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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벽운 Aug 06. 2024

12. 청년들에게 희망을 심어 준, 도산 안창호

흥사단과 기러기,  기러기를 닮은 지도자들

 유일한 선생은 기독교인으로서 박애사상을 실천에 옮긴 분이다. 어려서부터 미국으로 유학 가서 자립으로 대학을 나오고 사업을 펼치기도 하였다. 그의 유훈에는 자신과 가족에게 엄격하게 대하고 타인에게는 관대하게 대하는 내용이 많이 나온다. 그중 “아들 유일선은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스스로 자립하여 살아가도록 하라.”, “나머지 내가 가진 모든 재산, 즉 유한양행 주식 모두를 한국 사회 및 교육신탁기금에 기증해 뜻있는 교육사업과 사회사업에 쓰도록 하라.”는 그의 가족에 대한 냉엄함과 사회에 대한 배려가 돋보인다. 대인춘풍 대기추상(對人春風 對己秋霜)과 같은 것이다. 성서에 나오는 글귀의 “재물은 가난하고 궁핍한 이웃들에게 나눔으로써 진정하게 하늘나라의 곳간에 저축하는 것이 된다.”의 정신이 바로 기독교의 박애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재물만이 아니라 민족의식 고취를 통한 독립운동 또한 기독교정신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와 함께 독립운동을 하면서 기독교의 박애정신을 실천한 분을 들라면 도산 안창호 선생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청일전쟁을 보고 국력배양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선교사 언더우드가 운영하는 구세학당에 입학하여 3년간 수학하면서 기독교에 자연스럽게 입문하게 되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민족자주독립운동을 위하여 교육사업을 강조하였다. 점진학교, 대성학교를 세워 청년들에게 점진적으로 나아가 대성하기를 뜻하는 교명이기도 하다. 도산은 미국으로 건너가 흥사단을 조직하여 인재를 육성하고자 하였다. 흥사단의 깃발에는 기러기가 그려져 있다. 앞서가는 기러기는 지도자로서 조국의 앞날을 개척해 나가는 인재를 상징한다. 흥사단의 4대 정신으로 무실, 역행, 충의, 용감을 내세웠고 서로는 정의돈수로 덕체지 삼육을 동맹수련하는 행동강령을 제시하였다. 자아혁신을 통한 자기 개조로 인격을 완성하고 주인정신을 길러 나가야 민족의 미래가 열린다고 주장하였다.

 주인정신에 대해 강조하고 있는데 지금껏 나라가 어렵고 국권을 빼앗긴 것은 주인정신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하였다. 진정한 주인은 매사를 방관하지 않고 잘못을 고치려고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며 남의 일처럼 관망하는 나그네가 되지 말라고 역설하였다. 예로 들면 주인은 집안에 도둑이 들면 몽둥이를 들고 쫓아내기도 하고 집이 무너지려면 바로 세우기도 하고 집을 개량하고 증축하는 데서 주인정신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도산 선생은 청년들의 역할에 대해 많은 어록을 남겼다. “낙망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나라가 죽는다.”라는 대표적인 말은 심금을 울리기도 한다. 그는 진정한 조국의 미래는 청년이 깨어있어 희망을 가지고 점진적으로 나아가면 언젠가는 조국광복을 이룰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려 하였다. 도산 안창호 선생처럼 근원적인 독립운동과 조국의 미래를 위해 청년들에게 건전한 정신을 함양하여 자아혁신을 통한 민족개조론을 부르짖은 사상가는 드물다.

 그는 미국에서 흥사단을 조직한 이후 상해임시정부로 가서 내무부장을 역임하기도 하였고,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거사로 투옥되는 등 교육과 투쟁을 병행하면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다 바친 민족의 참 지도자이기도 히다.


 나는 청소년시절에 도산 안창호 선생의 사상을 연구하는 모임에 가입하여 국가와 민족에 대한 의식을 깨우쳤으며, 지금까지도 도산사상을 실천하는 길이 민족의 단합과 발전에 필수적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 도산연구반에 가입하여 매주 정기모임을 갖고 기러기가 그려진 흥사단기와 태극기에 경례하고 시작하는 회의는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3분 스피치도 있고 도산사상을 연구하며 토론도 하며 민족의 미래에 청년이 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 깊게 사유하기도 하였다. 마지막 회합을 마칠 때는 동그랗게 원을 그리며 돌아가면서 손을 잡는 윤회악수를 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한 달에 한 번씩 부산 중구 대청동에 있는 흥사단 부산지회에 참석하여 부산시내 각 고등학교, 대학교의 도산연구반 및 아카데미 회원들이 모여 월례집회를 대규모로 진행하고 안병욱 교수 등 흥사단 간부들의 초청강연도 듣고 하였다. 여름방학에는 하계수련대회에 참여하여 친목을 도모하고 건전한 청년정신을 함양하기도 하였다. 내가 속해있던 고등학교의 도산연구반에서는 선배들과 합동으로 1박 2일의 산행도 하여 산수를 체험하며 덕체지 삼육을 동맹수련하기도 하였다.


 다음은 흥사단의 설립목적이다. “본단의 목적은 무실·역행으로 생명을 삼는 층의 남녀를 단합하여 정의(情誼)를 돈수(敦修)하고 덕·체·지 삼육(三育)을 동맹, 수련하여 건전한 인격을 육성하고 신성한 단결을 조성하여 우리 민족 전도대업의 기초를 준비함에 있음이라.”

 도산연구반 활동은 나의 인생에 중요한 전기를 제공한 만남이었다. 도산사상은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참다움을 가르쳤고, 서로를 사랑하면서 두텁게 수련하는 정의돈수(情誼敦修)를 터득하게 하여 나의 인생관과 사회성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나의 이상적인 지도자의 모델은 단연 안창호 선생이며, 위기 시의 투쟁을 통한 지도자로서는 김구 선생이라고 감히 말해본다. 서재필 박사는 안창호 선생의 인품과 사상을 보고 한국의 ‘에이브라함 링컨’이라고 까지 평가하였다.    

 이와 같이 도산 안창호 선생은 참 교육자이며, 혁신을 부르짖는 계몽사상가이며, 강온 양면 전략을 통해 나라를 구하려는 애국지사이며, 청년들의 마음에 강렬한 용기와 결의를 심어준 웅변가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함석헌 선생을 들 수 있다. 선생은 평양고보 재학 시 3.1 만세운동에 참여하였고, 일본 유학 후 귀국하여 민족주의자인 김교신 등과 함께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성서조선(聖書朝鮮)을 계속 발간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던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같은 기독교인으로서 조만식, 안창호 선생을 존경하였으며 민족의식을 고양하는 데 그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해방 후 “씨알의 소리”를 펴내어 민중을 일깨우고 민중의 힘과 역할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이후에는 사상계를 창간하여 장준하를 편집장으로 기용하여 민주주의를 지키는 데 앞장서서 수차례에 걸쳐 투옥되기도 하였다. 이는 기독교의 부조리 및 불의에 대한 저항정신에서 비롯된 것으로 종교적 신념이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에 나서게 하였던 것이다. 그는 “뜻으로 보는 한국사”를 펴내어 고구려 및 발해의 웅대한 기상을 찬양하기도 하여 신채호, 박은식 선생과 같은 역사학자로서의 면모도 보였다.


 그는 기독교인이지만 유교의 義를 인간의 근저에 자리 잡은 불의에 저항하는 의로움이라고 하여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하였다. 오산학교 교장이던 유영모 선생을 만나 노자를 처음 접하면서 동양사상에도 눈을 떴고, 유교와 불교에도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진리가 있다고 믿었다. 그중 사육신의 의를 높이 사서 義란 무엇인가에 대한 시를 적기도 하였는데 노량진 사육신공원 담장에서 그의 시를 만나볼 수 있다.

      

 수양대군이 불러온 피바람

그렇지만 세조의 피바람 뒤에

우리는 의(義)를 알았다.

사육신이 죽지 않았던들

우리가 의를 알았겠는가

이것도 고난의 뜻이 아니겠는가

고난 뒤에는 배울 게 있다.     


 인간에게 가져다준 고난과 억울함은 그 순간에는 인내하기가 힘들지만 언젠가는 거룩한 정신이 되어 되돌아온다는 진리를 함석헌 선생은 말하고 있다.  “사육신이 죽지 않았던들 우리가 의를 알았겠는가.”하며, 의를 위해 죽었기에 의가 영원히 살아 있다고 소리치는 내용이었다. 사육신은 죽어서 충의를 실천하였고, 생육신은 살아서 절의를 지켰다. 그 선택의 길은 삶과 죽음으로 달랐지만 의를 목숨보다 귀하게 여긴 점은 공통점이었다.

 사육신의 죽음은 조선의 선비정신에서 義의 중요함을 일깨웠다. 그들의 죽음이 없었다면 의는 실종되어 정신적 암흑기로 수백 년을 허송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풍속은 타락하여 염치를 모르고, 기회주의가 팽배하여 인간성과 정의를 상실한 사회가 되었을 것이다.


 사육신은 충과 의를 위하여 육신이 찢어지고, 담금질을 당하고, 독배로 숨이 막혀 죽었다. 그러나 죽음으로 저항하여 지켜낸 의는 수백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빛나고 있다. 사람에게는 고결한 인간성이 있으며 그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것이 의일 것이다. 이것은 불의를 참지 못하고 목숨을 바쳐 정의를 지켜내려는 굳건한 믿음에서 나온다. 그러니 신앙처럼 깊고 원초적 욕망보다 강렬한 것이 의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수없이 발생한 민란과 봉기는 그것을 증언하고도 남는다. 비록 실패하여 주모자는 역적으로 처형되고 가담자는 역도로 몰려 죽임을 당했지만 그들의 용기는 장엄하고 거룩하였다.

 목숨을 바쳐 충의를 지킨 충신들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태동하지 못했을 것이며 오랜 폭압과 고통의 세월 속에서 살아야만 했을 것이다. 그들이 개입된 정치적 사건에 대해 체제를 전복시키려는 불충한 역모의 행위로 재단하지만 그 속에 내포된 진실은 하늘의 뜻이자 순리의 표현이다.


 이와 같이 함석헌 선생은 인간이 가야 할 길을 의라고 하였으니, 이는 유교의 인의사상과 기독교의 정의를 대변하는 종교를 초월한 진리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니 의는 인의이며 정의이며 순리이기에 항구불변하니 그 가치는 목숨을 걸 정도로 고귀하다는 뜻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지금 우리는 다원적 종교주의사회에서 서로 다른 종교를 믿지만 인과 박애라는 공통분모하에서 사랑을 펼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의라는 수단을 통하여 합일하고 융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민족의 단합은 시련을 겪었을 때 이루지고 그 고난을 통하여 의의 참다운 가치를 터득할 수 있다고 함석헌 선생은 외치고 있는 것이다.


 사육신의 의를 통하여 우리는 역사의 진실을 알았고 그 정신을 통하여 정의는 살아있고 진실은 언젠가는 빛을 본다는 사실을 알았다. 역사는 배우면서 발전하고 반성을 통하여 올바른 길로 간다고 믿는다. 그리고 잘못된 역사를 청산하지 못하였을 경우에는 악순환이 반복된다는 법칙을 따른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자신을 불사르며 독립운동을 하였다면 친일파는 일제에 동조하며 자신들의 욕망을 채워갔던 전도된 사회상을 보아왔다.


 만약 친일파들의 반성을 이끌어 내지 못한다면 진리는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잠복된 친일의 망령들이 되살아나 위기 시에 국가를 또다시 흔들 것이다. 그것은 민족을 해치면서 까지 자신만의 영달만을 추구해 온 친일파에 대한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도 친일파의 후손들이 권력의 정상에 진입하여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고 서슴없이 일본의 식민정책을 옹호하는 망언을 쏟아내고 있지 아니한가. 나는 그들의 오만함과 당당함에 경악을 금치 못하지만 국민들은 나의 바람대로 반응하고 있을는지 알 수가 없다. 세월이 흘러 세대가 바뀌면 이러한 진실이 묻혀버리지 않을까 두렵기만 하다.      


 혹자들은 지나간 일이니 과오를 용서하고 화합하라고도 한다. 이런 말만큼 위험하고 어리석은 언행이 어디 있겠는가. 불의한 가해자와 불순한 협력자는 참회하고 자진하여 응당한 대가를 치르야 종결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껏 일제는 진정한 사죄를 하지 않고 있으며 협력자들은 식민지근대화론이라는 해괴한 논리로 합리화시키고 있다. 그러니 광복 후 70여 년이 흘렀지만 친일반민족 기득권세력은 대를 이어 기세등등 사회 곳곳에서 견고한 뿌리를 내리고 서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친일반민족처벌법에 의한 친일파 처단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반민특위가 공권력의 사주로 해체된 것은 역사에 크나큰 오점을 남겼다. 국토를 분단하여 반쪽만을 지키기 위해 공산당을 쳐부수자는 정권의 정책은 친일파들에게 활로를 열어주었다. 일제에 적극 부역하던 친일 지식층과 독립군을 소탕하던 간도특설대를 비롯한 일본군 출신 군인, 독립운동가를 고문하던 친일경찰은 처벌은커녕 자숙기간도 없이 바로 권력의 중심부에 자리 잡게 되었으니 통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친일청산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적어 본다.


 첫째로 역사는 진실을 바탕으로 기록되어야 발전한다는 점에서이다. 가해자가 역사에 진실을 드러내는 것은 용기 있는 자세이며 과오를 성찰하여야 더불어 발전한다. 잘못을 감싸고 덮어버리는 미봉책은 표면적으로 조용할지 모르지만 근저에는 분노와 복수의 격류가 흐르는 것이다. 삼국시대부터 왜구의 숱한 노략질과 왜적의 임진. 정유 양란을 겪은 한민족은 원한이 골수에 깊숙이 배어 있었던 터이다. 왜구의 노략질과 살상, 침탈의 왜란은 무력행사이나, 조선병탄을 통한 국권의 박탈과 창씨개명, 한글 사용금지, 국사의 왜곡 등은 민족혼을 말살하는 야만적 행위이니 이를 결코 용납해서는 안되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가해자인 일본은 그 사실을 인정하고 진정으로 사과하여야 역사 앞에 얼굴을 내밀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그에 대해 응답하고 있지 않다.


 둘째로 일제에 적극 부역한 친일파의 책임을 물어야 민족의 화합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이다. 가해자인 일본과 더불어 일제의 침략을 미화하고 민족을 선동한 친일지식인과 친일군인, 친일경찰 등 핵심 친일파에 대한 응분의 처벌이 있어야 한다. 그들은 민족의 비극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안위와 영달을 추구하였으며 나아가 부역의 대가로 얻은 재산을 대대손손 대물림하며 영화를 누리고 있지 않은가. 독립운동을 위하여 전재산을 바치고 목숨마저 버린 애국지사들과 비견하면 과연 정의가 살아있는지를 의문케 한다. 그들에 대해 처벌이 없었다 보니 반성은커녕 식민지 근대화론을 내세우고 자신들의 역할이 애국적이라고 까지 포장하고 있지 아니한가. 그러니 소급하여서라도 그들의 과오를 묻고 그들의 후손들도 가문의 불명예라고 여기며 근신하여야 마땅하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니 결국은 역사에 죄를 짓고 사죄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으니 안타까운 마음을 금치 못하는 것이다.


 셋째로 독립운동에 헌신한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에 대한 예의이며 맺힌 한을 풀어줄 수 있다는 점에서이다. 광복을 맞기 전에 순국한 선열들은 해방 후의 역사의 전개과정을 모르고 잠들었다. 그들은 광복 후의 조국이 온전히 통일되고 민족의 화합을 믿었을 것이다. 영령들이 분단과 분열의 사실을 알면 어찌 고이 눈을 감고 잠들 수 있겠는가. 그리고 광복을 맞이하고 분단의 현실과 동족상잔의 비극을 목도한 애국지사들은 자신들의 헌신의 결과에 참담함을 금치 못하였으리라. 순국선열은 지하에서, 애국지사들은 현실에서 분노하며 한을 청산하지 못하고 있으니 친일청산은 기필코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영국에 망명정부를 세워 레지탕스를 주도했던 드골정부는 나치에 부역한 반민족주의자를 가차 없이 처단하여 민족정기를 바로 세웠던 점에 비추어 관용으로 넘어갈 사안은 결코 아닌 것이다. 그리고 전후 독일의 빌리 브란트 총리는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있던 자리에 세워진 유대인 희생기념탑에서 참회의 묵념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12월의 찬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어느 날, 비에 젖은 기념탑의 싸늘한 바닥에 무릎을 꿇고 비를 맞으며 한동안 영령들에게 기도하는 모습은 감동적이기도 하다. 그는 유대인을 포함한 인구의 20%가 나치에 의해 희생된 폴란드 국민에게 진정한 반성의 뜻으로 비를 맞으며 애도묵념을 한 것이다. 잘못으로 인해 무릎을 꿇는 것은 비굴함이 아니요 참다운 용기인 것이며, 상황을 모면하려는 연기가 아니라 가해자로서의 참회의 자세인 것이다.


 빌리 브란트 그 자신은 독일 국민이지만 나치에 반대하여 레지스탕스를 한 경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잘못을 총리로서 사죄한 것으로 용기 있는 자세가 틀림없다. 그날의 참회의 묵념으로 폴란드와는 급격히 가까워졌으며 무너지는 독일이 일어서는 전기가 되었던 것이다. 자신을 낮춤으로써 자신이 일어서는 진리가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는 동서화해의 초석을 놓아 독일 통일을 앞당겼으며 그러한 공적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훌륭한 지도자이다.


 또 하나 독일이 분단되었지만 우리처럼 동족상잔의 전쟁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업자득이었지만 승전국에 의해 국토가 줄어들고 동서로 분단되었으나 민족의 동질성을 귀히 여겨 극단적인 적대의식을 가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동서분할로 체제는 달랐지만 민족은 강제로 나눌 수 없다는 현명한 판단을 하였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가 끊임없이 분단을 고착화시키려 했지만 그들은 외세의 농간에 말려들지 않았던 것이다. 거기에는 끈끈한 민족성을 기반으로 통일을 위한 징검다리를 하나하나 놓아가는 지혜로운 정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은 의미 없는 이데올로기에 경도되지 않는 민족주의 지도자를 원하고 있었으며 그가 바로 빌리 브란트 같은 사람이다. 만약 어느 한 진영을 극단적으로 신봉하는 지도자들이 동서를 대표하였다면 동족상잔의 전쟁이 있었을 수 있다. 위기 시에 동족상잔의 비극을 막고 온전한 통일을 이루어 낼 수 있는 지도자는 오직 민족주의 지도자일 뿐이다. 극우주의자의 흉탄에 운명한 김구 선생과 같은 민족주의자가 통일 조국의 지도자가 되었더라면 동족상잔의 비극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는다.


 유럽에서는 지금도 나치의 상징인 하켄크로이츠(卐)를 내세우면 처벌할 정도로 엄중하게 역사의 좌표를 설정하고 있다. 피해국인 프랑스나 가해국인 독일 모두 불의한 권력에 의한 반인륜적 폭력에 대해 엄중하게 처단함으로 해서 비극적인 역사가 반복되지 않게 하려는 노력에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그들이 관용을 베풀고 싶은 심정이 왜 없었겠는가 마는, 그들은 사사로운 인정으로는 역사를 바로 잡을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도자는 사심을 버리고 이념도 초월하여 오로지 민족의 단합과 통일을 지향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안창호 선생과 김구 선생과 같은 진정한 지도자가 그리워지는 것이다.  


 나는 말해 본다. 김구 선생은 청년들의 뜨거운 피를 조국의 제단에 뿌리게 한 선동가가 아닌 말없는 설복자이다. 자신들의 내면에 끓어오르는 의분을 정의로운 길로 인도하여 스스로 불사르게 한 스승이다. 자신의 몸을 진리를 위하여, 중생을 위하여 소신공양을 하게 한 선각자이다. 말없는 가운데 마음을 움직여 그 길을 가도록 한 침묵의 설교자이다. 불의에는 야수의 심장으로 불같이 분노하지만 고귀한 젊은 피를 부둥켜안고 흐느끼는 연약한 아버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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