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vankorwriter Nov 02. 2024

해탈

시가 있는 에세이 (24)

        해 탈


       우르릉 꽝꽝

       천둥소리에 

       뱃속 어지럽히던

       잡것들

       한달음에 휩쓸려 내려간다.


       해방(解放)이다.

       해탈(解脫)이다.


       묵은 고뇌는 수세(水洗)하고

       싱싱한 고뇌를 받아들이자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들을 위하여                 


 중소기업은행 입행동기들이 정년퇴직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으니 지난 세월이 꿈인 듯 하다. 청운의 푸른 꿈을 안고 입사하여 함께 일하고 뒹굴고 경쟁하던 100명이 이제는 30여명 가량으로 줄어버렸고 그나마 2~3년 이내에 완전히 은행을 떠나게 된다.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인생이란 수학방정식으로 풀 수 없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1더하기 1은 2가 되어야 하는 것이 수학의 원리인데 삶의 방정식은 전혀 다른 결과를 나타내어 온 듯 하다.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때는 모두가 비슷비슷한 듯 보였다. 그러나 은행에서 중간간부(대리급) 승진 시험을 보면서 서서히 객관화 된 삶의 성적표가 매겨지기 시작했다. 불합격되어 승진이 미루어진 동기들은 최초의 좌절에 낙담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었다. 무슨 위로가 필요 있었으랴. 오직 시간만이 그 아픔을 달래어 주었을 것이다. 이듬 해 그들은 모두 보란 듯이 모두 승진시험에 합격하였다.


   한국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1970년대 중반부터 차츰 본 괘도에 오르기 시작하자 기업체들은 사세를 확장하며 많은 인재들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은행원 출신들이 속속 민간기업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기업들의 효율적인 금융지원을 위해 ‘신용보증기금’이 창설되자 특히 중소기업은행 출신들이 창립요원으로 많이 특채되어 갔다. 우리 동기들도 한 30여명 정도가 그곳으로 직장을 옮겨 갔다.

 

  은행에서 인력이 많이 빠져 나가니 자리가 많이 비였고 승진은 빨라졌다. 대리 승진 4~5년이면 차장승진이 되곤 했다. 예전에는 6~7년 걸리던 승진기간이었다.

 

  대리 발령을 동기들 중 중간정도 순서로 받았던 나는 차장승진만큼은 뒤지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지점근무 보다 유리하다는 본부부서에 일찌감치 자리 잡았고, 인사고과관리를 위해 은행장 상도 4개나 받는 등 신경을 썼다. 그 결과 차장 승진은 동기들 중 두 번째로 앞서 나갔으나 첫 번째로 나가지 못한 것을 무척 분해 하였다. 그래서 첫 번째로 앞서 나간 겨우 네 명의 입사동기에 대해 시기하고 질투하였다.

 

  당시 나는 ‘자기우월의식’에 빠져 있었다. 엘리트들만 근무한다는 조사부에서 일하고 있었고 주경야독으로 경영학석사(MBA) 학위증을 이미 확보해 두고 있었다. 동기들 중 제일 먼저 미국 뉴욕의 Citi bank에 3개월 간 해외연수도 갔다 왔었다. 차장승진에서 1등을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긴 터였다. 마치 1 더하기 1 은 당연히 2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확실히 믿고 있듯이.     


   그 때가 1980년대 초반에서 중반으로 넘어갈 무렵이었는데 당시 시중에 “성공학 개론‘ 관련 서적들이 불티나게 팔릴 때였었다. 현대 신화, 율산 신화, 대우 신화같은 것들이 젊은 월급쟁이들의 피를 끓게 하던 시기였다. 김우중, 이명박, 신선호 등 평범한 월급쟁이들이 부와 명예를 쌓아간 이야기들이 30대 젊은이들의 꿈과 야망에 불을 지펴 놓던 때였다. 모두가 더 높은 곳을 향하여 날아오를 준비가 되어 있었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비상의 기회가 서서히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1980년대 후반, 노태우 대통령 후보의 선거공약 남발로 동화은행, 동남은행, 대동은행, 평화은행 등 제2 중소기업은행 성격의 신설은행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대전과 광주에도 이러한 은행이 설립될 예정이었으나 무산되었다. 경제침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던 그 때 과연 그렇게 많은 은행이 필요했는지 지금도 의문이지만 나는 그것을 기회로 삼아 정들었던 중소기업은행을 뒤로 하고 동남은행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비록 은행은 달랐지만 소원대로 동기들 중 제일 먼저 ‘지점장’이 되었다. 이어서 다른 일부 동기들도 신설은행으로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기회는 1990년대 후반에 모두 퇴출되어 버렸다.


 밴쿠버에 온 지 3년여 만에 과거 은행생활을 했던 중소기업은행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퇴직자 게시판’에 소식을 남겼더니 동기들이 이메일로 하나 둘씩 연락을 주었다. 사망한 동기들, 사업에 망해서 종적을 감춘 동기들, 이민 가버린 동기들에 대한 소식도 들을 수 있었다.

 

  예전에는 친구이자 경쟁자이기도 한 그들이, 그래서 우월자에 대한 시기와 질투로 잠 못 이루게 하던 그들이 이제는 반백이 다 되어 낚시가고 등산가고 여행 다니면서 건강을 추스린단다. 경제발전의 동맥 역할을 한 금융기관에 종사했던 그들의 꿈과 야망은 이제 낙엽 되어 만추에 흩날리고 있다. 마음을 모두 비우고 서서히 다가올 인생의 겨울을 조심스럽게 준비하고 있다. 승진을 조금 빨리하고 늦게 했던 것이 지금 무슨 소용인가. 재산을 더 모우고, 명예를 더 가졌던들 지금 무슨 소용인가. 처음 입사할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모두 다 같아져 있다. 

 

  그리고 결코 먼저인 것이 달갑지 않는 해탈의 ‘그 날’을 향해 달음박질 하고 있다.



<되돌아 보니>

  나이 고령에 드니 좋은 것. 먹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이 별로 없다는 것. 매사 감흥이 없다. 오래 사는 동안 맛보지 않은 것이 별로 없고, 이색적인 것을 맛본다 한 들 매일 먹는 밥맛만 못한 경우가 흔하다. 다민족이 사는 밴쿠버에서는 세계 각국 요리를 맛볼 수 있어 한동안 세계 맛집 순례도 해 보았지만, 된장국에 김치, 나물무침에 불고기만큼 내 입맛 다시는 것 없다. ‘해탈’의 경지에 든 것이다. 


  해외여행도 미국을 포함해서 수십 번이지만, 30대에 뉴욕에서 처음 본 자유의 여신상 만큼 느껴지는 감흥은 사라진지 오래다. 최근에는 금년 초 이태리 피사의 사탑이나 폼페이 유적지를 둘러보았지만 어릴 때 본 경주 다보탑이나 석가탑, 또는 안압지 풍경만큼 흥미롭지 않았다. 


  은행에서 지점장도 해 보았고, 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아 한 10년 강의도 해 보았고, 글 쓰며 시집도 발간해 보았고, 밴쿠버에서 10여 년간 단체장을 맡아 사회활동에 앞장서 보았지만 이제는 점점 시들해져간다.


   남은 관심은 하나. 나는 언제 내 생애의 마지막을 맞이할 것이며, 어떻게 대미를 장식할 것인가이다. 언제이든 두려워하지 않고 담담하게 기다릴 수 있는 것이 내 마지막 해탈이 될 터인데, 아직은 경지에 도달하지 않고 있다. 주변의 모든 것을 하나 둘 씩 정리하며, 담담하게 주어진 날을 이어 간다면, 언젠가는 걱정도 두려움도 없이 조용히 이승을 떠나는 해탈의 순간을 맞이하겠지. 그리 기대한다.      (2024년 10월 30일)


작가의 이전글 스탠리 공원, 첫 발자국의 의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