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도시의 사랑법
평소에도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일부러 분위기 내고 그러지는 않았다. 그런데 막상 지방이라 그런지 시내로 돌아다니지 않아 그런지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아 괜히 쓸쓸하고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
현재 내 일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대한의 사치인 커피 마시러 나왔다. 아파트 단지 정문 앞에 이디야가 있고, 좀 더 걸어가면 스타벅스가 있다. 카페인 공급이 시급할 때는 집 바로 앞에 있는 이디야에 가고, 누굴 만나거나 쿠폰이 생겼을 때는 스타벅스까지 간다. 그런데 오늘은 좀 뻔하지 않은 곳에 가고 싶어 졌고 그러기 위해 평소 다니지 않는 동선으로 어슬렁거리다가 무인카페를 발견했다.
무인카페에는 정말 사람이 없었다. 직원도 없고 손님도 없었다. 미국처럼 죄다 차로 이동하는 곳이고 발로 걸어 다니는 유동인구는 적은 곳이어서 무인카페에 누가 찾아올까 싶은데 누가 오긴 오는 모양이다. 그들을 향한 경고문이 여기저기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음료만 마시지 않고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 심야에 마땅히 갈 곳이 없는 청소년 연인들에게 cctv로 다 지켜보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경고문이었다. 누가 지켜본다는 것이 싫기도 했지만 오늘은 왠지 누가 지켜봐 준다는 것에 거부감이 들지 않았고, 인적이 드문 곳에서 묘하게 안심이 되기도 했다.
주문은 키오스크로 한다. 무인카페 치고 꽤 많은 음료 중에서 기본 중의 기본인 시그니처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신용카드과 영수증을 차례로 뺌과 동시에 유리부스 안에 서있던 로봇이 눈을 깜빡거리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종이컵 하나를 빼내서 커피머신 앞에 다소곳하게 내려놓으니 따뜻한 물이 쪼르륵 흘러내렸고 기계 뒤에서 원두 가는 소리가 났다. 보아 하니 금방 뚝딱 나올 것 같지 않아 그 사이에 자리를 잡기로 했다.
작지 않은 공간에 테이블이 열댓 개쯤 있었는데 아무도 없었으므로 모든 자리가 나의 옵션이었다. 네모 테이블, 원형 테이블, 2인용, 4인용, 6인용 테이블, 벤치형으로 길게 붙은 의자, 파스텔톤으로 가벼워 보이는 의자, 해가 잘 드는 창가 쪽, 반쯤 그늘진 자리 중 어디가 좋을까. 어디 앉을지 고민이 미처 끝나지 않았는데 커피가 나왔다는 것을 알리는 듯한 벨이 울렸다.
커피는 유리부스 안에서 기다리고 있고, 키오스크 화면에 숫자를 입력하라고 안내문이 떴다. 아까 영수증을 내어 주면서 버리지 말라고 당부했으므로 영수증 안에 필요한 정보가 있음을 알았다. 뭐가 많지는 않은데 또 쉽게 인식되지 않는 영수증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아까 벨소리와는 다른 벨소리와 함께 남자들의 목소리가 빈 공간을 가득 채웠다.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자 갑자기 창피한 마음이 들었다. 세수도 안 하고 집에서 입던 잠옷이나 다름없는 옷에 외투만 걸치고 집에서 신던 덧버선에 슬리퍼를 끌고 나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마치 가정폭력을 피해 급히 집을 빠져나온 사람의 행색으로 보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들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영수증에 더욱 얼굴을 파묻었다.
영수증에는 겨우 두 개의 숫자들이 의미 있는 정보로 인식되었는데 겨우 두 개 중에서도 지금 필요한 숫자가 어떤 것인지 바로 분간하지 못한 사이 뒤에서 616이라는 숫자가 날아들었다. 너무 확신하는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내 손이 움직여 616을 입력했지만 로봇은 꿈쩍하지 않았다. 그러면 그다음 숫자겠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또 다른 목소리가 아니지. 9673을 외쳤다. 거의 동시에 나도 616은 주문번호, 9673이 픽업번호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9673을 입력하자 로봇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로봇이 커피 나르는 것을 처음 보는 건 나만이 아니었다. 그들도 신기한지 유리부스 앞에 옹기종기 달라붙어 로봇이 커피 나르는 것을 구경했다. 로봇의 어색한 관절 꺾기가 기술적 미숙함이 아니라 의도된 퍼포먼스처럼 보였다. 그들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해야 하는 건가 잠시 고민도 했지만 인사를 할 만큼의 고마움은 또 아니기도 했고 마땅한 타이밍을 찾지 못해 그만두었다. 어쩌면 서로 필요 이상 말과 시선을 교환하지 않는 것이 무인카페의 룰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로봇은 616 커피를 여러 개의 문 중에 두 번째 문 앞에 내려놓았고, 커피가 안착하자 자동으로 문이 열렸다. 열린 문 사이로 손을 넣어 커피를 픽업해서 책을 읽을 요량으로 창가에 반쯤 그늘진 자리에 앉았다. 2천 원짜리 커피라는 단서를 붙이면 커피 맛은 그런대로 나쁘지 않았다. 무인이면서 또 아닌 그 공간도 나쁘지 않았고.
평소 같았으면 아무리 호의였더라도 어깨너머로 남의 영수증을 보며 숫자를 불러주는 그들의 태도에서 호의보다는 무례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은 이 도시 사람들 특유의 투박하고 세련되지 않은 태도에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이제 내려온 지 꽤 되어 겉으로 무례한 듯 보이나 알고 보면 호의가 담긴 표리부동한 표현법에 익숙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였으므로 이 도시의 사랑법이 무엇이건 간에 긍정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