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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요 Dec 17. 2024

10분 내로 되는 도시

다른 시간 속으로

화요일 오전 10시, 친척들이 집에 오기로 했다. 나는 약속 시간이 정해지면 할일을 리스트업하고 타임테이블로 짜서 움직이는 버릇이 있다. 6시에 일어나서 샤워한 다음 화장실 청소를 하고, 7시에 아침밥을 안치고 엄마를 씻긴다. 8시에 밥을 먹고, 8시 30분에 설거지하고, 9시에 청소기를 돌리고, 9시 30분에 다과를 준비하면 10시 10분 전이다. 앉아서 휴대폰 좀 보니까 10시 5분, 리모컨으로 티브이 채널을 왔다 갔다 하니까 10시 10분, 책장 좀 넘기다 보니 10시 20분인데 아무 소식이 없다.


날짜를 착각했나? 시간을 잘못 알았나? 전화를 했다. 지금 오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급한 일 없으니 천천히 오세요. 요일을 잘못 알았나 싶어서 확인하려고 전화한 거예요. 전화를 끊고 유난히 맑은 하늘을 보고 멍 때리고 있노라니 초인종이 울린다. 10시 30분이다. 아, 여기에선 10시부터 10시 30분은 같은 시간이구나.


지방에 내려오고 사회생활이 대폭 축소된 만큼 사람 만날 일이 많지는 않다. 아주 이따금씩 사람 만날 일이 있을 때마다 느낀다. 내 몸이 아직 여기 시간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고. 몸은 여기에 시간은 거기에 있다고.


나는 시간 약속에 굉장히 민감한 편이다. 약속했을 때 약속을 깨거나 바꾸는 것도 좋아하지 않고, 시간 약속에 늦는 것을 싫어한다. 여러 가지 변수가 많은 서울에서 중요한 비즈니스 미팅이 있을 때는 1시간 전에 도착해서 기다리는 편이다. 강의나 피티 같은 것이 있는 날에는 2시간 앞서 도착한다. 친구와 약속한 경우에도 웬만하면 빨리 도착해서 기다리는 편이 마음 편하다. 내 기준을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지는 않는다. 다른 사람이 늦는 것에 대해서는 관대하다. 잘 기다리는 편이고, 기다리는 동안 멍 때리는 것을 좋아해서 오늘처럼 급한 일이 없다면 1시간까지도 기다릴 수 있다.


빡빡한 시간관념을 갖고 있다 보니 웬만하면 사람을 잘 안 만나려고 하는 습성이 있다. 약속을 하면 꼭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서 다른 급한 일정이 생겨도 웬만하면 선약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약속이 있는 날은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각별히 노력한다. 그러니까 약속이 있는 날은 늘 긴장하고 쉽게 피로해지곤 한다.


지방소도시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차로 가면 10분이면 된다. 차 막힐 일도 없고, 줄을 서는 일도 없고, 대중이 많이 몰리는 집회나 공연 같은 것도 없어서 교통 통제 같은 것도 없다. 충청도라 그런지, 지방이라 그런지, 일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이 아니라서 그런지 대체로 느긋하고 여유가 있는 편이어서 사람만나는 약속에 나를 들들 볶을 이유가 없다. 그런데도 나는 나를 가만두지 않는다. 필요 이상 나를 재촉하면서 안 받아도 되는 스트레스를 받는다. 속도와 밀도 있는 삶을 살지 않을 도리가 없는 서울 물이 안 빠져서 그런지, 사회생활하면서 살아남기 위해 몸에 밴 습관이 무서워서 그런지, 엄격한 시간관념과 시간관리에 묶여있다. 철저한 시간관념은 프로페셔널의 중요한 요소이고 사회생활에서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기여해 온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온 것은 대도시생활에 늘 도사리고 있는 불확실성과 불안, 불신, 위기의식의 발로가 아닐까 싶다. 즉 불확실한 삶에서 일말의 확실성을 획득하는 방법이었단 것이다.


여기에서 시간은 좀 달라도 된다. 시간은 관념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인식의 편리함, 생활의 편리함을 위해 만들어낸 분류법, 도구일 뿐이다. 여기에서는 이곳의 시간을 살면 된다. 그런데 아직은 공간과 시간이 조화롭지 못한 탓에 몸이 고생한다. 언제쯤 느릿하고 여유 있는 시간으로 살 수 있을까. 이곳에서의 시간관념을 장착해야 진정한 의미에서 여기 사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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