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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화 May 28. 2023

나를 찾아줘

앨리스 먼로, 『거지 소녀』

패트릭은 좋은 사람이었다. 좋지 않은 것은 그의 견해일 뿐, 사람 자체는 좋았다.

앨리스 먼로, 『거지 소녀』, 민은영 옮김, 문학동네(2019), 201면


인간은 잘못을 저지를 때 비록 고의임에도 사소한 실수로 치부하며 그 잘못이 자기 자신을 훼손시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같은 합리화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동작하는데, 그들의 잘못을 마치 그들과 독립적인 존재인 것처럼 여긴다. 어쩌면 이는 당연한 일이다. 자기 자신을 둘러싼 것들 중 '나'로 규정되지 않는 무엇이든 나에게는 바깥 세계이기 때문이다. 외부의 시각에선 그것들이 '나'를 규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아를 인식하면서부터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거부하고 존재 여부를 알 수 없는 자아의 '본질'을 찾아 헤맨다.


제목의 거지 소녀는 그림 「The King and the Beggar-maid」에서 따왔는데, 패트릭은 자기 자신을 기사도 정신이 넘치는 코페투아 왕에, 로즈를 순결하고 불쌍한 거지 소녀에 대입한다. 그러나 로즈는 순결하고 불쌍한 거지 소녀가 아니다. 로즈와 거지 소녀 사이에는 가난하다는 것 외에 특별한 교집합이 없다. 패트릭 또한 기사도 넘치는 코페투아 왕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집을 사기 위해 돈을 탕진해 로즈를 싸구려 산부인과에 보냈다.) 로즈는 이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패트릭이 원하는 대로 순종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둘의 가면은 결혼 후에도 지속되었고, 이따금 폭발했다.


로즈는 이 남자 저 남자와 불륜 관계를 맺으며 방황한다. 직장을 얻어 나가 살면서도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한다. 로즈에게 연인과 집, 직업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공간이다. 그의 수입 또한 들쭉날쭉 일정치 않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로즈의 환경 속에서 로즈는 그대로이다. 잠시 곁을 내어준 남자에게 매달리고 후회하고 수치스러워하는 것을 반복한다.


대학 건물들은 전혀 오래되지 않았지만 오래되어 보이도록 지어졌다. 석조 건물이었다. (중략) 보통 때 그곳을 채우던 활기가 썰물처럼 빠져나가 경기장에 집중되어 그런 소음을 일으키는 것이 그녀에겐 적절치 못하고 어수선하게 느껴졌다. 응원의 함성과 노래의 내용을 잘 들어보면 참 바보 같았다. 그런 식의 노래나 할 거라면 건물들은 뭐 하러 그렇게 위엄 있게 지었을까?

앨리스 먼로, 앞의 책, 139면




이 소설은 3인칭 관찰자 입장에서 서술되지만 독자는 로즈의 생각만을 읽을 수 있다. 로즈의 오해나 망상, 기대와 후회를 읽으면서 자연스레 그와 함께 주변인들의 속마음을 짐작해보게 된다. 로즈는 줄곧 연기를 하고 싶어 했는데, 정작 배우가 되었을 때에도 배우로서 일하는 것은 자세히 묘사되지는 않았다. 연기하는 로즈보다 어느 삶을 살아가는 로즈에 집중되어 있다. 즉, 이 소설은 규모가 있는 비하인드 더 씬, 즉 진실이 있는 공간이다.


앨리스 먼로는 로즈를 통해 인간의 본질을 탐구했다. 진짜와 가짜가 뒤섞인 세상에서 진실을 골라냈다. 연기를 하는 로즈의 삶을 조명했다. 거지 소녀와는 다른 로즈를 묘사했다. 집, 직업, 가족, 친구 등 로즈를 둘러싼 환경이 아닌 로즈만을 비췄다.


그의 귀향은 곧 탕자의 귀향이다. 탕자가 자신의 전재산을 날리고 집에 돌아왔듯이, 로즈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이상을 지불하고 진실을 깨달았다. 항상 그랬듯이 그녀는 값을 치른 뒤에야 진실을 얻었다.


그녀는 피를 더 팔아서 보송보송한 복숭앗빛 앙고라 스웨터를 샀다. 너무 푸시시해서 작은 타운 아가씨가 한껏 모양을 낸 분위기를 풍겼다. 그런 것을 그녀는 항상 물건을 사기 전이 아니라 산 직후에야 깨달았다.

앨리스 먼로, 앞의 책, 156면


로즈는 다시 돼지우리 같던 고향으로 돌아와 플로를 돌본다. 그녀는 말 그대로 고분고분한 거지 소녀가 되었다. 그런데도, 이런 상황에서도 진실의 실체가 있을까? 있다 한들 의미가 있을까?


경계심 많은 랠프 길레스피는 경계심이 결여된 밀턴 호머를 가장 잘 흉내 내는 사람이었고, 세월이 흘러 사람들은 랠프 길레스피를 밀턴 호머처럼 여기게 되었다.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일이 더 이상 의미 없어진 것이다. 로즈는 이제 자신과 거지 소녀를 구분하는 일,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일이 소용없음을 안다. 자신의 삶을 찾아 헤맸던 지난날들이 그의 삶이 되었다.


랠프 길레스피가 죽으면서 로즈는 둘 사이의 관계, 비슷하다고 느낀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홀로 간직하게 된다. 진실이 침묵하는 것은 그것이 세상에 없어서가 아니다. 진실이 의미 없기 때문도 아니다. 진실이 바깥에 있지 않은 까닭이다. 진실은 로즈의 내면에서 피어난다.


번역을 통해야만 말해질 수 있는 감정들이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그 감정들은 번역을 통해야만 행동으로 옮겨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에 대해 말하지 않고 그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 것이 올바른 길이다.

앨리스 먼로, 앞의 책, 36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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