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어 키건, 「이처럼 사소한 것들」
어느 해 내가 잠시 머물던 오피스텔 1층에 수제 햄버거 체인점이 들어왔다. 퇴근 후 집으로 가는 주민용 입구는 상가와 연결되어 있었는데, 뒷문이 쓰레기봉투로 고정되어 있었다. 열기를 밖으로 빼내고자 열어둔 듯했다. 열린 문으로 뜨거운 기름 냄새가 흘러나왔다. 나도 몰래 가게 안으로 시선이 갔다. 주방에서 바쁘게 햄버거를 조립하고 있는 아르바이트생과 눈이 마주쳤다. 그날 저녁으로 햄버거를 먹으러 나왔을 때 뒷문은 닫혀 있었고 나는 건물을 빙 돌아 손님용 바깥문으로 들어갔다. 내 주문을 요리하는 등을 보는데 지친 한숨이 터졌다.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서 펄롱은 그런 모습을 보고, 냄새 맡고, 감지한다. 홀에서는 보이지 않는 쓰레기봉투, 패티와 함께 익고 있는 아르바이트생의 어린 뺨, 평소에는 존재조차 모르던 뒷문.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보면 당연한 것들.
"그래도 애들이 별이랑 달이랑 달라고 하지 않는 게 기특하지 않아?" 아일린이 말하고는, 잠시 뒤 덧붙였다. "애들 잘 키운 것 같아."
(클레어 키건, 「이처럼 사소한 것들」, 다산책방(2023), 18면)
펄롱은 아내의 현실적인 모습에 끌렸다. 아일린은 크리스마스 선물로 리바이스 501나 지구의, 책 따위를 받고 싶어 하는 아이들을 잘 키웠다고 기특해한다. 그녀에게 성장이란 땅에 단단히 발을 딛고 서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아기에게 걷는 법을 가르칠 때 그동안 가본 적 없는 새로운 곳이 아니라 세인트 마거릿 중학교에 가기를 바랐을 테다. 그녀에게 일의 순서나 역할, 방식은 정해져 있고 아일린은 무엇도 의심하지 않는다. 당연해서 생각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펄롱의 집은 대궐의 뒷문이었다. 그는 갓난아기 시절 단순하고 값비싼 장신구가 있는 집의 부엌에서 기었고, 시간이 흐른 후엔 걸어 다녔다.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로 구성된 '보통의' 가정이 아닌 어머니와 미시즈 윌슨, 네드의 품에서 컸다. 누군지 모르는 아버지 대신 어머니의 이름을 물려받았다. 어머니와 일요일마다 성당에 갔지만 집에서 성경을 펼친 적은 없었다. 그는 그렇게 자랐다. 그의 이름, 가족 구성원, 신앙심은 평범하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그는 어른이 되었고 적당한 직업을 얻었으며 평범한 아내와 화목한 가정을 꾸렸다.
사람은 누구나 비교한다. 때로는 타인과, 때로는 다른 시점의 자기 자신과. 작가 클레어 키건은 이러한 보편적인 심리를 세밀하게 묘사한다. 「맡겨진 소녀」에서 메리는 킨셀라 아주머니의 엄지손가락이 엄마와 어떻게 다른지 생각한다. 킨셀라 아저씨가 자신의 손을 잡아주는 바로 그 순간 아빠의 손을 잡은 적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서는 이런 감각이 한 층 예민해져 펄롱은 차이뿐 아니라 일치도 감각한다.
그는 거울을 보며 네드와 자신의 닮은 점과 다른 점을 살펴본다. 아버지의 부재라는 그늘 아래 자랐지만 알고 보니 아버지의 품에서 컸음을 알게 된다. 남들과 달리 산타를 무서워하는 딸 로레타를 보며 가슴 아파하는 한편, 남들처럼 수녀원의 일을 모르는척하는 자기 자신에게 혐오를 느낀다. 타인의 세계에 동화되고 싶은 마음과 수녀원의 손이 닿지 않는 온전한 자기 것을 원하는 욕망이 충돌한다. 평범한 일상을 지속하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의심한다. 의심은 그의 과거에서 시작되어 현재로 나아간다. 그러다 그는 발견한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예수를 모시면서 외국인을 멸시하는 수녀원장을. 여성을 착취하는 여성들을. 우체국장의 소문을 얘기하면서 수녀원에는 침묵하는 아내를. 부유한 집에서 받은 사탕을 빈곤한 집에 나누지 않은 자기 자신을.
그가 아일린을 사랑하면서도 깊숙한 곳에 숨긴 얘기를 쉽사리 꺼내지 못하는 까닭은 이 문제가 자기만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마음 쓰는 대상은 그저 불쌍한 소녀들이 아니다. 그가 자라기 전에 이미 어른이었던 자신의 어머니이며 그의 아들인 펄롱 자신이다. 이는 펄롱으로 하여금 그가 아일린이 아닌 펄롱이도록 한다. 그는 이해받고 싶으면서도 그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이미 느낀다.
그리고 우리는 그 외로움을 안다. 첫 출근을 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권태로웠다. 일은 내 생각보다 빨리 손에 익었고 더 이상 새로움도 없었다. 내 발로 회사를 나가지 않는 이상 나는 정년까지, 아니면 그전에 죽을 때까지 일을 할 예정이었다. 취업을 하고 나서 나는 어느새 노화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했다. 그전까지는 매년 키가 크고 몸무게가 늘었다. 잘 그렸다고 생각한 그림은 나중에 보니 조금 유치했고, 그걸 알아챈 만큼 내가 달라졌다고 느꼈다. 그러나 이제 어제는 오늘과 다르지 않다. 오늘과 내일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지금 죽는 것과 몇십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죽는 것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 당장 죽고 싶지는 않았다. 오히려 살고 싶었다. 그러나 지하철에 탄 저 사람들, 나름의 나이를 먹은 어른들이 어떻게 늙어갔는지 알 수 없었다. 내 고민에 공감하는 듯한 친구는 정규직으로 전환되지 않아 곧 회사를 나왔다. 더는 같은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아무것도 달라지지도 바뀌지도 새로워지지도 않는 걸까? 요즘 펄롱은 뭐가 중요한 걸까, 아일린의 딸들 말고 또 뭐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했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는데 어딘가로 가고 있는 것 같지도 뭔가 발전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때로 이 나날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클레어 키건, 같은 책, 18면)
모처럼 저녁에 기분을 내고자 가족들과 외식을 한다. 레스토랑에서 각자 먹고 싶은 메뉴를 고르고 오늘 하루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한다. 올리브기름이 테이블을 덮은 하얀 식탁보를 누렇게 물들인다. 그러나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다음번에 방문했을 때 그 식탁보는 새것 같지만, 그들은 음식에 신경 쓰느라 식탁보가 하얗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세탁소 소녀의 착취는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다. 크리스마스 날 외양간에서 몰래 울던 어린 펄롱의 마음처럼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것들이다.
펄롱은 한 손에 에나멜 구두 상자를 들고 세탁소에서 세라를 꺼내 집으로 돌아간다. 그녀를 데려오기 전까지 그는 내리는 눈조차 소심하다고 여기고 있었다(클레어 키건, 같은 책, 112면). 사람들이 맨발의 세라를 경계하지만 펄롱은 되려 당당하다. 펄롱은 구두를 아일린을 위한 선물로 남겨둔다. 세탁소의 소녀는 맨발인 채 수녀와 구두 가게 주인이 하대하는 석탄상의 집에 간다. 학대받은 소녀의 벌거벗은 발은 성탄절의 풍요로움을 누리는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을 넘어 두려움을 안긴다. 동시에 세라가 어떻게 살아갈지 암시한다. 아일린의 구두와 세라는 섞이지 않고 펄롱을 매개로 같은 곳으로 향한다. 세라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곳에서 온전히 동화되지 않은 채 그런대로 살아갈 것이다. 펄롱이 미시즈 윌슨의 침묵에 가까운 배려로 펄롱이 되었듯이. 혹독한 시기이지만 그의 삶은 계속된다.
살기 위해서는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 필요하다. 새까만 석탄이 있어야 흰 겨울을 날 수 있다. 지저분한 구유가 있어야 아기 예수가 뉠 수 있다. 표백제 냄새가 나는 수녀원의 돈봉투를 받는 펄롱의 작은 구원이 있어야만 세라가 어두운 거리로 나올 수 있다. 또 그래야만 미시즈 윌슨에게서 펄롱으로, 펄롱에게서 세라로 삶이 이어진다. 그런 삶에는 고집스레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보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할 공통점이 있다.
영화 〈업〉의 포스터가 떠오른다. 선명한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셀 수 없이 많은 풍선들이 집을 들어 올린다. 그 풍선은 하나같이 작고 가벼우며 제각기 다른 색을 띤다. 뉴로스 타운의 가라앉은 연기보다 가벼우리라. 펄롱은 수녀원을 무너뜨리지 못했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어쨌거나 세라를 구했다. 자잘하고 일상적이어서 불행이고, 그럼에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성장을 마친 순간부터 끊임없이 의심한 나 자신의 의미를 발견한다. 바깥에서 불어오는 바람도 바람이지만 내 입끝에서 나오는 한숨도 바람이다. 실바람이어도 좋다. 섞이지 않아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