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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 버틴 육아, 꿈으로 나아가며

육아 버텨내기 - 꿈 찾기!!!

by 글쓰는 맘
육아를 버티며 글쓰기!!


결혼을 하고 첫째를 육아하면서 산후 우울증이 시작된 거 같다.

둘째를 임신하고 출산하면서 산후우울증이 좀 더 심해졌다.

결혼 전부터 워낙 일하는 걸 좋아하고 아무 일도 안 하고 쉬는 걸 삼사일 이상 못 했다.

그런 내가, 그렇게 뭔가를 해내야 직성이 풀리던 내가.

결혼 후, 활발히 움직이던 에너지가 멈췄다.

어쩌면 스스로 멈췄다기보다는 강제로 멈춰졌다.


결혼 후.

갑자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잉여인간이 된 기분이 들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산후우울증 증상이었던 거 같다.

'뚝' 건들면 흐르는 눈물.

스치는 주변의 말들에 상처를 받고.

갑자기 억울함에 '버럭' 화를 내는 모습.




나랑 결혼하면 행복하게 해 줄 거라는 남편의 결혼 전 약속은 사기였다.

이래서 다들 남자는 다 똑같다고 하나 보다, 내 남편은 다를 줄 알았나?

어쩌면 여자 하기 나름이겠지 하는 나의 착각과 자만의 선택, 결과일지도 모른다.


나이가 많고 자궁이 약해 결혼 후 2번의 유산을 경험했다.

그렇게 병원에서 시험관을 추천해 주셨고.

"더 나이 들수록 힘들어요. 한 살이라도 젊을 때 하세요."

시험관아이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배란유도 주사는 호르몬을 변화시키고.

아이가 생기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안한 심리.

나에겐 아이라는 축복이 없는 것인가...

호르몬제 때문(?) 그때부터 우울증 증상이 켜켜이 쌓였는지도 모르겠다.


첫째를 시험관아기로 출산했던 나는 더 늦기 전에 (대략 26개월 터울로)

냉동 수정란으로 둘째를 갖고.

2018년 2월부터 두 아이 육아라는 무시무시한 감옥으로 들어갔다.

한 명을 키우는 것과 두 명을 키우는 것은 전혀 다른 세계였다.

세 아이를 키워보지 않아 세 명과 비교를 할 수는 없지만.

두 아이와 한 명의 차이는 겪어보지 않은 분들께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다.

보통 대략 4배는 어렵다고 하는 말이 맞는 거 같다.




결혼이라는 건 여자를 사회의 “일”로부터 해방시켜 준다고 “취집”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하지만 난 그런 취집이 체질에 맞지 않았다.

프리랜서로 닥치는 일은 다 했던 터라.

짧은 시간에 많은 돈을 벌고.

결혼 전에 당시 또래 여자 나이에 비해 빠르게 종잣돈 1억을 모았고.

부동산과 주식, 펀드, 채권 등의 투자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모든 20~30대가 비슷하겠지만,

돈을 벌고 모으고 불리는 것이 삶의 대부분이었다.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 빠른 판단과 선택이 가장 중요했다.


늘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했던 내가.

결혼과 함께, 시댁 눈치 남편 눈치로 조용히 모든 문제를 시댁어르신들의 결정에 따라야 했고.

내 삶의 결정권이라는 것을 잃어버렸다.


행주 하나, 된장, 김치, 쌀, 설거지하는 방법 하나하나.

아이들 머리 스타일, 애들 먹이는 음식, 주말에 가족 외출하고 들어오는 시간 등등.

우리가 사는 하나하나 다 시부모님의 기준에 맞춰야 했다.


그 순간 탈출하고 싶었다.

감옥이 따로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익숙해지기보다 “나”라는 존재를 잃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엄마로 아내로 며느리로 짊어져야 할 책임감.

하지만 여러 가지 역할을 다 잘 해내지도 못했고, 제대로 된 인정을 받지도 못했다.

매일 시부모님이나 남편에게 혼이 났다.


“넌 이런 것도 제대로 못 하냐!”는 소리가 매일 귀에 꽂히면서.


남편보다 학벌도 떨어지고 내세울 직업도 없었다.

잘 난 자기 아들보다 며느리는 못 마땅하셨던 거 같다.

명문대를 나와서 대기업을 다니는 아들.

돈 좀 굴린다고 까부는 며느리.

자기 아들이 착실히 벌어다 주는 월급을 도박(주식, 부동산)으로 날릴까 봐 불안하셨을 것이다.


결혼 전부터 재테크에 올인하고 공인중개사와 경매 공부를 하면서 주식투자를 했던 나에게.

시부모님은 부동산 투자와 주식은 도박이라며 절대 하지 말라고 하셨다.

여자는 돈 놀이 하는 거 아니라며 집안일이나 잘하라고 하셨다.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딴 날도.

축하한다는 말보다 며느리가 부동산을 차린다고 할까 봐 전전긍긍하셨다.

사업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며.

여자가 나가서 벌면 얼마나 벌겠냐.

여자가 밖에서 일하면 남자가 무능력해진다며.

시부모님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상처로 쌓였다.


한마디로 ‘넌 아무것도 하지 마’였다.

그때는 인정받지 못함에 서러웠지만.

지금 생각하니.

며느리가 밖에서 무슨 일을 만들까 봐.

돈 사고라도 칠까 봐서.

늘 불안했던 거 같다.




재테크로 대박은 아니더라도 월급쟁이 외벌이 생활에 돈을 꽤 잘 굴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편은 겨우 이거 해놓고 뭐가 힘드냐며 제대로 인정해 주지 않았다.

“난 밖에서 힘들게 돈 버는 데! 집에서 애 보면서 재테크한 게 자랑이냐?”

정확히 이렇게 말하지 않았지만. 요약하자면 나에겐 이렇게 들렸다.


우울증이 심해지면서 남편에게 솔직하게 힘들고 버겁다는 말을 했다.

처음에는 귓등으로 듣지도 않았다.

막상 말로 하진 않았지만, 남편의 표정은 집에서 애나 보면서 뭐가 힘드냐는 얼굴이다.

사실 난 뭘 하지 못하게 하는 감옥 같은 상황이 힘들었다.

감옥 같다고 계속 말했지만.

언어가 다른 나라의 말을 하는 거처럼.

남편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어했다.


결혼 전에 하던 일은 계속할 수는 없고, 재테크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우울감을 투자를 대신해 공부로 - '재테크 공부'

다양한 경제 서적을 읽으며 꾸역꾸역 채워나가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나의 생존본능이 찾은 돌파구였던 거 같다.


그렇게 결혼 7년 차쯤까지 이혼이라는 생각을 늘 가슴에 품고 살았다.

대부분의 부부가 실행은 못하지만 이혼이란 걸 꿈꿔 봤을 것이다.

그러다가 남편과 시댁 문제로 또 싸움이 났다.


"더 이상 못하겠다고 숨 막혀 죽을 거 같다고 이혼해 줘. 제발. 악~~!!"


남편에게 발악을 하며 말했던 거 같다.

남편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고.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


"이혼 말고. 그럼 내가 뭘 해주면 되는 데?"

“나 그럼 글 쓰게 해 줘. 이거라도 안 쓰면 못 살 거 같다고.”

"그래. 글 써."


20대에 제일 하고 싶었던 게 글쓰기였다.

고등학교1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 혼자 반지하 단칸방에서 4남매를 키우셨다.

집이 가난해서.

돈을 벌 수밖에 없었지만.

든든한 부모가 있었다면.

글을 쓰고 싶었다.

내 부모에 대한 억울함이(?)

그런 마음이 남편에게 튀어나왔나 보다.


그때부터 남편이 내 말에 조금씩 귀 기울여주었다.

그리고 시부모님의 연락도 최대한 차단해 주었다.


나중에 내가 이혼하자는 말이 무서워서 변했냐고 물어봤더니.

“난 이혼 할 생각 없었는데.”

역시 내 말은 들은 게 아니었다.

또 자기 생각만 했다.

근데 그때 뭔가 해야 할 거 같다는 느낌이 '확' 왔다고 했다.

내 상태가 심각해 보이긴 했던 거 같다.




눈치 보지 않고 당당하게 시작하려고 했지만, 눈치는 계속 보였다.

시부모님은 여자가 밖에서 일하는 걸 못 마땅하게 생각하셔서 얘기조차 꺼내지 못했고.

시부모님에게는 비밀로.

드라마 작가 공부를 시작했다.


글을 쓰고 남편과의 대화를 조금씩 시작하며.

시부모님에 대해서도 많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고지식하고 가부장적이시지만.

걱정하는 마음이란 걸 이제는 안다.

마음이 지나침과 본인들의 기준만 있는 게 문제.


집안일과 육아만 칠십 세가 넘도록 해오신 시어머님에게. (사회생활을 해본 적 없는 불안증??)

육아도 집안일도 부족한 거 투성이로 보였을 며느리인 나.

알려주고 싶었던 것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리고 과거의 여자의 삶에 대한 인정.

남편이라는 위치에 대한 권위.

지키고 싶은 것들이 무너질 까봐 들었던 '불안감'을 이제는 이해한다.


변해버린 현실부부를 받아들이기엔.

살아온 삶에 대한 경험이.

몸에 깊숙이 박혀서.

젊은 부부들이 하는 행동들에 매사 하시는 말씀.


“너네들 이러다 큰일 난다!”


걱정되고 불안한 마음 투성이 일지도 모른다.




뒤돌아 보니.

그렇게 6년간 육아의 우울증을 버티게 한 것이 바로 글쓰기였다.

지금 첫째가 4학년 둘째가 1학년이 되면서 점점 내 시간이 늘어나고 있다.


처음 두 아이가 모두 어린이집에 적응을 시작하던 날.

한 시간 반의 자유시간이 생기던 날이 떠오른다.

첫 자유는 정말 짧았다.

한 시간 반 동안 두 아이를 보는 건 길고도 긴 시간인데.

한 시간 반의 자유는 어쩜 이렇게 빠른가!

그 후로 매년 자유시간이 조금씩 늘어났던 과정이 떠오른다.


그렇게 결혼 후 13년이 지나고.

이제 드디어 내 일을 찾을 수 있는 온전한 자유시간이 점점 더 많이 주어졌다.

남편이 "애썼어. 이제 뭐 좀 해봐."

물론 정확히 이렇게는 말하지는 않았지만,

요즘은 뭔가 하겠다는 나의 의견을 적극 수용하고 도와준다.


남편의 가부장적인 생각과 많이 싸웠던 시간이 지나고.

‘이제야’ 여자의 13년의 노력을 조금 알아주는 남편.

그렇게 주어진 시간 앞에 억울함도 있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니 두려움이 앞서기도 한다.


13년 동안 경력 단절이었던 전업주부 아줌마가.

사회에 다시 첫 발을 내딛으려 한다.



마흔 중반의 넋두리.


결혼 13년 동안 전혀 다른 두 사람이.

다양한 갈등으로 싸우면서 맞춰가고.

두 아이를 키운다는 하나의 공통 목표로.

우여곡절 끝에 여기까지 왔다.

나도 육아를 버텨냈지만.

남편도 가장의 역할을 위해 잘 버텨왔을 것이다.


내 나이 앞이 4로 바뀌는 것도 모르고.

두 아이 육아로 정신없었다.

마흔 중반이 넘어서면서 앗!!

곧 50이 눈앞에 보인다.

20~30대 생각했던 것만큼 이뤄낸 것은 없다.


마흔 중반이라는 나이가. 헛헛하다.

뭔가 대단히 해냈으리나 생각했나 보다.


마흔 중반이 넘어 다시 꿈을 찾고.

다시 시작하려 한다.

늦였다면 늦은 나이.

하지만 앞으로 살아갈, 더 많은 날들을 생각하며.

꿈을 좇는다.


이렇게 넋두리할 브런치라는 소통 공간도 있고.

세상에 참 소소한 행복을 찾을 것들이 많다.


브런치에 이렇게 내 넋두리를 하고 있으면.

누군가 진짜 내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착각이 든다.

뭔가 든든한 수다 친구가 생긴 기분.

새롭고 낯설지만, 신기하다.


내가 육아를 하며 모르는 사이.

세상은 계속 변하고 있었다.


다시 사회로 나오려니 낯설고 두렵다.

이러한 마음을 설렘으로 받아들이려고 애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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