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리고 성처럼 무너져야 할 것들.
회전 로터리(round·about)에서 우회전을 하다가 사고가 났다.
회전 로터리에는 신호등이 없다. 도로가 만나서 자동차가 회전하려는 도로에 도착할 때까지 빙글빙글 돌아가는 로터리를 '라운드 어바웃'이라고 한다. 도시가 클수록 라운드 어바웃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차로가 5-6개나 되기 때문에 크게 돌아야 하지만 우리 마을은 3개의 차로가 전부다. 자기가 가려는 차로를 깜빡이로 알려주고 천천히 조그맣게 돌면 된다. 무엇보다도 라운드 어바웃에서는 항상 '오른쪽에 있는 차량'이 우선이다.
사고는 라운드 어바웃에서 빨간 차가 우회전을 하고 있는데 직진하려던 흰색차가 박으면서 생긴 일이다. 빨간 차에서 한 여성이 내리더니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what the heck F are you doing?"
3번 소리쳤는데 F라는 단어가 5번이나 나왔다. 세다! 이윽고 흰 색차 조수석에서 문이 열리고 한 여성이 나왔다. 뭐라고 하시는 것 같은데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이 분은 운전자의 엄마로 보였다. 왜냐하면 이 흰색 차량의 앞, 뒤로 'L'(Learner) 사인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운전사는 운전면허 시험을 며칠 앞둔 '운전 교습생'일 것이다. 솔직히 흰색 차 바로 뒤에 있었던 나로서는 '쿵'하고 소리가 난 것도 아니라서 이렇게 차를 멈추고 언성을 높이지 않았더라면 사고가 났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5분쯤 지났을까? 욕이 섞인 소리가 이제 쌍방에서 들렸다. 목소리가 하늘을 찌르려는 데 흰색 자동차 운전석에서 이제 막 20대가 됐을만한 어린 여성이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나왔다. 빨간 차에서 나왔던 여성은 잘 됐다 싶었는지 얼굴이 불에 달군 숯처럼 새빨개져서 욕을 퍼부었다. '아이고 어떡하나' 속으로 마음을 조리고 있는데 남편이 벌써 폭발한 마그마 사이로 걸어가고 있었다.
"L사인이 있잖아요. 실수할 수도 있죠. 얘한테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남편은 이번 3월에 운전면허를 땄다. 그전엔 'L'사인만 일 년 정도 달면서 운전했기에 아마도 운전 교습생에게 마음이 더 갔을지도 모른다.
"저도 이제 운전면허증을 딴 사람입니다. 얘 마음이 얼마나 힘들겠어요."
남편은 어린 여자 아이를 바라보면서 다시 힘주어 말했다.
"운전을 포기하면 안 돼. 넌 할 수 있어!"
남편말이 떨어지자마자 어린 여성이 '고맙다'라는 말과 함께 차 조수석으로 들어갔다. 그때 조그맣게 혼잣말하는 소리가 내 귀에 닿았다.
"백인은 저래. 무서워."
나중에 남편한테 들어서 안 사실이지만 흰색차에 탔던 엄마와 딸은 방글라데시 사람이었고 빨간 차 운전자 여성은 몇 개월 된 아기를 태우고 있었기에 더욱 화가 났었다고 한다. 남편은 사고당한 빨간 차를 찬찬히 살폈다. 어느 하나의 흠도 보이지 않은 걸 확인하고선 빨간 차 여성에게 한 번만 봐줘도 좋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아니 경찰도 아니면서 저런 대담함이 어디서 나왔을까? 순간 우리 아버님도 똑같이 그랬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오지랖은 유전일 것이다. 별 생각이 꼬리를 물고 있을 때쯤 빨간 차 여성이 흰색 차량의 번호를 사진에 담아 두고 두 차는 서로 다른 길로 향했다.
집에 도착해서도 많은 생각이 오갔다.
내가 아기를 차에 태우고 운전한 빨간 차 여성이었다면 또한 내 딸이 운전한 차에 동승한 흰색차였다면 어땠을까? 차도 사람도 다친 큰 사고가 아니어서 다행이었지만 크게 박았던 살짝 박았던 분명한 사고의 원인은 흰색차에게 있었다. 그렇다고 욕을 물 붓듯 퍼부었던 빨간차 또한 잘했다고 할 수도 없다. 어쨌거나 나는 이상하게도 방글라데시에서 온 딸의 말이 자꾸 마음에 걸린다. '백인은 저래' 혐오와 선입견은 이렇게 시작되는 법이니까.
주일 성경학교시간에 선생님께서 '여리고 성'에 관한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었다.
400년 동안 이집트에서 종살이만 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마어마한 '여리고 성'을 마주 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가나안이란 땅으로 가기 위해선 피할 수 없었던 땅, 여리고 성. 이 크고 견고한 난공불락의 요새를 진흙벽돌로 이집트 신전을 짓고 막대기로 양만 몰았던 사람들에게 어떻게 정복하라고 한단 말인가. 창과 활을 만들어 단기간 스파르타식 훈련에 들어가도 모자랄 판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리고 성을 매일 한 바퀴씩 돌았다. 6일 동안. 그리고 일곱째 되는 날에 여리고 성을 일곱 번씩이나 돌았다. 돌기를 마치자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었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함성을 질렀다. 그렇게 무시무시했던 여리고 성은 무너졌다.
주일 학교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여리고 성' 그림이 그려진 종이를 한 장씩 나눠 주면서 우리 삶에서 무너지지 않을 것만 같은 성이 무엇인지 적어보라고 했다. '학교, 나쁜 꿈, 수학, 약삭빠른 선생님.' 이런저런 단어나 문장들을 적고 있는 아이들 사이에서 한 아이가 쓴 단어가 내 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 아이는 'race'라고 썼고 그 위에 X라고 덧붙였다. 그 아이는 우리 아들이었다. 순간 무슨 의미일지 감이 잡히면서도 슬쩍 물어보고 싶었다.
"race라면.. 뛰는 레이스를 하지 말라는 건가?"
아들은 그게 아니라며 고개를 가로지었다.
"나쁘게 대하면 안 돼."
아들은 잠깐 말을 멈추더니 자기의 얼굴을 가리키며 다시 입을 열었다.
"얼굴 색깔 때문에.."
7살에게 난공불락의 성은 '인종차별'이었다. 얼굴이 까매서 당했던 어릴 적 아들의 경험은 물 위에 떨어진 기름방울처럼 선명하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 경험 이후로 아들이 조그마한 학교로 전학을 간 지가 벌써 1년이 지났다. 아들의 베스트 친구는 사무엘이고 백인이다. 같은 초등학교 5학년에는 인도에서 온 형도 있다. 어렸을 때부터 다양한 인종을 만나서 같이 배우고 놀 수 있다는 건 정말 축하할 일이다. 씩씩거리며 싸우다가도 울다가 웃다 보면 나와 다른 피부를 가진 아이 또한 나와 다를 게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테니까. 선입견이 있다면냐 자연스럽게 없어질 것이다.
엊그제 만났던 방글라데시 여자아이의 말이 아직도 귓전에서 맴돈다.
어마무시했던 성, 여리고도 무너졌다. 선입견이던 인종차별이던 찌를 듯이 하늘 높이 굳건하게 쌓여있는 벽일지라도 무너지리라 믿는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