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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요 Dec 10. 2024

거기에 볼 게 있어서 가는 게 아니다

제천 배론성지

'배론성지' 말만 들어봤지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 어린 시절 물놀이로 유명했던 탁사정 가는 길에 서 있는 커다란 십자가를 보고 천주교 유적지라는 정도를 인지할 뿐이었다.  


지금은 제천시가 정한 제천 10경 중 하나라는 배론성지에 처음 가게 된 것은 올봄 말러 공연 때문이었다. 제천에 내려온 이후로, 고향에 내려와서 살까 말까 마음이 들기 시작하면서 며칠에 한 번씩은 제천시청 홈페이지를 들락날락거리다가 제천에서 말러 공연이 열린다는 포스터를 보게 되었다.


이게 웬 떡이지. 제천에서 말러 공연이라니.


말러를 좋아하지만 CD로만 들었지 직접 연주회에 가본 적은 없는 나는 적잖이 흥분했다. 알고 보니 국내 최초 말러 전곡을 초연한 임헌정 지휘자가 충북도립교향악단의 예술감독으로 취임하게 되었고, 충북도내를 순회하면서 연주를 하고 있는데 다음 장소가 배론성지 대성당이었던 것이다. 가보지는 않았어도 말러 교향곡이 연주되는 장소로 성당이 찰떡이라고 생각했다. 기획자가 누구인지 그 안목에 감탄하며 처음으로 고향 제천에 대한 자부심 비슷한 것도 느꼈다.


공연이 시작되기 직전 공연장에 뜻밖에 아는 얼굴이 나타났는데 유인촌 문화부장관이었다. 명색이 문화부장관이라고 보는 눈은 있어가지고 이 시골까지 찾아왔네, 생각했다. 나중에 들은 바에 의하면 가톨릭 신자인 유인촌 장관이 배론성지의 성당을 방문했을 때 여기서 클래식 공연을 하면 좋겠다고 말을 한 이후 추진된 공연이라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돌아다녔다.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매우 그럴듯한 이야기로 들렸다.


어쩐지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배론'이라는 말은 천주교 용어인가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배론성지로 들어가는 마을 계곡이 배밑창을 닮았다는 데서 유래된 말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계곡이 좁고 길긴 했다.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박해를 피해 천주교인들이 숨어들었던 것을 보면 그 옛날에는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깊고 깊은 골짜기였을 것이다. 지금은 길이 잘 닦인 좁은 계곡을 따라 올라가니 한옥 기와를 한 건물, 단조로운 매스가 인상적인 기도원, 성당이 나타났다.  


'피정'이라는 천주교 용어가 떠올랐다. 피정은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성당이나 수도원 같은 곳에 가서 조용히 자신을 살피고 기도하며 지내는 일을 말한다. 배론성지를 방문한 것만으로 피정을 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전통방식을 존중하고 있고, 대체로 유난스럽지 않아서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 차분해지고 영혼이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제천시는 배론성지 주변을 연결하여 산티아고와 같은 순례길 추진하고 있는데 내년말 착공하여 2026년에 완료할 계획이다. 좋다. 순례길 좋다. 길을 위한 길로 일부러 조성하는 것이 아니라 박해를 피해 천주교인들이 숨어든 길이니까 역사적, 종교적 유래도 있으니까 명분이 좋다. 그런데 관련 뉴스를 찾아보다가 약간 우려스러운 지점이 있었다. 그 길에 제천을 알릴 수 있는 약초 등을 심고 성당 미니어처 등을 설치하여 제천시를 알리는 특화구간을 조성한다는 것이다.


세계의 유명 성당 미니어처? 너무나 뜬금없이 느껴졌다. 순례길에 왜 그런 것들을 세워야 하는가. 역시 사람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서 뭔가를 채워 넣어야 한다는 강박이 만든 결과가 아닐까 싶다. 산티아고가 왜 사랑받을까. 산티아고를 본떠 만든 제주 올레길이 왜 사랑받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중요한 이유는 인위적인 뭔가가 없는, 길 그대로의 길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볼 게 많아서 가는 게 아니다. 오히려 자연 그대로의 비어있는 길을 걸으며 내면의 소리에 집중하고 마음을 비우고 싶기 때문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에는 길을 알려주는 '노란색 화살표'와 '조가비 표식'이 있고, 제주 올레길에는 '간세(제주 조랑말) 표식'만이 있다. 순례길은 이정표면 충분하다. 손을 대면 댈수록 순례길에서 멀어진다. 지방소멸도시들이 열심히 하는 건 좋은데 제발 알았으면 좋겠다. 자꾸 뭘 채우기보다는 오히려 덜어내고 비우면 좋겠다. 맥락이 없고 장소성이 없는 구조물은 거추장스럽고 정신만 산만하게 할 뿐이다. 길 그대로의 길, 천주교인들이 순례하던 그때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순례길이 탄생하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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