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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벽운 Aug 13. 2024

13. 광복을 위한 長征, OSS대원 들

일본군을 탈영하여 광복군을 찾아가는 사람들

나는 유일한 선생의 광복을 위한 마지막 투혼을 불사르던 일을 떠올리면서, OSS대원에 대한 글을 적는다.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미국이 참전함에 따라 일본제국주의는 총력전시체제로 돌입하여 무차별적인 공출은 물론 강제징용 및 강제징병을 강행한다. 친일 유명인사 및 문인들을 앞세워 황국을 위한 영예로운 성전에 참여하라고 언론을 통하여 독려한다.


 일본에 유학 중이던 학생들은 반강제적으로 학병에 차출돼서 남태평양 및 인도차이나, 남중국 전장에 투입된다. 망국의 한을 가슴에 새겨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는커녕 왜국의 군인이 되어 의미 없는 싸움에 자신을 던져야 하는 기막힌 현실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그런 학병들은 소가 끌려가듯 운명처럼 수용하며 무사 귀환을 하늘에 맞기는 경우가 일반적이며, 일부 의기 있는 학병들은 부대를 탈출하여 중국에 있는 독립군 부대에 합류하게 된다. 그야말로 일황에 충성하는 황군에서 조국의 광복을 위한 독립군이 되었으니 얼마나 장엄한 일인가.


 내가 알고 있는 그런 학병출신 독립군은 김준엽과 장준하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많은 학병출신 독립군도 있을 것이고, 탈출하다가 사살되거나 독립군 부대를 만나지 못하여 국부군이나 팔로군에 강제 편입된 경우도 있을 터이다. 김준엽은 일본 유학 중 학병으로 출전하여 중국 서주에 주둔 중인 일본군영을 탈출하여, 중국군 부대를 운 좋게 만나 임천의 한국광복군훈련반에 편입된다. 그리고 장준하는 동료들과 함께 탈출하여 김준엽이 먼저와 있던 임천의 부대에서 합류하여 중경임시정부의 독립군 부대를 찾아가는 6,000리의 장정을 하게 된다. 이러한 인연으로 두 분은 평생을 의혈을 나눈 동지로 지내게 되는 것이다.


 후일 김준엽은 교육계에 투신하여 대학교 총장을 지내는 등 후학 양성을 위해 그 뜨거운 애국 열정을 승화시켰으며, 평생 굳건한 민주주의에 대한 소신을 저버리지 않고 정치세력에 빌붙지 않는 청정한 선비의 길을 갔다. 한편 장준하는 언론의 길을 택해 체제에 대한 비판과 사회적 모순을 강하게 고발하게 된다. 『사상계』 주필 및 발행인을 맡아 민족의 동질성 회복과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예리한 필봉을 휘날렸다. 광복의 태극기를 휘날렸 듯이 새로운 조국의 발전을 위해 정의의 횃불을 들어 올렸던 것이다. 그는 군사독재체제로부터 숱한 구금과 투옥, 마침내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 비운의 운명을 살다 간다. 두 분의 뜨거운 애국의 피는 동질적이나 인생의 행보는 온건과 강경으로 갈려져 해방 후의 공간을 색다르게 장식한 것이다. 그들이 꿈꾸던 통일된 조국은 영구분단으로 고착되어 가는 현실을 안타까워하고, 인재육성과 정론으로 조국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자 한 열정은 높이 평가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면 OSS대원은 무엇이며 어떤 이들로 구성되었는가! 미국 CIA의 전신으로 비밀공작대라고 하며, 일본군의 후방에 침투하여 적을 교란하는 유격대라고 할 수 있다. 유일한 선생은 미국에서 애국동포들로 구성된 부대에 소속되어 고된 훈련을 받고 국내 진공을 기다렸다. 그의 나이가 50세가 넘은 시기로 조국 광복에 대한 열정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김준엽과 장준하는 임시정부와 연결된 독립군 부대에서 미국비밀공작대의 특수훈련을 받고 국내 진입을 기다렸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이 항복하여 역할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조국광복은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나 OSS의 고국 진공작전 무위는 한편으로 불우한 면이 있다. 김구 선생이 갑작스런 일본의 항복선언을 보고 장탄식하였다는 아이러니한 장면이 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우리 OSS대원이 국내에 진공 하여 참전국으로 당당히 대우를 받는 기회를 놓쳤으니 참으로 안타깝도다.”라고 말한 대목이 떠오른다. 그로 인하여 조국은 승전국의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남에는 미군이 북에는 소련군이 진주하는 분단의 서곡이 시작된 것이다. 패전국 일본은 분단되지 않고 오히여 식민지에서 해방된 조국은 온전한 통일국가가 수립되는데 크나큰 장애를 만난 것이다.


 이러한 OSS대원의 조국 진공작전 무산은 정말 중요한 역사적 분기점이 되고 분단의 단초가 되는 사실상의 신탁통치를 받게 되었으니, 피 흘린 애국선열들이 통곡할 비운이 아니련가.  

 그러면 김준엽, 장준하 등의 장정(長程)은 어떠한 경로를 거쳤으며 그것이 남긴 역사적 의의를 적어본다.  

 대장정은 중국 공산당의 모택동 부대가 장개석의 국부군 부대의 토벌을 피해 수만리 거리를 걸은 것을 말한다. 장준하의 장정은 일본 군영을 탈출하여 서주에서 중경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6,000리의 여정이다. 대장정은 본국인 중국 대륙을 손에 넣으려는 공산당과 국민당간의 싸움에 따른 고난의 행군이지만 장정은 일본에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 자발적으로 찾아가는 구국의 행진이다.


 대장정은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투쟁의 파생물이지만, 장정은 사상과 주의를 떠난 일제를 패망시키기 위한 민족주의의 투쟁의 진수이다. 대장정은 부패한 국민당 정권에 등을 돌린 중국 백성들의 틈바구니를 헤집고 분배와 평등의 기치를 내세워 나중에 승리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순수한 민중을 위한 투쟁이라기보다 계급투쟁을 위한 수단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가 장정을 통해 되새겨야 할 교훈과 가치는 어떠한 것일까?

 첫째로, 일본군 부대를 탈출한 학병들의 개인적 담력과 용기를 들 수 있다. 사람은 아무리 의로운 길인줄 알더라도 죽음을 무릅쓰는 일에 소심해지는 경우가 많다. 관념상으로 이해는 하지만 실행이라는 결단의 순간이 오면 육신을 보호하려는 본능의 지배를 받아 포기하거나 유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점에서 탈출을 결행한 개개인들의 용기는 높이 평가되어야만 할 것이다.


 둘째로, 조국이란 이름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과 연민의 정을 표출하는 부드러운 정서가 감동적이라는 점이다. 개인의 육체적 태생은 어머니로부터 시작된다. 자기를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의 은혜는 본능적으로 인식하고 감사한다. 그러나 자기가 속해 있는 크나큰 공동체인 국가에 대한 은혜는 각성의 문제로 인식하기가 쉽지 않다. 국가는 개개인들이 속해있는 분리될 수 없는 공동체이나, 의무는 지키고 권리는 찾아가지 못하는 억울함을 많이 제공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사농공상의 신분제에 따라 차별을 받고 소수의 집권 사대부계층으로부터 수탈을 당하는 한스런 역사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국가가 위난을 당하였을 때는 자기를 낳아준 부모의 은혜 못지않게 충성이라는 덕목을 위해 자신들을 던지기도 하였다. 충효의 사상이 개인의 DNA에 깊숙이 스며있고 국가를 위한 충성에 스스로 감흥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분명 겉으로는 차별과 수탈이 난무하지만 속으로는 부모 못지않은 포용력을 가지는 게 국가가 아니겠는가. 어머니는 모요, 나라는 모국이리니 수많은 어머니가 모인 공동체가 국가가 아니겠는가.


 셋째로, 변함없는 우국충정과 자신의 영달이 아닌 양보하고 배려하는 인격의 소유자들이라는 점이다. 장준하, 김준엽 등은 고난의 장정 중에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고 여력을 동료들을 위해 다 바쳤다. 동포애라고 해서라기보다 인간 자체에 대한 존중과 연민의 정으로 모두를 평등하고 귀하게 모셨던 점은 인격체로서 존경할 만하다. 해방 후에도 자신들의 공로를 내세우지 않고 자리를 탐내지도 않고 나라가 바로 서기를 열망하였던 우국지사들인 것이다. 그들이 걸어간 발자취에 드러난 사심 없는 무조건적인 헌신의 삶이 이를 증명하고도 남는다.


사람은 위난을 당했을 때에 뭉치는 성향이 있다. 국난을 당하였을 때나 나라가 망했을 때에 의분에 의해 조건 없이 단합한다. 그 와중에는 사상도 주의도 중요하지 않고 오직 대의를 향한 단일대오를 유지한다. 소소한 방법론상의 의견은 있지만 조국광복이라는 대명제 앞에서는 관용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위난을 극복하고 국권을 되찾았을 때는 그간 잠복된 명예욕이 발동하기 시작하는 것으로 지극히 꺾기 힘든 욕망이기도 하다. 장준하, 김준엽 등 그들은 그런 욕망을 이겨내고, 오로지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우국충정의 항상심을 유지한 우국지사라는 점에서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들은 인간 본성의 중요한 덕목인 인의를 실천한 보기 힘든 선각자이자 의혈이 넘치는 혁명가이며 한없이 자비로운 인간성의 소유자라고 나름 평가하고 싶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지만 만약 OSS대원이 일본의 항복선언 전에 국내에 투입되어 주요 거점을 확보하여 연합군의 진군을 도왔다면 어땠을까? 김구 선생이 염려했던 점은 갑작스런 일본의 항복선언으로 그런 기회가 무산되는 것이었다. 드골의 프랑스 망명정부가 국내의 레지스탕스를 지원하고 연합국의 작전에 참전하여 전승국의 지위에 오른 것을 비교하면 답이 나온다. 그러나 우리 조국에서는 그러한 여건이 형성되지 못하고 광활한 중국대륙으로 건너가 항일무력투쟁을 한 것이다. 이것은 막강한 일본군대를 상대하기로 군대나 무기가 부족하였고 주변국의 지원이 어렵다는 게 프랑스와 상황이 다르다. 그래서 김구 선생은 OSS의 국내진공작전에 광복 후 조국의 지위를 그려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불우한 측면도 있었다. 1945년 5월 독일이 패망하자 미국은 남태평양 전쟁에 전력을 집중하여 승기를 잡아나갔으나 중국이나 한국에 지상병력을 투입하기보다는 일본 본토 공략에 집중했다. 반면 소련은 일본과의 불가침조약을 맺은 상태이라 전세를 관망하고 있던 차에 일본이 항복선언하기 1주일 전에 대일 선전포고를 하게 된 것이다. 군병력을 소만국경에 집결시켜 한반도로의 진공을 노리고 있었고, 일본의 항복선언과 동시에 북한지역으로 진입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 미국의 지상병력은 오키나와까지만 진입한 상태라 한국 진공에 소련과의 시간차가 엄청나게 벌어진 것이다. 지상병력의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상태에서 OSS의 국내 진공은 위험하고 작전의 효율성도 떨어지기에 지연된 것이라고 본다. 사실 장준하 등의 OSS선발대가 8월 14일 국내진공을 위해 수송기에 올라 고국으로 진입하던 중 서해에서 기수를 돌린 것도 그러한 전황과도 무관치는 않다. 카이로 선언에서 일제를 패망시키고 난 후에는 조선을 독립시키는데 합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항복한 8월 15일에 임시정부가 들어오지 못하고 11월까지 지체시켰다. 이는 독일이 항복한 후 프랑스 드골의 망명정부가 승전국 자격으로 당당히 입국하여 정부를 수립한 것과는 극명하게 대비된다. 왜 이런 홀대가 벌어졌는지 이해하기 힘들기에 미군정의 임시정부의 배제를 통한 새로운 체제의 구상이 있었을는지 알 수가 없다. 혹시 얄타회담에서 한반도를 남북으로 나누어 분할통치하자는 미. 소간의 밀약도 있었을지에 대해 역사는 말하고 있지 못하다.


 이데올로기에 의해 양립된 미. 소 군사대국은 전쟁을 국가발전의 추동력으로 삼고 평화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수많은 젊은이들을 희생시켰던 역사가 있다. 서로는 겉으로는 극단적으로 대립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전쟁을 통하여 추종국가들에게 영향력을 극대화하여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행태를 보여오지 않았던가. 전후 독일의 동. 서 분할, 한반도의 38선 분단에 이어, 또 하나의 헤게모니를 잡기 위해 프랑스가 철수한 베트남을 새로운 대리전쟁터로 만들었던 것이다. 존슨 행정부가 미국 국민을 속여 전장을 북베트남으로 확대시킨 통킹만 사건이 조작되었음이 후일 폭로되었으니 약소국가를 이용한 반인륜적 행위에 경악을 금치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한반도의 온전한 통일을 보장한 카이로 협정이 어느새 얄타회담에 의해 분단으로 둔갑시켜 버린 저의를 의심치 않을 수가 없다.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질 것이리라.


 열강들이 그들의 국익을 위해서는 약소국을 희생시키는 밀약들이 있어왔기에 의심을 하기에 충분하다. 러일전쟁 후 일본의 을사보호조약(을사늑약)과 미국의 필리핀 식민지 통치를 서로 보장하는 흥정인 가쓰라. 테프트 밀약이 대표적인 것이다. 이것이 조선 멸망의 원인인 1차 밀약이었다면 한반도의 분단을 초래한 얄타 회담은 2차 밀약이 될 수도 있겠다. 열강들의 이해관계에 의해 조선의 병탄이 방치되고, 광복은 되었으나 조그만 국토가 또다시 쪼개지는 그 불합리와 부당함을 어디에도 하소연할 수 없는 국제정세가 비애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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