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 「오빠가 돌아왔다」
「오빠가 돌아왔다」는 내가 처음 읽은 김영하의 소설이다. 그동안 알쓸신잡 같은 데서는 보았어도 김영하의 글은 잘 안 찾아 읽었다. 고등학생 때 처음 접한 김영하의 소설이 당시 느끼기에는 성적으로 너무 적나라해서 거북했던 기억 때문이다. 아무튼, 생각보다 재미있고 (역시나) 어린 나이에 읽기에는 좀 어려운 장면도 있다. (다른 게 아니라 경선이가 처한 환경에 자체가 큰 스트레스나 상처로 다가올 수 있을 것 같다.)
읽으면서 신기했던 것은 김영하가 구질구질하고 어려운 처지에 때리고 맞는 집안 형편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다는 점이다. 이 소설은 중학생 여자아이의 시점에서 전개되는데 정말 그 애가 상상된다. 내 말은, 작가가 작위적으로 꾸며낸 티가 잘 안 난다. 무엇보다 그 집이 방음이 잘 안된다는 데서 가난을 꼼꼼하게 보여준다는 인상을 받았다. 가난한 집은 좁고 벽도 얇아서 부모님 속닥이는 소리도 마음만 먹으면 다 들리기 마련인데 이 소설에서는 바로 그런 이유로 서술자 경선이가 어른들의 성생활을 어렴풋이 알아차린다. 경선이가 보호받지 못하는 아이라는 게 바로 그 방음 안되는 집에서 드러난다.
게다가 경선이는 평범한 부모의 조건 딱 두 가지를 원한다. 돈과 멀쩡한 직업. 경선이의 아빠는 술주정뱅이에 걸핏하면 폭력을 행사하는데 왜 경선이는 아빠가 술을 안 마시고 안 때리기를 원하지 않을까? 짐작건대 그런 걸 원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불가능한 것 같다. 자신의 아빠가 술을 안 마시고 사람을 안 때릴 수도 있는 그런 가능성을 지닌 사람이라는 가정이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또는 심적인 지원과 지지는 차치하고 가장 기본적인 측면, 물질적 지지와 보호를 간절히 원한 것일 수도 있겠다.
위의 그림은 매슬로의 욕구 단계설로, 하나의 욕구가 충족되면 위계상 다음 단계에 있는 다른 욕구가 나타나며 이를 충족하고자 한다. 가장 먼저 요구되는 욕구는 다음 단계에서 달성하려는 욕구보다 강하고 그 욕구가 만족되었을 때만 다음 단계의 욕구로 전이된다.(출처: 매슬로의 욕구 단계설 - 위키피디아)
경선이의 가족은 마치 그들이 살고 있는 집 같다. 집은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을 보호해야 하는데 문짝도 다 떨어져 나가 제구실을 못한다. 경선이의 가족 또한 형식적으로나마 있지만 꼴이 말이 아니다. 경선이는 보호인 듯 보호 아닌 보호 같은 어떤 것을 받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경선이 엄마가 낳아준 것만도 고마운 줄 알고 잘 살어. 따위의 말은 불쾌하다. 언제 경선이가 낳아달라고 했나? 자기들끼리 좋아서 낳았으면서.
너 이 자식, 감히 어딜 기어들어오냐며 달려들던 아빠는 오빠의 발길질 한 방에 나가떨어졌고 그때부터 오빠가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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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오빠의 권력 구도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이 소설에 적용시켜볼 수 있다. 아빠는 곧 법이다. 아빠가 정의로운지 아닌지를 떠나서(이 소설 속 아빠는 당연히 부정의하다) 그동안 아빠에게 대항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오빠는 그동안 아빠에게 학대를 받다가 힘이 세지자 아빠를 때려눕히고 집을 나갔다. 그 뒤 다시 돌아온 오빠는 기존 권력인 아빠를 완전히 넘어섰다. 권력 구도의 개편이 이루어진 셈이다. 개인적으로는 전통적인 가족상(가부장적이고 수직적)에서 점점 현대적인 가족상(수평적)으로 점점 변화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같다.
경선이가 오빠의 애인에게 처음부터 못되게 심술부리는 것도 이와 관련 있어 보인다. 오빠는 경선이가 기대고 의지할 권력인데, 오빠가 애인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엘렉트라 콤플렉스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여아 버전으로, 딸이 아버지에게 애정을 품고 어머니를 경쟁자로 인식해 반감을 갖는 경향(출처: 네이버 문학비평용어사전)이다. 경선이의 아빠와 엄마는 경선이에게 평범한 부모 역할을 못했기에 중학생이 되도록 경선이의 마음은 성장하지 못했다. 그래서 아빠 자리에 오빠를, 엄마 자리에 오빠의 애인을 대입하여 오빠에게 애착을 갖고 오빠 애인을 미워한다.
경선이가 평범한 부모라면 적어도 이래야지, 내 짝은 이랬으면, 하고 소망하는 것 또한 같은 선상에서 볼 수 있다. 가족 로망스는 부모가 다른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다양한 공상적 표현을 가리키는 용어로, 한때 이상화되었던 부모의 상을 회복시키기 위한 시도(출처: 네이버 정신분석용어사전)이다. 경선이의 이상적 부모상과 실제로 발견한 흠 많은 부모상 사이의 괴리를 극복하려는 경선이의 마음이다.
실은 가장 이해가 안 가는 건 따로 있다. 경선이는 싸움이 오빠, 아빠, 엄마 사이에만 있는 일이라고 했다. 이로 미루어보아 경선이에게는 아무도 직접적인 폭력을 가하지 않는 것 같다. 왜일까? 경선이는 때리기에 안성맞춤인 아이다. 가장 어리고 여자라 힘도 없다. 분풀이를 하려면 제일 손쉬운 대상인데 경선이는 열외이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함께 얘기 나눴던 다른 분들이 의견을 주셨는데, 우선 개정이 되면서 경선이가 입은 피해 일부가 삭제되었다. 아무래도 (오빠가 경선이 팬티를 훔쳤다는 등) 성적으로 예민한 내용이다 보니 없어진 듯하다. 삭제된 내용을 고려해보면 경선이는 폭력의 일방적인 피해자로, 저항 또는 반항을 아예 할 수 없는 위치에 있으므로 싸움에 끼지 못한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서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의 서술을 통해 그 아이는 몰랐던 엄마와 아저씨 간의 애정이 보이는데, 이 소설에서도 유사한 양상이 드러난다. 경선이의 서술은 무척 재미있어서 암담할 수 있는 내용을 제법 경쾌하게 풀어낸다. 동시에 경선이는 자신이 폭력의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피해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이 지점에서 경선이가 얼마나 위험하고 괴로운 상황에 처해 있는지 드러난다. 경선이는 가스라이팅을 통해 길들여져 집안의 일들을 그저 당연하게만 본다.
「오빠가 돌아왔다」는 이 소설의 제목이다. 사 년 전 오빠는 집을 나갔지만 다시 돌아왔다. 이혼을 하고 집을 나갔던 엄마도 다시 돌아왔다. 남이섬으로 야유회를 떠난다던 그들은 강을 건너지 않고 매운탕만 먹고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경선이는 야옹이에게 언니가 간다고 하고는 끝난다. 경선이는 결국 돌아올 것이다. 이 가족은 결코 화목하지 않지만 그들은 결국 돌아오게 되어 있다. 물보다 진하다는 핏줄이 굴레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이 부분에 있어서 열린 결말이라고 본 어떤 분은 '고양이'를 언급하셨다. 오빠가 여자애를 집에 데려온 뒤 집안 분위기가 좀 좋아졌다고 언급된 것처럼, 고양이를 데려온 뒤 집안은 더 회복될 가능성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이런 해석 또한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경선이가 잘 됐으면 해서. 또 경선이가 왜 '언니'라고 했을까 생각해 보았는데 경선이도 자기가 집에서 권력을 일부 차지하고 싶은 것 아닐까? 동시에 약자로서 보호와 사랑을 받고 싶은 욕구도 있을 것이다. 자기가 권력을 가지게 되었을 때 맘대로 휘두르며 상처 주기보다는, 자기가 보살핌 받기를 원하는 만큼 보살펴주고 싶고 그게 가능한 대상을 찾으려는 거다. 이렇게 보면 경선이가 고양이에 자기 자신을 투영하는 것 같다.
하여튼 열심히는 읽었는데 잘 모르겠다. 문학을 읽는데 감정보다 이성을 더 열심히 쓰기는 처음이고 너무 낯설다. 이 책으로 토의를 하면서 '정상'적인 가족, '비정상'적인 가족이라는 말이 많이 언급되었고 경선이는 자기 가족이 심지어 그렇다는 것조차 인지를 하는 상태라고 판단되었다. 그래, 어떻게 보면 맞는 말인데 내가 경선이라면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로부터 다시 상처를 받을 것 같다. 이렇게 경선이의 가족을 분석하고 냉철하게 판단 내리는 것은 경선이의 일이 나와 전혀 관계없는 철저한 제3자의 입장에서만 가능하니까. 나는 이것도 또 다른 폭력처럼 느껴진다.
나는 소설에 너무 몰입을 한다. 그래서 소설 속 가상의 인물이 실제 인물이 아님에도 예의를 차린다. 소설을 분석하려면 객관적인 태도로 보아야 해서 어렵다. 마음을 안 주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