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스틸 앨리스'를 다시 보다
2015년이면 내 인생 가장 바쁜 때였다. 아이가 만 여섯 살이었으니까 어린이집에 다니며 저 나름의 사회생활에 한창이었고, 자아가 꽤 발달하고, 자기 의지가 충만할 때여서 많이 쫓아다녔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내 커리어 상으로도 가장 바쁠 때였고, 야근이나 주말에 나가는 일도 많아서 일과 육아 사이에서 치열하게 고민하던 때였다. 그 와중에 좋은 영화를 챙겨 보는 것이 낙이었는데 그 중 하나가 ‘스틸 앨리스'를 봤다.
알츠하이머는 기억을 잃어가는 병이구나, 기억을 잃어가는 사람의 두려움과 불안함을 섬세하게 연기한 줄리앤 무어는 정말 훌륭한 배우구나, 엄마 앨리스를 가장 엄마답게 대우하는 크리스틴 스튜어드는 참 매력적이다, 앨리스의 기억 속에 마지막까지 등장하는 그 해변 참 좋다…뭐 그런 것들을 느꼈다. 아, 집안에서 화장실을 찾지 못해 소변을 실수하는 장면, 그때 앨리스의 표정도 기억나고.
엄마가 뇌출혈로 쓰러지고 수두증으로 모든 몸과 마음의 기능을 잃어가는 지금,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다. 아빠가 친구들과 동해로 당일치기 여행을 떠나고, 주말에 일이 생겨 동생도 오지 못해 엄마와 나 둘만 있게 된 주말, 영화 한 편 보기로 마음먹고 넷플릭스를 뒤적거리다가 이 영화를 발견했다. 10년 만에 다시 본 영화의 장면 장면이 모두 피부를 터치하면서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 감정들이 내 혈관 속에 흐르는 느낌을 받았다. 10년 전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느꼈던 것은 참으로 피상적이었다. 그 어떤 것도 제대로 공감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억을 잃어버리게 되면 여전히 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내가 나일 수 있는 최후의 보루는 어디까지일까?
누군가를 잘 돌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럼에도 어떻게 살아야 할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영화이지만, 엄마를 간병하고 있는 나에게 한 장면만 꼽으라면 앨리스가 알츠하이머협회에 특별강사로 나서 준비한 원고를 읽는 장면이다. 강연에서 했던 모든 말이 나에게 뜨거움과 차가움을 동시에 안겨주었는데, 특히 이 부분이 나를 울렸다.
우린 바보처럼 무능해지고 우스워집니다.
하지만 그건 우리가 아닙니다.
우리의 병이죠.
오랜만에 소리 내어 울었다. 앨리스의 선언이 엄마가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일 것 같았다. 방에서 누워서 자고 있는 엄마에게 너무 미안했다. 나는 바보처럼 무능해지고 우스워진 엄마가 엄마라고 생각했다. 전화번호 20개쯤은 거뜬히 외워서 전화할 정도로 명석했던 엄마가 바보처럼 무능해진 모습이 엄마라고 생각했다. 칫솔을 이마에 가져다 대고 사과를 대추라고 하는 엄마를 보면서 헛웃음을 짓기도 했다.
우리 엄마 어쩌다 이렇게 바보가 됐을까, 어쩌다 이렇게 똥멍충이가 됐을까, 바보가 된 엄마를 보면 속상하고, 밉고, 외면하고 싶고 원망스럽기도 했다. 저건 우리 엄마가 아니야, 우리 엄마는 저럴 수 없다고 부정하고 싶었고, 그런 생각을 하는 나에게 실망을 했다. 영화를 보며 깨달았다. 그건 엄마가 아니었다. 바보처럼 무능해지고 우스워진 모습은 엄마가 아니라 엄마의 병이다. 나는 엄마와 엄마의 병을 구분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웠고 병으로 인한 엄마의
모습에 실망하고 원망하고 절망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앞으로 엄마와 엄마의 병을 구분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다시는 범하고 싶지 않다. 엄마를 아무것도 못하는 바보 같은 사람, 무능하고 무력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엄마는 몸과 정신의 기능을 상실하는 병을 얻고 병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