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96년 9월호 "월간 문학공간"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내 나이 마흔여섯이었다. 늦깎이여서 주저했지만 일단 시인이라는 이름을 얻고 나니 마구(?) 시詩가 써졌다. 그래 봤자 겨우 14여 년만인 2010년도에 ‘이방인 향단이’ 라는 제목으로 첫 시집을 발간했지만.
좋은 시를 많이 쓰지 못했다. 좋은 문학작품은 독자가 공감하고 배울 바를 찾는 것. 어쭙잖은 시를 써 놓고 괜히 혼자서 감동하고 자화자찬하는 나르시시즘에 빠지지 않았나 싶다. 그래도 시 쓰기를 잘했다 생각한다.
내 인생을 정리하고 싶은데 나이가 들수록 생각도 많고 말도 많아져 수필 같은 산문을 쓰면 쓸 데 없이 주제를 벗어나 옆길로 새버린다. 시는 어쨋든 함축미가 있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에 잎치고 가지 쳐서 200자 원고지 서너 장에 내 삶을 표현할 수 있으니 좋다. 시어 詩語를 선택하는데 몇 날 몇 밤이 걸린다는 것을 계산에 넣지 않는다면.
내 시 詩는 아직도
길고
너절하다
나는 아직도
너절하고 긴 인생을
살고 있다
잔뜩 벌려만 놓고
무엇 하나 제대로 정돈된 것 없는
내 인생은 나의 시 詩 (필자의 등단 작품, "나의 시 詩)
등단할 때 나는 서울에 있었다. 늙어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하고 싶은 것은 아직도 태산인 40대 중반이었다. 이것저것 하고 싶은 일을 잔뜩 벌여놓고 종래는 나이 많다고 흐지부지 접어버릴 때였다. 60대 중반인 지금 생각하니 그때는 한참 젊은 시절이었는데 왜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용기를 내지 못했는가 싶다.
누가 그랬던가.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고. 해서 내 인생의 버킷리스트를 만들고 있다. 우선 캐나다에서 와서 프랑스어, 스페인어, 중국어를 시작했다. 프랑스어는 퀘벡을 비롯한 캐나다 동부를 여행할 때, 스페인어는 남미를 여행할 때 잘 써먹을 수 있을 것이다. 중국어는 천지 사방이 중국인인 내 이웃들과 좀 더 정겨운 대화를 나눌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시집을 한 권 더 내고 싶고, 수필집을 두어 권 발간하고 싶다. 30대 중반 은행대리 시절 은행원을 주제로 한 콩트를 금융 관련 잡지에 연재한 적이 있는데 지금은 캐나다 사회를 주제로 다시 콩트를 쓰고 싶다. 여러 사회단체에 봉사하고 있으며, 나의 재능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으면 마다치 않는다.
무엇보다도 캐나다 전역을 비롯해 전 세계를 여행하고 싶다. 피부와 언어는 다르지만, 생각은 같은 지구인들을 만나 그들의 삶을 엿보고 싶다. '가슴이 떨릴 때, 다리가 떨리지 않을 때' 여행을 가라고 한다. 아직은 다리가 떨리지 않지만, 예전처럼 여행 앞두고 가슴이 떨리지 않으니 걱정이다.
나도 나이를 먹어가는가 싶은데, 80대 중반에도 거뜬히 한국을 다녀와서 바로 멕시코 여행을 갔다 온 문인 한 분이 슬그머니 거든다. 내가 이 선생 나이라면 지구를 두 바퀴는 더 돌겠소. 그래서 용기를 내어 본다. 몇 년 전 하와이 갔을 때 밴쿠버에서 휠체어를 타고 여행 온 분을 보았다. 마음이 동하면 어떤 악조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잔뜩 벌려놓은 내 소망. 이를 하나하나 마무리하기 위해 내 인생 여정은 계속될 것이다.
캐나다 전국 노인회 연합회 참석 후의 여행 이야기도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다. 이번에는 루이스호수(Lake Louise) 이야기다. 밴프 국립공원 내에 있으며 '세계 10대 절경'의 하나로 꼽힌다.
사실 유네스코가 선정한 '세계 10대 절경'에는 루이스호수가 단독으로 들어가 있지 않다. 캐나다 로키산맥이 10대 절경의 하나로 선정되어 있지만, 루이스호수가 로키산맥 안에 있으니 딱히 틀렸다고만 할 수 없겠다.
루이스호수는 아름답지만 큰 호수는 아니다. 면적이 0.8㎢, 가로 0.5km, 세로 2km, 깊이 70m의 작은 호수다. 주변의 빅토리아 산(해발 3,464m) 정상 만년설이 녹아내리면서 호수로 들고, 석영 입자가 포함된 암분(岩粉; 바위조각이 침식되어 모래처럼 잘게 부서진 분말)도 물결에 실려 호수에 든다. 그 암분이 햇빛에 반사되면서 에메랄드 빛을 띠기 때문에 루이스호수로 이름 지어지기 전에는 주민들 사이에 '에메랄드 호수'로 불렸다.
주민들이라 함은 호수 주변에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한 백인 초기 이민자들을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호수의 첫 방문자들은 아니었다. 1만 년 전부터 살던 원주민이 거기 있었다. 원주민들은 사냥을 하거나 또는 영혼의 여행(spiritual journey)을 하고 싶은 필요를 느낄 때 호수를 찾았다.
단순하게 살았을 법한 1만년 전의 사람들도 때로는 '삶이란 무엇인가? 사람이란 무엇인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하는 의문을 가졌던 모양이다. 그래서 옥색 호숫가에서 홀로 명상에 잠기기도 하고 피곤하고 지친 영혼을 잠시 휴식하게 하는 순간을 가졌으리라.
레이크루이스
호수의 유래가 적힌 안내판
1882년 캐나다 태평양 철도 공사를 위한 지형조사를 목적으로 호수 인근 보우 계곡에 베이스캠프를 차린 톰 윌슨(Tom Wilson)은 스토니 나코타 원주민(Stoney Nakota First Nation) 에드윈 헌터와 함께 주변을 탐사하다가 먼 곳에서 눈사태로 야기된 으르렁거림을 듣는다. 무슨 소리냐는 톰의 물음에 에드윈은 그 소리가 '작은 물고기들의 호수 위 눈 산에서(Snow mountain above the lake of little fishes)' 들리는 것이라고 했다. 원주민들은 그때까지 루이스호수를 '작은 물고기들의 호수'라고 불렀다.
다음 날, 톰은 다시 에드윈의 안내를 받아 소리가 난 곳으로 찾아간다. 아아. 거기에는 햇살을 받아 옥색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호수가 있었다. 물빛에 감탄한 톰은 그 호수를 에메랄드 호수라 불렀다. 1884년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넷째 딸 루이스 공주(Princess Louis Caroline Alberta)를 추존하여 루이스호수로 명명되기 전까지는.
나는 루이스 공주가 누구인지 궁금했다. 처음 이 호수를 방문하였을 때는 아름다움에 취해 안내표시판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두 번 째는 여유를 가지고 '호수의 유래'를 끝까지 읽었다. 사람들은 호수가 좋더라, 아름답더라, 한 번 가볼 만 하더라 하면서 루이스호수의 경관을 이야기하지만 나는 불현듯 공주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행복했을까? 어떤 삶을 살았을까 하는 의문이 이어졌다. 생각해 보라. 젊은 시절을. 총각은 '잠자는 숲 속의 공주'를 찾아 그 이마에 키스하고 깨워 자기 집으로 데려와 함께 살고 싶어한다. 여자는 '백마 타고 오는 왕자'님이 찾아오면 그를 따라 함께 궁전으로 가고 싶어한다.
대한민국 드라마에서 빠질 수 없는 소재가 '신데렐라 신드롬'과 '평강공주 신드롬'이다. 남자는 평강공주를 만나 하천민에서 귀족으로, 여자는 매력적인 왕자(Prince Charming)를 만나 편안하고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고 싶어 한다. 1960년대 중반 발행된 모 주간지에서 당시 지방 소재 공장여직원들을 대상으로 장래 신랑감에 대해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는데 중등학교를 중퇴했거나 간신이 졸업한 그녀들의 대답은 하나같이 '돈 잘 벌고, 잘 생기고, 서울에 살고, 대학은 4년제를 나온' 총각들을 선호했다.
그런 그녀들을 누가 나무랄 수 있으랴. 젊음의 특권은 무한대의 꿈을 가지는 것,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청춘을 불사르는 것 아닌가. 삶은 미래가 확정되지 않기에 도전의 가치가 있고, 사랑은 수학공식처럼 더하기, 빼기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눈보라, 비바람 속에서도 아름다운 결실을 보는 법이다.
70, 80년대를 거치면서 가진 것 한 푼 없는 남자와 결혼한 여자가 부잣집 마나님이 되고, 가난한 애인을 버리고 부잣집에 시집간 여자가 파산하여 길에 내앉는 것을 종종 보았다. '평강공주'와 결혼한 가난한 남자가 부유한 처가식구들에게 무시당하고 견제당하면서 불행한 부부생활 끝에 결국은 가정을 깨고 혼자 노년을 보내는 일도 종종 보았다.
공주는 어땠을까? 왕족으로 태어나 세상에 부러울 것 없는 미래가 보장된 공주는 행복했을까? 인간의 삶을 탐구하고 표현하는 작가의 본능이 호수 주변 길을 산책하는 동안 나를 떠나지 않았다.
공주는 1848년 3월 18일 어머니 빅토리아 영국 여왕과 아버지 앨버트 대공의 여섯 번째 아이며 딸로는 네 번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루이스는 재능있고 총명한 아이였다. 특히 그녀의 조각과 무용에서의 예술적 재능은 탁월했다. 그러나 왕족에게 예술적 재능은 그리 권장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빅토리아 여왕은 딸이 예술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허락했다. 조각가 메리 토니크로포트가 루이스를 지도했다.
1863년 그녀는 남 켄싱턴의 국립예술훈련학교에 등록했다. 루이스는 또한 능력 있는 무용가였는데 빅토리아 여왕은 딸의 무용을 보고 "검무를 다른 딸보다 더욱 힘 있고 정확하게 추었다"고 서술했다. 그녀의 기지와 명석함은 그녀의 아버지를 비롯한 많은 왕족의 사랑을 받았으며, 항상 질문이 많아서 "작은 미스 왜 그런 거예요(Little Miss Why)"라는 별칭을 얻게 했다.
루이스의 아버지 앨버타 왕자는 1861년 12월 14일 윈저 궁에서 사망했다. 여왕은 큰 타격을 받고 남편과의 추억이 담긴 모든 가사품들을 윈저에서 남편과 여름휴가를 보내던 아이트섬의 오스본 하우스로 옮겼다. 여왕은 부부 사이 금실이 좋기로 유명했다. 남편 사후 평생을 애도하는 뜻에서 검은 옷을 입고 지냈다고 한다.
이러니 궁정의 분위기는 침울하고 우울해질 수밖에. 모든 가무음곡 행위는 금지되었다. 재기발랄한 루이스는 여왕이 너무 오랫동안 비탄에 잠기는 것에 대해 실망했다. 1865년 그녀의 17세 생일에 무용가 데뷔를 위한 무대를 열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루이스는 일상적이고 지루한 궁정생활에 싫증을 내었고, 여왕은 딸을 무분별하고 논쟁적인 여자로 단정 지었다. 여왕은 아이들을 결혼 시킴으로써 위안을 찾았다. 그러나 시집가지 않은 과년한 딸은 여왕의 비공식적 비서직을 수행해야 한다는 전통을 만들어 루이스를 1866년 무분별한데도 여왕의 비서직을 맡겼다.
우려와 달리 루이스는 이 일을 생각보다 잘해냈다. 여왕은 후에 "누가 그러리라고 생각했을까마는 루이스는 강한 성격을 가진 영리한 여자이며, 자기 희생적이고 다정한 여자"라고 칭찬했다. 그러나 루이스가 그녀의 동생 레오폴드의 가정교사인 로빈슨 덕워스 목사와 1866년부터 1870년까지 사랑에 빠졌을 때, 여왕은 가정교사를 1870년에 해고해 버렸다. 로빈슨은 공주의 신분에 맞지 않는 상대였기 때문이다. 첫사랑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루이스 공주는 누구나 선호하는 신붓감이었다. 근현대 전기작가들에 의하면 루이스는 용모도 여왕의 딸들 중 가장 빼어났다고 한다. 하지만 가식적이고 공상에 빠져 있다고 기자들로부터 비평을 받기도 했다. 루이스의 자유분방하고 여성 옹호적(feminism) 편향 때문에 여왕은 혼사를 서둘렀다.
수많은 신랑감 후보자 중 루이스는 로른후작인 아가일 공작의 상속인인 존 캠벨(존 조지 에드워드 헨리 더글러스 서덜랜드 캠벨(John George Edward Henry Douglas Sutherland Campbell )과 사랑에 빠졌고, 1871년 3월 21일 결혼했다. 그러나 행복한 시작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없고, 이로 인해 엇나가는 그들의 생활방식과 견해차 때문에 사이가 점점 멀어져갔다.
1878년 11월 15일 남편이 캐나다 총독으로 임명됨에 따라 총독 부인이 된 그녀는 11월 25일 핼리팩스에서 취임식을 가진다. 루이스는 총독 부인이 되었으나 향수병과 총독 관저가 있는 오타와를 싫어함에 따라 캐나다에서의 생활은 행복하지 않았다.
1878년 12월 14일 사랑하던 여동생의 죽음으로 캐나다에서의 처음 몇 달간은 슬픔에 잠긴 나날들이었다. 향수병은 여전했으나 춥고 눈 많은 오타와의 겨울 날씨에는 점차 익숙해졌다. 썰매 타기와 스케이트 타기가 큰 위안이 되었다. 영국에서는 남편보다 윗 서열의 공주였으나 캐나다에서는 총독 부인으로 항상 남편 뒤에 물러서 있어야 했다.
1879년 2월 13일 캐나다 국회가 개원식을 가지며 로른은 격주마다 50여 명의 손님들을 저녁 초대했고, 공주는 그저 아내로서 손님접대 상을 차려야 했다. 힘들고 어렵게 식민지를 개척한 캐나다 사람들은 영국식 파티를 좋아하지 않았다. 영국 궁정 연회 스타일의 국회 개원 파티는 초대받은 사람들로부터 호응을 받지 못했다. 게다가 술에 취한 악사가 가스램프를 넘어뜨리는 바람에 커튼에 불이 붙어 한바탕 난리를 치렀다. 삶의 자유를 찾아 캐나다로 온 이주민 출신의 국회의원들과 그 부인들은 이런 파티가 못마땅했다. '갑'에 대한 '을'의 질투였으리라.
1883년 영국으로 돌아올 때까지 총독 부부는 토론토에 왕립예술아카데미(Royal Canadian Academy of Arts,)를 세우고, 토론토와 인근 여름별장이 있는 퀘벡방문을 즐겼다. 공주는 몬트리올에 있는 여성교육협회(Ladies' Educational Association), 여성이민자 보호협회(Woman's Protective Immigration Society), 장식예술협회와 미술협회 등의 적극적인 후원인이 되었다. 손수 어머니 빅토리아 여왕의 동상을 조각하여 현재 몬트리올에 있는 맥길대학의 스트라트코나 음악관(구 로열 빅토리아 대학) 앞에 세웠다.
1901년 1월 22일 빅토리아 여왕의 죽음으로 그녀의 동생이자 새 왕인 에드워드 7세가 구성한 왕의 자문단에 들어갔다. 남편과 오래 떨어져 있었지만 결혼생활은 계속되었고, 1911년 다시 합쳤지만 3년 후인 1914년 남편이 죽자 슬픔에 빠졌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종식 후 그녀의 나이 70에 모든 공식업무에 은퇴하고, 켄싱턴 궁전 외부의 사소한 일들만 행했다. 91세에 사망하였다.
결혼 무렵의 루이스 공주
남편 로른 후작>
여기까지 본 공주의 흔적에서는 '상류사회의 생활을 누리며 오래오래 잘 살았다.'는 것밖에 유추할 수 없다. 명문출신의 남편과 함께, 부와 권세와 명예를 다 가진 공주는 행복했을까? 삶의 뒤안길에서 잠 못 이루던 밤은 없었을까?
공주의 이름이 세세연년 남을 호수 주변을 아내와 산책한다. 삶의 흔적을 되돌아보며 행복했던 순간을 나눠본다. 첫 데이트, 첫 입맞춤, 첫 보금자리, 첫 자동차, 첫 승진발령, 첫 해외여행---무엇보다도 한마음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첫 아들.
부부의 연을 맺은 인간들에게 하늘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은 아이다. 눈의 콩깍지가 벗겨진다는 신혼 6개월을 지나면 부부관계는 차츰 시들해진다. 남자는 종일 직장에서 상사 눈치 보랴, 실적미달로 스트레스받으랴, 먼저 승진하는 동료들의 우쭐함에 서글프랴, 집에 돌아오면 말수가 적어진다. 여자는 밥하고, 요리하고, 빨래하고, 집 안 청소하고, 친구들과 수다 떨고, TV 드라마 보고, 때론 오수도 즐겨 보지만 그래도 심심해진다. 어서 신랑이 오면 하루종일 있었던 이야기를 종달새처럼 노래하고 싶지만 남자는 술과 무슨 원수가 졌는지 몸도 못 가눌 정도로 마시고는 자정을 넘겨 들어온다. 이쯤되면 퇴근한 남편에게서 여자가 듣는 말은 전형적인 경상도 사내가 말한다는 "얼라는?(아이는?). 밥묵자(먹자). 고마 자자(그만 잠자리에 들자)" 세마디로 대충 통일될 수 밖에 없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이런 생활을 단번에 바꾸는 것은 아이의 탄생이다. 신생아실에서 나온 아들을 처음으로 내 품에 안을 때의 감동은 평생을 잊을 수 없다. 모든 생활이 아이에게 맞춰지고, 모든 대화는 아이가 주제였다. 눈도 못 뜨던 핏덩이가 옹알이하고, 까르륵 깔갈 웃고, 온 방바닥을 기어 다니고, 슬금슬금 일어서더니 마침내 숨바꼭질하듯 동네 주변을 휘젓고 다닐 때, 성장할 아이의 미래를 꿈꾸며 부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어느 날, 이 여자가 아니면 결혼하지 않겠다며 아들이 제 짝을 데려오고, 함께 결혼식장에 섰을 때 우리 부부는 마치 예수의 마지막 한마디처럼 '다 이루었다'는 안도감과 함께 십자가를 지듯 한 인생의 전반 생을 마무리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공주 부부는 아이가 없었다. 화려한 궁정생활, 존경받는 지위, 부러울 것 없는 재산이 무슨 소용이랴. 분명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이유가 둘 중 한 사람에게 있었을 터인데 왕실의 일은 비밀에 부쳐지는 법. 역사는 이를 증명할 수 없다.
공주의 남편인 로른 후작은 영국으로 돌아와서 무슨 바람이 불었던지 정치판에 뛰어든다. 1896년 자유당으로 영국 남부 맨체스터에서 출마, 하원의원이 된다. 여왕의 사위가 정치를 한다니 왕실이 좋아할 리 없었겠다. 루이스도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아이가 없어 냉랭하던 부부관계는 더욱 멀어지고, 정치적 신념이 달랐던 둘은 한동안 별거했다. 여왕이 둘 사이를 이어주려 했으나 식어버린 사랑은 되돌릴 수 없었다. 게다가 손아래 동생 베아트리체의 남편 바텐베르크의 헨리 공자, 여왕의 개인비서 스탠포드햄 경, 조각가 죠셉 E. 보엠, 건축가 에드윈 루티어스 경 등과의 염문이 '카더라' 방송처럼 영국사회에 퍼졌다.
그러나 이들과의 관계는 남편과의 소원함을 달래고 싶은 우정의 교제였지 성적인 관계는 전혀 없었다고 루이스의 전기작가인 역사학자 제안 웨이크가 밝히고 있다. 공주의 외로움이 어떠했는지 엿보이는 대목이다.
아름다운 루이스 호반 산책길을 돌아온다. 5월인데도 호수에는 녹지 않은 얼음장이 두텁다. 그 위를 젊은 백인 청년이 걷는다. 괜찮아요? 얼음이 꺼지지 않을까요? 아직은요. 두 분이 걷는 땅만큼 단단해요. 정겨운 대화를 나누며 잠시 그들과 행보를 맞춘다. 바람이 차다. 어름짱같은 아내의 작은 손을 내 호주머니에 담는다. 많이 걸어서 오늘 밤은 잠이 잘 들 거야.
많은 것을 이미 가진 채 태어난 루이스 공주는 남편도 멀어지고 자식도 하나 없어 외로운 수많은 밤을 어떻게 보냈을까? 물론 공주로서의 여러 공식 행사 때문에 바쁜 나날을 보냈겠지만 잠 못 이루는 나날이 더 많지 않았을까?
평범한 삶이지만 사랑하는 꿈나무를 함께 기르며 편안한 잠, 행복한 꿈을 되새겨 온 우리 부부, 공주의 삶이 전혀 부럽지 않다. 초여름이 오면 호반의 눈들은 녹아내리고 물빛은 다시 에메랄드색으로 변할 것이다. 다음에 올 때는 호수 주변의 최고급 호텔 샤또 레이크 루이스에 한번 투숙해 봅시다. 그보다 등급이 낮은 호텔에서도 항상 잠은 잘 오지만 버킷리스트에 또 한 점 추가하며 후반 생을 그려 본다.
레이크 루이스에 석양이 든다. 새들도 서둘러 둥지를 찾는다. 편안한 잠, 편안한 휴식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