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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그리고 500원짜리 라면

젊음, 희망, 항공

by 미스터 엔지니어


이틀 뒤면 크리스마스다. 내가 머무는 두바이의 사택 단지에는 저녁이 되면 하나둘 불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작은 발코니마다 반짝이는 조명이 달리고, 거리마다 붉고 푸른빛이 어른거린다. 이슬람 문화가 뿌리내린 이곳에서도, 주택 단지 안이나 쇼핑몰 같은 공간에는 크리스마스트리가 화려하게 장식된다. 종교의 경계를 넘어, 크리스마스는 어느새 계절의 풍경이 되었다.


문득, 오래전 한 해의 끝자락이 떠오른다. 1993년 겨울, 항공사 입사 시험에서 신체검사로 탈락한 직후였다. 실망을 추스르기도 전에 거리에는 캐럴이 울려 퍼졌고, 세상은 들뜬 공기 속에서 흰 눈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해의 크리스마스는 내게 너무 조용했고, 어쩌면 조금은 쓸쓸하게 보내고 있었다.


낮에는 영어학원에서 수업을 듣고, 밤에는 민속주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자정이 되면 다시 24시간 운영되는 독서실로 향했다. 그곳에는 군 복무를 마친 청년들이 모여 저마다의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사법고시, 행정고시, 회계사, 공무원 시험… 그리고 나는 항공정비사 자격증을 준비하고 있었다.


알바가 끝나면 가게에서 남은 안주를 싸 와 독서실 친구들과 나누곤 했다. 삼치구이 한 토막, 오징어 숙회 몇 점이 작은 위안이 되었고, 그 조촐한 나눔 속에서 우리는 밤을 견뎠다. 누군가는 하루에 단 5시간만 자며 공부했고, 어떤 이는 여유로운 형편 덕에 들락날락하며 시간을 보냈다. 각자의 방식으로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참으로 다양한 젊음의 얼굴들이 있었다.


크리스마스이브 무렵, 사법고시 두 번째 도전에 실패한 친구가 깊은 낙심에 빠졌다. 그의 눈빛이 흔들리는 걸 보며, 나는 조심스럽게 그를 근처 허름한 분식집으로 데려갔다. 우리가 마주한 것은 500원짜리 라면 두 그릇.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그 식탁 위에서 나는 물었다.


“왜 그래. 지금까지 잘 해왔잖아. 다음번엔 꼭 될 거야. 조금만 더 힘내자, 친구야.”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가, 조용히 털어놓았다.

“우리 집에는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말이 있어. 내 학렬의 후손 중 단 한 명만 국가 공직자가 될 거라는. 그런데 이번에 사촌형이 사법시험에 붙었고, 나는 떨어졌어.”


그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라면을 휘저었다. 나는 조용히 말했다.

“그런 얘기, 나는 믿지 않아. 운명은 정해진 게 아니잖아. 원하는 걸 향해 가다 보면 언젠가 도착할 수 있어. 너라면 분명 다음엔 붙을 거야.”


그날의 라면은 참 유난히도 짰다. 국물 속에 담긴 건 미역과 파만이 아니었다. 슬픔, 다짐, 그리고 아주 작은 희망 하나. 그것이 우리 젊은 날의 크리스마스이브였다.

그리고 이듬해, 내가 독서실을 가장 먼저 떠났다. 자격증을 손에 쥐고 공항으로 나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친구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법연수원을 거쳐, 어쩌면 지금은 검찰의 높은 자리에서 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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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른 지금도,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그 시절이 떠오른다. 눈 대신 안개 낀 새벽, 싸구려 도시락, 주섬주섬 나눈 오징어 숙회와 삼치구이, 그리고 하나의 꿈을 믿어준 동료들. 반짝이는 트리보다 더 따뜻했던 그 겨울의 장면은, 여전히 내 안에서 희미하게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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