. 바다멍! 항상 그렇듯 넓은 바다는 모든 감각을 마비시키는 힘이 있다.     


차바퀴가 육지에 닿자마자 북쪽으로 15분 내달렸다. 이 섬에서 두 번째로 집들이 많다는 동네였다. '많다'라는 단어가 무색하리만큼 딱 7채의 집이 기차처럼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나흘동안 머물 우리의 숙소는 가장 중앙의 넘버 식스. 워낙에 현관문이 낮아서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 했다. 근데 왠지 냄새부터가 다르다. 우리가 탔던 배에 타임머신이라도 달렸을까. 150년 전, 빅토리안 시대로 거슬러 간 냄새였다. 소파를 빼내고 어디서 마네킹만 데려오면 에든버러의 박물관에서 봤던 그 전시실이랑 똑같다. 낡은 화로,  천장 위에 달린 나무식 빨래걸이, 낮게 내려온 나무 천장과 색이 바랜 둔탁한 나무식탁, 무거운 철 다리미와 손때 묻은 빈티지 책장. 윗 층에서 진공청소기를 돌리면 아래 거실에서 먼지가 술술 떨어졌다. 먼지뿐만이 아니라 윗 방에서 노는 아이들의 목소리도 솔솔 새어 나와 마치 옆에 있는 것처럼 선명했다. 계단을 오르고 내릴 때마다 긴 소파나 나무 의자에 앉았다 일어설 때마다 오래된 소리가 났다. 삐걱삐걱.


와이파이가 없다


요즘 시대에 잡초만큼이나 흔한 벽 TV나 와이파이, 수도관도 없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수도관이 없는 게 이 마을의 특징이었다. 모든 마을 사람들이 고인 빗물을 커다란 통에 받아서 쓰고 있었다. 화장실 변기 앞에는 이런 문구가 걸려 있었다. 

'STOP! Does it need flushing?' (잠깐! 물 내릴 필요가 있나요?)

더군다나 밑줄 친 ‘NEED’가 손에 마비를 걸어오니(더러운 얘기지만) 똥 싸지 않는 한  다섯 식구가 힘을 모아 물 내리기를 멈췄다. 


19-20세기의 리스몰 섬마을은 석회암을 채석하기로 유명했었다. 석회암뿐만 아니라 그 돌을 태워서 가루로 만들었고 가루가 된 석회는 석회타르나 토양의 비료로 사용되면서 영국뿐 아니라 이웃나라까지 수출하게 되었다. 한 때는 이곳 인구가 만오천 명이나 되었단다. 그렇게 급성장되었던 석회 산업은 싸게 들어오는 수입 석회암으로 서서히 문을 닫게 되었고 지금은 주로 목축업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현재는 약 170명 정도가 이 마을에 살고 있다. 우체국을 겸한 상점 하나, 교회 하나, 학교 하나, 커피숍 하나, 유적지 전시실이 하나 소방관이 하나 있다. 여기 사는 사람이나 건물들을 다 합쳐도 소나 닭, 말과 양의 수를 이길 수가 없다.   


벽시계가 없다 

해가 뜨면 눈을 뜨고 아이들과 밖에 나가 산책을 했다. 시끄러운 차의 엔진 소리보단 또랑또랑한 양이나 새소리만으로도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면 밥 먹으러 집으로 간다. 긴 바게트에 후무스(houmous)를 듬뿍 발라 크게 한 입을 물었는데 창문 너머로 풀을 뜯고 있던 누런 소와 눈이 마주쳤다. 우리 식탁에 소가 함께 초대된 느낌이랄까. 아니면 소의 집에 우리가 초대받았다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인간과 자연이 함께 공유하는 게 이런 건가 싶을 경이로운 찰나였다. 촉촉하고 싱싱한 풀을 질근질근 뜯고 있던 소는 푸석푸석하게 마른 빵이나 먹고 있던 우리가 한심했던지 꼬리를 몇 번 내두르더니 이내 자리를 떠나 버렸다. 그래도 잠시나마 신비로왔던 그 시간이 마냥 좋았다.


배가 부르자 예쁜 조개나 돌을 주우러 바닷가로 나갔다. 어쩌다 조개가 아닌 별난 장난감이 육지 위로 나타나기라도 하면 아이들은 막대기를 하나씩 들고 과학 해부 시간을 가진다. 나와 남편은 여유롭게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별난 장난감이란 갑작스러운 썰물 때문에 미처 떠내려가지 못하고 바위 위에 달라붙어 있는 보라색 해파리(시체)를 말한다. 때로는 강가에 떠 있는 연꽃이나 사람의 발이 닿지 않은 야생꽃을 구경하러 가기도 했다. 또다시 배가 저녁 먹을 시간이라고 알려주면 자박자박 집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토마토 크림수프에 동그란 빵을 찍어 먹었다. 


주룩주룩 비가 내린다. 나무 식탁에 둘러앉아 아까 주어온 돌멩이에 그림을 그리고 색을 입혔다. 윷놀이랑 체스를 하다가 팝콘을 먹으며 집에서 가져온 'Planet Earth 2'라는 다큐를 보았다. 포식자가 없어서 고립된 환경을 선택한 알바트로스(새)는 외딴섬에서 산다. 이 다큐에 나왔던 알바트로스가 이 섬 어딘가에 둥지를 틀고 있을 것만 같았다. 문득 리스몰 자체가 다큐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르륵 눈이 감긴다. 핸드폰을 보니 밤 열 시가 넘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 오늘 하루 동안 핸드폰을 들여다본 적이 없다는 걸.(사진 찍을 때만 빼고.) 벽시계가 없으니 시간을 알지 못했고 딱히 시간을 알 필요도 없었다. 천장 위로 달린 얇은 창문으로 비가 두두둑 떨어졌다. 빅토리안 시대의 집은 빗소리도 리얼이다. 비가 침대 위로 쏟아지고 있는 건지 내가 밖에서 비를 맞고 있는 건지 모를 정도로 경이로웠다. 그 와중에도 내일은 샤워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비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리스몰에서의 밤이었다.  



왼) 저녁하늘과 소        중) 무거운 철 다리미        오) 변기에 걸린 표지판



왼) 들에 핀 야생화            중) 우리들만의 아트       오) 강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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