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경주 최부자 가훈에 숨겨진 이야기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2010년 신년 초에 어느 TV방송에서 방영한 ‘名家’라고 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 첫 방송이 경주 최부자 가문에 관한 것이었다. 명가라고 하는 것은 이름 그대로 이름난 가문이지만, 흔히 말하는 권문세가와는 엄연히 다르다. 권문세가는 고관대작을 많이 배출한 가문이지, 사회에 본보기가 되는 노블레스오블리주를 실천한 명가는 아니다. 그런 점에서 경주 최부자 가문은 올바른 행실과 애국심, 동포애로 세상의 존경을 받았던 것이다. 최부자 가문이 명가를 이루게 된 것은 선대로 부터 내려온 가훈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경주 최부자를 한국의 노블레스오블리주의 효시로 만든 가훈은 어떤 것이며 그것이 끼친 영향은 어떤 것인가. 가훈은 가문이 지키고 지향해 나가야 할 덕목을 천명한 것으로 가문의 정신적 지주가 되는 경구라고 할 수 있다. 경주 최부자는 여섯가지 가훈을 정하여 후손들이 지켜나가도록 했다. 그 가훈별로 지향하는 가치를 적어본다.
첫째, “과거를 보되 진사이상은 하지 말라.” 는 권력에 대한 강한 경계로 당파싸움에 휘말려 멸문지화를 당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함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사화를 비롯한 사색당파에 의한 당쟁이 극에 달하여 반대세력에 대한 피의 숙청이 난무하여 가문을 보전하기가 어려웠다. 최부자의 선대는 이러한 폐해를 예방하고 순수한 선비정신을 기반으로 안정된 가문의 유지를 바랐다. 진사는 벼슬이 아닌 학문적 경지를 표상하는 칭호로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자신의 수양과 후진양성에 적합한 지위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재산은 만석이상은 모으지 마라.”는 재산축적의 한도를 정하여 과욕에서 비롯된 일탈과 양민들의 손해를 초래하지 않은 적정수준의 부를 유지하라는 의미이다. 사람은 재물욕을 제어하기가 어려워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갖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기 쉽다. 세상의 이치상 그런 것을 알지만 자발적 통제가 어렵기 때문에 가훈으로서 엄중히 경고함으로써 절제의 길로 갈수가 있는 것이다. 제 3자가 가르치려 하면 반발을 불러오기에 현재는 보이지 읺지만 선대의 가름침이라 하면 기꺼이 수용할 수 있다.
셋째,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는 지나가는 손님과 고객에게 편의를 잘 제공하라는 의미이다. 경주를 지나는 굶주린 유민과 방랑객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거래하는 고객을 후히 대접하여 자비를 베풀고 신뢰관계를 형성하여 상생의 미덕을 실천하라는 뜻이 있다. 모든 사람들을 고객으로 대우하려는 서비스 정신과 고객만족도를 높이라는 차원 높은 상거래 전략이라고 할수 있다.
넷째, “흉년 기에는 재산을 늘리지 말라.”는 백성들의 어려움을 이용하여 재산을 증식하는 부도덕한 행위를 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그 당시에 가뭄이나 자연 재해를 당하면 연명하기 위하여 관청으로 부터 환곡이나 개인 간에 장리를 내는 경우가 많았다. 현대의 고리채와 같은 것으로 상환을 위해 엄청난 손실을 보고 전답을 내놓은 경우가 있었다. 악덕지주들과 일부 사대부계층은 이를 재산증식의 기회로 삼아 양민들의 전답을 헐값으로 사들이는 경우가 많았다. 겉으로야 정상적인 상거래라 하지만 이면에는 약자의 곤궁함을 이용하여 보이지 않은 악행을 자행하였었다. 최부자는 이러한 양민들의 사정을 이해하여 오히려 소작료를 감해주고 땅을 살 때에도 제값을 치르는 선행을 하였던 것이다.
다섯째, “최씨 가문의 며느리들은 시집온 지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으라.”는 가문의 여인들을 중심으로 근검절약을 실천하도록 하는 의미이다. 가계를 운영하는 데는 여인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며 스스로 검소하고 절약하는 습관이 배여야 재산을 유지할 수 있다고 보았다. 사치나 낭비는 가문의 쇠락을 가져오는 부정적인 요소이기에 이를 경계토록 함이다. 이러한 기초가 이루어지면 남자들도 감화되어 근검절약을 통한 깨끗한 재산을 형성할 수 있다는 안목에서 비롯된 것으로 부의 원천은 절약에서 온다는 진리를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여섯째,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뭄과 재해로 기근에 허덕이는 민생을 적극적으로 돌보라는 강력한 권고이다. 최부자 가훈 중 대표적인 것으로 자비심의 극치를 표방한 감동적인 것이다. 그 당시에는 흉년이 들면 유랑하는 양민들이 넘쳐났으며, 장리같은 고리채로 악덕지주에게 전답을 빼앗겨 생계의 터전을 잃고 연명하는 소작인들의 고충은 헤아리기 힘들었다. 그래서 우선 경주를 중심으로 한 반경 백리 안에 있는 백성들이라도 구제해야 하겠다는 목표를 정하여 실천하도록 한 것이다.
이와 같이 경주 최부자는 가훈을 통하여 후손들을 정신적으로 교화시키고 물질적으로는 깨끗한 재산을 형성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나는 최부자 가훈 속에 깨달음의 진리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선대의 강력한 경구와 진정성이 있는 권고가 후대의 수양과 청정한 부의 형성에 결정적인 동기를 부여하였다고 여긴다.
최부자의 가훈 속에 포함되어 있는 사상에 대해 파헤쳐 보았다.
첫째로 선비사상이다. 선비는 학식은 있으나 벼슬하지 않는 사람이 본래 의미이다. 물론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로 나가는 경우가 있지만 최부자 가훈에는 벼슬길로 가는 것을 경계하였기에 사전적인 의미로 보아야 한다. 먼저 학식과 덕망을 길러 인격을 완성해 나가고 인의를 바탕으로 어짐과 의로움을 실천하라는 뜻이 어려 가훈에 함축되어 있다. 어짐은 자비로움이니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휼하고 의로움은 충의를 말함이니 국난을 만났을때 분연히 일어나라는 뜻이다. 최진립 장군이 임재왜란과 병자호란에 출전하여 목숨을 다 바치고 마지막 최부자인 최준 선생이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들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둘째로 자비사상의 실천이다.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훈은 자비사상의 극치를 보여준다. 경주는 불교의 성지이며 불국사, 석굴암 등 유적들이 많이 있고 원효대사의 무애행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불교의 최고의 가르침인 자비를 자연스럽게 접하여 실천하게 된 것이다. 초대 최부자인 국선은 “백성들이 굶어 죽어가는 데 나 혼자 잘 살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라고 말한데서 최부자 가문에 깊숙이 배인 자비사상을 짐작케 한다.
셋째로 실학사상이다. 실학파들은 주자학의 공리공론에서 벗어나 실사구시에 의한 실질적인 경제활동을 중시하였다. 신분차별을 타파하고 만민평등사상에 의하여 인권회복을 주장하였다. 최부자도 이러한 실학사상에 영향을 받아 노비문서를 불사르고 양반들이 금기시하던 상업에도 진출하는 등 고정관념을 벗어난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실천하였다. 축적한 부를 소작인들에게 적절이 분배하고 나라를 위하여 독립자금을 보내는 등 공동체에 대한 각성을 한 진취적인 가문이었다.
넷째로 인내천 사상이다. 최부자는 인내천이라는 동학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천도교의 창시자인 최재우가 같은 가문이라는 인연 외에 손병희 교주와의 교류에 의해 인내천사상을 실천하게 된 것이다. 마지막 최부자인 최준은 손병희의 영향을 받아 독립운동을 은밀히 지원하기도 하였다. 경주 지방에서 최초로 노비를 해방하고, 과객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것에서 인내천 사상을 엿볼 수가 있다.
마지막으로 경주 최부자의 가훈에 내포된 기업가로서의 경영사상을 현대적 관점에서 조명해 보았다.
첫째로 정경분리사상이다. “과거를 보되 진사이상은 하지 말라.”에서 보듯이 벼슬길에 나가지 말고 오로지 농업경영에 충실하라고 했다. 권력과 부를 동시에 추구하지 말고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존하면 정경유착으로 사회의 지탄을 받게 되고 공정경제에 해악을 끼치게 된다는 의미이다. 정경유착으로 점철된 현재의 재벌경영에 경종을 울리는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둘째로 적정이윤추구 사상이다. “재산을 만석이상 모으지 말라.”는 과도한 재산증식 대신에 꾸준하게 적정이윤을 추구하라는 뜻이다. 그리고 일시적 단기적인 이득보다는 장기적인 적정이익을 창출하여 지속가능한 경영을 해나가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독과점을 하지 말아 적정이윤을 추구함으로써 상생하는 경영을 하라는 뜻도 들어있다.
셋째로 고객중심사상이다.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는 과객은 고객이니 그들을 잘 대우하여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라는 의미이다. 상거래에서는 고객이 매우 중요하니 친절하고 정직하게 서비스하여 고정고객으로 확보하라는 뜻도 내포되어 있다고 보인다.
넷째로 상생경영사상이다. “흉년기에는 재산을 늘리지 말라.”는 소작인인 농민은 사용자와 고용관계에 있으니 그들을 공정하게 대하고 폭리를 취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경작노동자인 농민이 없으면 농업경영 자체가 불가능하니 약자인 농민들을 보호하고 이익을 적정하게 나누는 상생경영을 하라는 뜻이기도 하다.
다섯째로 근검절약 사상이다. “최씨 가문의 며느리들은 시집온 지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으라.”라는 근검절약하는 습관을 길러 저축하여 점진적으로 부를 축적해 나가라는 의미이다. 경영활동에서 원가를 절감하고 낭비요인을 없애라는 뜻도 있고 경영자가 솔선수범하면 종업원도 따라온다는 경영사상이기도 하다.
여섯째로 사회공헌활동사상이다.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사회적 약자를 구하는 노블레스오블리주를 실천하라는 의미이다. 가진 자들이 자신들의 오늘이 있기까지 희생한 못 가진자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도우라는 의미이다. 현대 경영에서 종업원의 복지후생을 챙기고 협력업체들을 지원하여 상생경영을 해나가라는 뜻이 있다.
최부자 가훈과 경영사상이 기업가정신에 미친 영향을 연구분석한 결과, 최부자 가훈을 알고 있는 기업가 일수록, 혁신적 사고를 가진 벤처기업가 일수록 사회적책임경영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훈이 미치는 영향이 개인의 수양을 넘어서 기업활동에도 영향을 끼치므로 가훈의 중요성을 재확인 할 수 있다. 그러니 물질만능주의 속에서 척박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위하여 '가훈 갖기 운동'을 적극 권장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나는 경주 최부자의 자비심과 애국심에 대해 느낀 점을 한수의 시조로 적어보았다.
반월성에 뜨는 달
선대가 내려주신 깊은 뜻 가훈 따라
기근에 창고 열어 약한 목숨 구하니
사방을 두루 비추는 반월성에 뜨는 달
나라를 빼앗겼네 왜란의 후손에게
선대가 싸웠듯이 가문 모두 일어나서
은밀히 자금을 모아 광복위해 바쳤네
이제는 마무리하자 그 동안 모은 재산
모으면서 베풀면서 잠시 동안 누린 복덕
모두 다 되돌려 주는 회향하는 마음으로
나는 말해본다. 최부자는 행복한 사람인가? 야심이 없는 소박한 사람인가? 아니면 진실한 사람인가? 모두 다 해당되지만 나는 먼저 깨달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깨달은 사람은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자신의 영혼을 정화시켜 진리에 따라 살아가려는 사람인 것이다. 재산도 권력도 언젠가 소멸하고 마는 허망한 것이기에, 영원히 살아 숨 쉬는 진리를 구하여 자기를 완성하려고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