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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벽운 Aug 20. 2024

14. 탐라의 향기, 거상 김만덕

민생구제를 위해 보낸  관세음보살

  나는 김만덕의 자취를 찾아 제주도로 가본다. 우선 몸은 나중에 다녀오고 먼저 마음을 먼저 보내본다. 제주도를 알지만 아직도 모르고 있는 건 웬일인가. 여행을 다녀오고 관광을 하였건만 나는 아직도 제주도를 잘 모르고 있다. 한라산, 백록담, 영실, 정방폭포, 일출봉의 경치 같은 겉만을 보았다. 섬에 내재하고 있는 이야기는 알지도 알려고도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 속에는 슬픔이 잠들어 있기에 나는 그 슬픔을 깨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까. 그 슬픈 섬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도 없고 모두 다 모르는 것처럼 입을 다물고 있기에 나도 그냥 묻지도 않았다. 비굴한 것인가 아니면 현명한 것인가. 침묵하는 게 그 상처를 들춰내서 또다시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을 데려오지 않는 게 예의라고 합리화해서일까. 그 섬은 분명 슬픈 사연을 안고 있을 것이다. 나는 글로서는 다 표현할 수 없기에 꽁꽁 숨겨진 사연을 기록해 놓지 않은 백비(白碑)를 보라고 답하고 만다.  너무 억울하기에 너무 처절하기에 너무 비정하기에 그냥  벙어리가  돼버린  그 비석을 말이다.


 제주도는 옛날에는 탐라국이 있던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섬이며 국토의 최남단에서 바람막이를 하고 있는 고생하는 섬이다. 태풍이 불어오면 한라산이 이마를 들이대서 막아주고 폭우가 쏟아지면 먼저 팔을 벌려 온몸을 적셔서 백록담에 담아두지 않았던가. 그 세찬 바람은 한풀 꺾여 순하게 되고 퍼붓던 빗줄기는 단비가 되어 내륙의 전답을 적셔주지 않았던가. 그 섬은 슬픈 섬이지만 고마운 섬이라는 걸 우리는 알지 못하는가. 그 섬에 사는 그들은 우리를 대신하여 비바람을 맞고 젖어 있지 아니한가. 슬픈 섬이여! 고마운 섬이여! 이제 희망의 섬이 되어라!


 나는 슬픈 섬인 제주도의 시련에 대해 함축적으로 적어본다. 고려시대에는 삼별초가 대몽항쟁을 이어갔던 투쟁의 섬이며, 조선시대에는 수많은 선비들이 당쟁에 휘말려 유배를 갔던 곳이다. 육지의 많은 한을 이곳으로 실어와 이곳 고유의 한과 보태졌으니 얼마나 슬프겠는가. 특히 여인의 한은 인내의 한계를 넘어 가혹하기도 하였다. 폭풍우에 바다에서 남편을 잃고 그 공허함을 허벅을 끌어안고 물질을 하며 달랬던 그들이 있었는가 하면, 눈물도 마르기 전에 해방공간에서는 이념 대립의 광기 속에서 남녀노소 구분 없이 또 얼마나 많은 목숨을 잃었던가. 잊을 수 없는 기억을 잠재우려 해도 무시로 불어오는 태풍처럼 다시 몰아치는 시련을 어찌 견뎌낼 수 있으련가.


 4월은 어째서 잔인한 달이 되었는가. 5월은 어찌하여 슬픈 달이 되었는가. 참으로 봄은 생명의 계절이지만 청춘이 활짝 꽃피지 못하고 비바람에 지고 말았는가. 활짝 웃는 함박꽃 대신 핏빛 같은 진달래만 무성하게 한라산과 무등산의 산록을 물들이고 있는가.   

 가해자 그들은 웃고 있지만 영혼은 혼탁해져 내면은 어둡게 되고, 피해자 그들은 울고 있으나 슬픔은 영혼을 정화시켜 내면을 밝히리라. 그들이 만든 죄는 정체가 없는 허상이었고 그 허상을 잡았다고 도취되어 광기를 부린 그들은 스스로 죄를 지은 것이 되리라. 살아 있을 적에는 피해자는 고통스럽고 가해자도 가책을 느끼니 모두 다 피해자가 되는 것을 모르는가. 죽을 때에는 가해자는 심판의 공포에 휘말려 눈을 감기 힘들지만 피해자는 애환을 간직하지만 심판의 두려움에서는 자유스럽다고 믿는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스스로를 심판하는 양심이라는 게 존재하므로 죄를 지으면 기필코 고통을 받는 인과의 법칙을 피해 갈 수는 없다.   


 나는 구체적으로 그 한과 시련을 적으려니 내 마음이 아파 적지를 못하겠네. 그냥 슬픈 섬이라고 말하고 말자. 너무 많고 너무 기막힌 사연이라 적지를 못하니 일어서지 못하고 쓸쓸히 누워있는 백비가 대신 말하리라.  


 나는 제주의 시련을 보고 가슴 아파하면서도, 고생하는 그 고마움을 넘어 희망을 갖기를 염원하면 적어 놓은 시 한수를 꺼내어 본다.   

   

      슬픈 섬에서 희망의 섬으로  

   

파도는 산더미처럼 무시로 밀려오고

바람은 날 선 손톱으로 사정없이 할퀴고 가는

그 이유를 나는 아직도 모르겠네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늘은 꾸짖을까

말해도 하소연해도 대답을 않는

그 답답함이 나를 미치게 하네     


이제는 어쩔 수 없이 내가 이유를 찾아보리니

아무것도 잘못한 것도 없으나

슬픔은 그냥 울음을 안고 쉴 새 없이 오고 있다고     

슬픔은 언젠가 기쁨을 데리고 온다고 했지만

아직도 기쁨은 포구에  도착하지 않았다네


그냥 더 큰 슬픔이 없는 것이 기쁨인가     

자연이 꾸짖는 건 참아야만 하지만

사람이 때리는 건 정말로 아프다네

멍든 상처 아물어도 가슴속 응어리 풀리지 않네     

천형(天刑)인가 그칠 줄 모르는 슬픈 일들

하늘은 원망하지 않겠다만

사람들아 제발 이곳 사람이 되어서 보라     


! 슬픈 섬이여

천년의 슬픈 눈물은 마르지 않고

지금도 추적추적 빗물처럼 내리고 있네     


! 고마운 섬이여

머리로 태풍을 막아주고 가슴으로 빗줄기 끌어안으며

국토의 남단을 지키는 그 고생 어찌 모르겠는가     


부디 희망의 섬이 되어라

서글픈 과거를 망각 속에 불살라 버리고

새로운 미래를 꿈꾸는 행복한 땅이 되어라   

       

  나는 다시 김만덕이 영향을 받은 다산 정약용 선생의 유배지인 강진과 그가 거래했던 죽세공품 원재료의 현장인 담양을 방문하기로 한다. 다산 정약용은 실학파로서 유배지인 강진에서 민생구제를 위한 많은 저술을 남겼고, 담양은 김만덕이 갓을 만드는 데 쓰인 양태의 원재료인 대나무를 거래했던 지역이다. 이곳은 김만덕의 행적에 파생된 인물과 상거래 지역으로 자연스레 적어본다.


 먼저 다산 정약용 선생은 개혁군주인 정조시대의 관료로서 과학적 근거하에 많은 기계를 제작하여 실용화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수원 화성을 축조하기 위해 발명하여 사용한 기중기이다. 높은 성벽에 무거운 벽돌을 쌓아가는 데 기중기는 필수적이었으며 그것의 효율성은 탁월하였다. 물론 청나라의 문물을 참조하여 제작한 것이었지만, 그 기술을 전수해주지 않은 상태에서 스스로 그 원리를 터득하였으니 또 다른 발명이라고 할만하다.

 그는 김만덕을 만나 제주도에 구황작물로 고구마를 추천하여 모종을 구해주어 시배를 하여 성공토록 하였다. 그리고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의 실용철학이 김만덕의 민생구제의 방법론에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그는 김만덕을 보는 순간 비상한 눈빛에 경이로움을 표한다. 바로 겹눈이라고, 보통사람들은 갖지 못하지만 또한 보통사람들은 그것을 보지도 못한다. 그러니 비상한 사람을 비상하다고 보는 그의 안목은 탁월하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저서인 여유당전집에는 김만덕을 만났을 때 중동(重瞳)리라고 적었다가 후일에는 다시 중동이 아니었다고 적는다. 왜 이런 번복이 나오는가를 추측해 보면 후일 여유당전집이 후생들이 재구성한 부분도 있었지만, 다산의 김만덕의 안위에 대한 배려라고 믿는다. 겹눈은 역사적으로 중국의 요임금과 가야의 김수로왕이 가졌다는 전설적인 눈동자이기에, 잘못하면 여인의 신분으로서 세상의 모함을 받으면 신변이 위험해질 수도 있기에 일부러 번복했을 것이라고 말이다.


 나는 다산 정약용 선생을 찾아가는 기행을 2004년도에 하였었다. 그때는 다산 선생의 유배의 한을 느끼기 위해 찾아가는 여정이었지만 김만덕과의 인연을 알고 나서 그 장소가 새로운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정약용 선생이 유배를 간 강진의 다산초당이 자리 잡은 산은 만덕산이라고 하며 차의 시배지로서 다산이라고도 한다. 만덕산이란 그야말로 만덕을 베푸는 자비로운 산이니 거기에는 백련사라고 하는 고찰이 있다. 다산 정약용은 백련사 주지 혜장스님과 차를 마시면서 유학과 불교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간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혜장은 정약용에게 다산을, 정약용은 혜장에게 아암이라는 호를 서로 지어준다. 유학과 불법이 만나 만덕을 베푸는 인과 자비가 융합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정약용이 유배를 가기 전에 김만덕을 만났으니 유배지인 만덕산 자락이 김만덕의 이름과 자연스레 연결된다. 지금 내가 쓰는 글은 대부분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는 것이지만 나의 상상력에 의한 창작도 가미되어 있다. 정약용과 혜장스님이 서로에게 호를 지어주는 것이나, 정약용이 유배 간 만덕산이 묘하게 인연의 고리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정약용이 신유박해로 인해 강진으로, 형 약전이 흑산도 유배 간 것은 민생구제를 위한 하늘이 내린 사명이라고 할 수 있을는지. 정약용이 유배지가 만덕산이라고 하자, 민생구제의 자비를 베푼 김만덕을 연상하며 대단한 인연이라고 무릎을 탁 쳤을 것이다. 거기에다 혜장스님으로부터 불법을 만났으니 그가 이곳으로 유배온 필연성에 대해 신묘함을 느꼈을 터이고 본격적인 민생구제의 저술을 하게 된 동기가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다음은 김만덕이 육지와 교역을 하면서 알게 된 지역인 담양에 대해 이야기를 적어본다. 담양은 양질의 대나무가 많아 죽세공품으로 이름이 나있던 곳이다. 김만덕의 중요한 거래품목에는 갓이 있다. 갓의 차양과 테두리 부분을 양태라고 하는 데 대나무를 정교하게 가공하여 만든다. 갓의 머리 부분은 말총을 재료로 하여 이 또한 아주 정교한 작업으로 만들어 양태와 결합하여 갓끈과 연결하여 하나의 갓이 완성되는 것이다. 제주도는 말을 방목하는 농장이 있어 양질의 말총(말 꼬리의 털)의 집산지이나, 양태의 원재료인 대나무는 귀한 지역이니 육지의 통영, 담양 등지에서 양태를 공급받아 갓을 완성하여 육지로 내다 팔았다. 조선시대에는 선비나 양반들에게 갓은 필수였고 그 가격 또한 아주 비쌌다. 김만덕은 육지와의 거래에서 갓을 통해 많은 이문을 얻고 육지의 물산을 제주로 실어와 팔기도 하였으니 그는 분명 물류경제에 눈을 뜬 상인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이러한 연유로 나는 대나무와 연관된 담양에 대해 글을 적게 되었으니 인연이라고 하는 끌림에 나의 상상력이 더해졌다. 담양은 지리적으로 추월산이라는 명산이 있고, 광주의 무등산과 연결되어 호남정맥이 통과하는 지역이다. 산수도 아름답고 대나무 바람처럼 청량한 선비정신이 깃든 곳이다.


나는 2004년 한창 남도를 기행 할 적에 담양 소쇄원을 찾아간 적이 있다. 소쇄원은 조광조의 제자 양산보가 스승이 유배 가고 사사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자연을 벗 삼아 살고자 조성한 원림이다. 소쇄(瀟灑)는 맑고 깨끗한 기운이 일어남을 말하며 대나무와 소나무 숲이 어우러져 불어온다. 양산보는 대나무를 청량한 선비정신의 표상으로 여기고 자신의 호를 소쇄옹이라고 하였다. 사람의 인생은 유한하며 살아가는 동안 권력과 부와 명예를 얻기 위하여 끊임없이 집착하며 경쟁한다. 그것이 무상함을 느낄 때에 비로소 자연 속에서 순리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는 진리를 얻는다. 조선시대의 당파싸움에 의한 사화로 많은 선비가 죽었다. 성리학의 이론논쟁을 시작으로 지역적인 분파로, 신진사류와 수구세력으로, 선비들이 갈라져서 권력을 장악하기 위하여 상대진영에게 무자비한 숙청을 단행하였던 것이다. 진리로서 승부가 결정되는 게 아닌 왕권의 향방에 따라 승자와 패자가 결정되기에 군주는 인의 장막에 가려져 올바른 정치를 펼쳐보기가 힘들었다.  


 그러면 선비가 숭상하던 유교의 4대 덕목인 인의예지가 그 의미를 상실하는 것이니 이것이야 말로 왕도정치가 아닌 패도정치인 것이다. 말로는 선비이지만 실상은 권력을 쟁취하려는 이전투구하는 소인배와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양산보는 이러한 세태에 절망하고 자연 속에서 안정을 취하고 진정한 삶의 행복이 어떤 것인가를 각성한다. 그것은 무위자연을 추구하는 도가사상이라고 믿는다. 고려조의 삼은이, 조선조의 생육신이 초야에 은거하며 권력과 담을 쌓고 유한한 삶을 깨달으며 살아갔던 동기와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러면 사람의 행복은 어디에서 나오며 어떻게 추구해야만 하는가에 대해서 나름대로 적어본다. 사람은 평상시에는 권력과 부와 명예의 달콤함에 취해 그것이 영원할 것이라는 착각 속에서 순간을 즐기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 달콤함은 지속적이지 못하고 어느 순간 허무로서 다가오고 만다. 욕망은 갈구할수록 더 목마르고 채울수록 더 결핍감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알면서도 벗어나지 못하고 습관적으로 욕망의 그물에 걸려 빠져나오지를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사건을 계기로 충격을 받고 그것의 덧없음을 알고 대처하려 하지만 인생의 종착점에 다가가기 때문에 이미 시기를 놓치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다. 극소수가 깨달음을 통해서, 나머지는 충격적인 사건을 통해서 실천에 옮기는 것이다. 깨달음에 이르는 사람을 도인이라 부르고, 충격으로 알아차리는 사람은 은자라고 부른다. 양산보도 스승의 죽음에 대한 충격을 받고 그것의 무상함을 알아차린 은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소쇄원을 탐방한 계기는 조광조의 비운을 보고 은둔의 길로 간 그의 제자인 양산보를 추상하려는 뜻에서 비롯되었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대참변과 사색당파의 폐해를 보고, 자신들이 숭상하는 유학이 국가를 지키고 민생을 돌본다는 덕목에 역행하고 있기에 안타까운 심정에서 탐방하기로 하였다. 국란을 당하고 국권을 상실한 원인이 그러하기에 그것에 대한 반성이 없이는 호국선열들의 정신을 저버리고, 조국광복을 위하여 몸 바친 선각자들과 의사들의 충정에 반하기에 소쇄원을 탐방하여 양산보의 자취를 찾아서 그의 은둔의 동기와 유유자적한 심경을 느껴보고자 함에 있었다.  


 자연을 벗 삼아 산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삶인가. 자연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꾸밈없이 보여주고 가지려고 모으려고 싸우지 않으며 서로 의지하며 공생하는 미덕을 가지고 있지 아니한가. 흘러가는 시냇물을 보고 인생유수를 생각하고 변하는 사계절을 보고 자연의 섭리를 깨닫게 한다. 자연은 묻지도 답하지도 않지만 항상 묻고 답하고 있으니 조용히 관조하면 내 마음의 고뇌를 씻어주는 시원한 바람으로 응답한다. 그러니 살려면 자연으로 돌아가라. 정 그럴 수 없다면 항상 자연을 바라보고 연상하며 그 청정하고 너른 품에 안겨보라.


 세속은 성공이니 실패니 하는 이분법으로 사람을 평가하지만, 자연은 나름대로의 삶을 존중하며 모두가 자신이 성공이라고 믿으면 성공이라고 판정해 준다. 개인의 삶은 나름대로의 신념과 믿음을 고유한 가치로 하는 자기만의 성채(城砦)가 있다. 아무리 세속에서 성공하였다고 평가하더라도 정작 본인의 고유한 가치가 없으면 그 성공은 공허한 것이 된다. 진정한 성공의 척도는 진리를 따라가는가,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있는가, 하늘에 부끄럼 없는 정직한 삶을 살았는가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대한 판정은 남이 아닌 스스로가 해야 하며 스스로는 자연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는 그 당시가 아닌 후일에 역사가 평가하며, 다수가 공감하므로 해서 완결된다. 그리고 아무리 훌륭하다고 포장하더라도 언젠가는 그 포장지가 찢어지면 그 허구와 기만이 드러나게 되니 역사는 진실을 언젠가는 찾아서 바로 기록될 수밖에 없다. 이 또한 판정기준은 섭리라고 하는 자연의 법칙이며, 본인이나 역사의 인물도 동일한 척도에 의해서 평가되니 자연을 배우고 외경심을 갖고 대해야 한다. 자연의 법칙은 진리와 순리를 기본으로 있는 그대로를 존중하고 평등과 존재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넓고도 깊은 포용력을 가지도 있는 것이다.


 진정 성공한 사람은 자신이 성공하였다고 내세우지 않으며 자신이 드러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반면 성공하였다고 내세우고 자신을 포장하며 나팔수를 동원하여 선전하려는 자는 성공이 아니라 실패한 것에 가까우리라. 그 성공의 이면에는 보이지 않은 편법과 이기심에 가득 차있으며, 상대를 배척하면서 스스로 승리의 고지에 깃발을 꽂았다고 억지로 우기는 경우와 같다. 스스로 부족하다고 말하는 자는 성공에 가까이 갈 수 있지만, 성공하였다고 말하는 자는 성공에 한참 멀어져 가게 되는 것이다. 겸양이 없이 쌓은 탑은 모래성과 다름없는 부실하고 허무한 것이다. 이 세상에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은 진정한 승자가 무수히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그나마 남은 인생을 가치 있게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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