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다시 원점으로

by blanca

정작 스탑 사인에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비명을 지른 건 서진이었다. 차는 크게 한번 쿨럭거리고 멈췄다. 그나마 한적한 대낮의 주택가라 다행이었다. 길을 건너는 보행자라도 있었다면 사고로 이어졌을 수도 있었다.


서진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슬쩍 조수석 여자의 눈치를 살폈다. 여자는 늘상 있는 일이라는 듯 무표정하게 클립보드의 서류에 뭔가를 체크했다. 우회전 깜박이를 넣고 서진이 핸들을 오른쪽으로 격하게 틀자 그녀의 목이 바깥쪽으로 살짝 꺾였다. 서진의 사과에도 그녀는 철저하게 무반응이었다. 어려운 코스를 다 통과하고 막바지에 이르러 벌어진 어처구니 없는 실수였다. 이번에도 떨어지면 남편은 그냥 포기하라고 했다.


DMV 입구에는 건물 바깥까지 여전히 기다리는 사람들로 장사진이었다. 심지어 바닥에 자리를 깔고 낮잠을 자는 사람도 있었다. 휴대용 캠핑 의자를 갖고 나온 사람도 많았다. 언뜻 보면 마치 단체 피크닉이라도 나온 정경이었지만 사람들의 얼굴에는 기약 없는 기다림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다시 저 기다림의 줄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서진은 그래도 혹시나 싶어 눈길 한번 주지 않는 그녀와의 눈맞춤을 기대하면서 브레이크를 지그시 밟았다. 이번에는 다행히 비교적 매끄럽게 차가 멈췄다. 패션쇼 런어웨이에 서는게 더 어울릴 것같은 시험관이 이윽고 서진 쪽으로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귀밑 화려한 색감의 터키석 귀걸이가 달랑거렸다. 서진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여자의 흑요석 같은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낫굳.”

서진은 그녀의 이 간명한 판정에 모든 것을 한꺼번에 우겨넣은 듯한 일격을 느꼈다. 너의 운전, 너의 인생. 그녀가 서진에게 클립보드에서 체크하던 종이를 거칠게 빼내어 건넸다. 서진이 범한 오류, 실수의 항목들이었다. 막판 스탑 사인에서만 감점된 줄 알았는데, 차선 변경시 어깨 뒤의 사각 지대를 확인하지 않는 등, 중간중간 자잘한 실수들을 여전히 반복하고 있었다. 망연자실한 서진을 남기고 그녀가 하얀 옷자락을 펄럭이며 차에서 내렸다. 크림색 사리 같은 롱원피스가 늘씬한 몸에 잘 어울렸다. 왜 저 여자는 여기에서 이런 일을 할까? 저렇게 예쁜데...그 순간 어처구니 없게도 서진이 떠올린 생각이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내가 바퀴벌레로 바뀌면 어떻게 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