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의 장락사
갑자기 친구가 집에 놀러 온단다. 집에 뭐가 없는데 뭘 사러 갈 시간은 없다. 냉장고에 흔한 오렌지주스가 있다. 특별할 것 없지만 무난하다. 오렌지주스를 싫어하는 사람은 별로 못 본 거 같다. 뭐가 없으니 그거라도 내놓아야겠다고 생각하다가 가만 생각해 보니 잘 말린 무말랭이가 있는 것을 발견한다. 김장 담그고 남은 무를 손수 썰어 햇볕에 널어 말린 것이다. 그걸 끓이면 괜찮은 차가 되는데 좀 볼품은 없고 오렌지주스에 비해서는 맛이 밍밍하다. 하지만 친구가 핸드메이드의 소박하고 진실된 매력과 자연에서 우러난 구수하고 은은한 맛을 음미할 줄 안다면 괜찮은 선택이 될 것이다.
제천에서 오렌지주스는 의림지가 될 것이다. 의림지는 모든 학생들이 소풍 가는 곳이자 제천 시민들의 주말 나들이 장소, 그리고 제천에 손님이 오면 흔히 데려가는 지역의 명소다. 나도 첫 남자친구와 여기서 데이트라는 걸 했다. 고대에 축조된 저수지라고는 하지만 설명 없이 보면 특별할 것 하나 없는 그냥 저수지다. 대학 때 만난 예산이 고향인 남자친구가 데려갔던 예산 예당저수지, 청주가 고향인 남편이 데려간 명암저수지 같은 곳이다. 의림지에 가면 대체로 전국 어디서나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유원지의 맛을 느낄 수 있다. 제천하면 의림지니까 의림지에 친구를 데려갈 수는 있을 것이다. 특별할 건 없지만 대체로 안전한 선택이다. 하지만 어딜 가나 먹을 수 있는 오렌지주스 말고 좀 다른 것을 주고 싶다면 장락사에 데려갈 것이다. 장락사가 무말랭이 차 같은 곳이다.
장락 쪽에 작은 절과 보물급의 탑이 하나 있다는 것은 어릴 때부터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일부러 찾아가볼 만큼의 대단한 유적지는 아니고 어릴 땐 그쪽이 변두리 외곽 쪽이어서 여태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 지금은 그쪽이 제천의 신도시가 되어 아파트 단지가 많이 들어서고 번화하여 그쪽으로 갈 일이 많다. 얼마 전 지나는 길에 생각나서 한번 들러나 보자는 마음으로 갔다가 장락사에 마음을 홀랑 빼앗겼다. 그야말로 취향저격.
그곳엔 장락사라는 작은 절과 통일신라 말기에 축조되었다고 추정되는 7층모전석탑이 있다. 물론 그것도 소소한 볼거리이지만 나는 옛 절터임을 보여주는 기단석만 남아 텅 비어있는 벌판이 좋았다. 보통 지방의 잘 알려지지 않은 유적지나 박물관 같은 곳에 가면 딱히 뭐가 없는데 뭐라도 채우려는 강박에 이것저것 모아놓아 조악한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여긴 그렇게 채우지 않고 비우려고 애쓴 노력을 엿볼 수 있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유적지를 가더라도 뭔가 채워져 있는 것보다는 비어 있는 곳이 좋은데, 예를 들어 경주의 감은사지처럼 폐사지가 좋다. 한때 융성했던 사찰이 지금은 모두 사라져 터만 남은 곳을 걷다 보면 세월의 덧없음과 애잔함, 쓸쓸함 같은 것을 느낄 수가 있다. 무엇보다 볼게 많아 서두르게 되는 일도 없고 그냥 할 게 없어 걷게 되어서 좋다. 마침 장락사 대웅전 계단에는 손붓글씨로 ‘정숙’이라고 써 놓은 돌이 있는데 이것조차 마음에 들었다. 청개구리 심보가 있는 나는 정숙하라고 하면 떠들고 싶은데 여기선 정숙이라는 돌 앞에 고분고분하고 싶어질 정도로 나를 차분하게 가라앉게 만든다. 그래서 친구가 오면 여백이 있어 정숙하기 딱 좋은 곳으로 데려가 같이 조용히 걷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