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자비와 보은의 산실 경주를 찾아서
반월성에 뜨는 달
나는 자비와 보은의 산실인 경주를 찾아간다. 경주는 신라 천년의 고도요, 수많은 불교 유적이 산재하고 있는 역사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다. 곳곳에는 삼국유사의 설화가 숨 쉬고 있으며 원효대사의 무애행의 자비심이 깊숙이 배어 있는 곳이다. 불국사와 석굴암에는 김대성의 현생과 전생의 부모에 대한 보은의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감은사지와 대왕암에는 왜구에 대한 경계와 죽어서도 국토를 지키려는 문무대왕의 혼이 서려있다.
내가 경주를 자비와 보은의 산실이며 노블레스오블리주의 원류가 있다고 믿게 된 계기는 경주 최부자의 기업가 정신에 대한 논문을 쓰게 되면서부터이다. 경주 최부자의 가훈 중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자비심의 극치이자 노블레스오블리주의 실천으로 나의 마음에 각인되었다.
자료 수집과 최부자의 정신을 느끼기 위해서 수차례에 걸쳐 경주를 방문하였다. 최부자 고택은 반월성 옆 요석궁 터에 자리 잡고 있으며, 방문객의 편의를 위해 상시 개방되어 있다. 고택에 가보면 그 유명한 식량창고에 뚫린 조그만 구멍이 눈길을 끈다. 굶주린 양민들이 자신이 먹을 만큼의 곡식을 가져갈 수 있게 하여 그들의 자존심을 살려주는 배려가 돋보인다.
요석궁은 원효대사의 부인이자 설총의 어머니인 요석공주가 거처하던 곳으로 이곳이 후일 최부자의 별채가 되니 원효대사의 자비행과 소통하고 있는지 모른다. 원효대사는 대승기신론소를 지어 이론적 깊이에 중국에서도 논장(論藏)의 반열에 올려놓는 등 극찬을 받았으며, 그의 화쟁 및 무애사상은 깊은 각성에서 태어난 것이다. 일체무애인 일도출생사(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라고 하여 모든 것에 걸림이 없는 사람만이 한길로 생사를 벗어난다고 설파하였다. 무애란 그물에 걸리지 않은 바람처럼 어느 곳에도 머무름이 없이 자유자재로 행할 수 있음이니 그것이 바로 생사를 뛰어넘는 경지라고 말하고 있다.
다음으로 자주 찾게 된 곳은 불국사와 석굴암이다. 이 두 곳은 천년 고도의 불심이 어리고 김대성의 보은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겠다. 김대성은 현생의 어머니를 위해 불국사를 짓고 전생의 어머니를 위해 석굴암을 짓는다. 이러한 인연에 대한 은혜를 갚기 위한 불사이니 신심이 깊고 정성이 넘쳐흐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불국사의 다보탑과 석가탑, 청운교와 백운교의 예술성은 찬란한 불교건축의 금자탑이며, 석굴암에 모셔진 부처님의 온화한 미소는 조각미술의 극치를 보는 듯하다.
나는 마음이 울적하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을 때 주로 사찰을 찾는다. 부산 근교의 범어사와 통도사를 자주 가고 멀리는 경주의 불국사, 월악산의 미륵사를 가끔씩 순례하기도 한다. 부전역에서 출발하는 무궁화열차를 타고 불국사역에 내려 다보탑과 석가탑을 둘러보고 청운교와 백운교를 오르내리며 천년 전부터 불어오는 역사의 향기를 맡기도 하였다. 오래전에는 불국사 경내를 거처 토함산을 오르며 석굴암을 찾기도 하였다. 대부분은 불국사-석굴암 순환버스를 타고 접근하여 편리하게 순방하였다. 십여 년 전에는 두 번에 걸쳐 양북면에서 출발하여 장항사지를 거쳐 반대방향에서 토함산을 오르며 석굴암까지 다녀오기도 하여 불국사와 석굴암은 나의 주요 순례코스이자 재충전의 여행지이기도 하다.
토함산에서 바라보는 동쪽의 전망은 확 트이고 저 멀리 동해 바닷가의 감은사지와 대왕암, 이견대를 희미하게나마 그려볼 수 있다. 토함산은 일토월함(日吐月唅)이라하여 해를 토해내고 달을 삼킨다는 뜻을 가진 이름이다. 석굴암에서 바라보는 동해에서 벌겋게 빛을 토하며 솟아오르는 해와 동해 바닷가에서 바라볼 때 아름답고 은은한 달을 삼키는 듯한 산세의 묘함에서 비롯된 이름이리라. 그리고 동해바다로 용이 서서히 진입하는 형상의 대종천의 흐름도 함께 한다. 대종천은 범종이 묻혀있다는 하천으로, 왜구가 침범하여 기림사나 장항사의 대종을 옮기려다가 빠뜨려 묻혀 있다는 소문에 의해서 이름이 붙여진다. 그런 전설에 따라 해군에서 음파탐지기를 동원하여 장기간 탐사하였으나 지금까지 발견하지 못하였으니, 홍수에 그 무거운 종이 떠내려 갔거나 왜구가 운반하여 갔으면서도 혐의를 부인하기 위하여 강에 빠뜨렸다고 헛소문을 낸 것인지도 알 수가 없다.
북쪽으로는 함월산이 바라보이고 그 산 허리에는 선무도의 본산인 굴굴암이 자리하고 있다. 동해 쪽으로 대종천을 따라가면 양북면 해변가에는 감은사지가 있고 두 개의 쌍탑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고 진행 중인 보수 공사가 끝나가고 있다. 감은사는 신문왕이 선왕인 문무왕이 “자신은 죽어서 동해를 지키는 용이 되겠다.”는 은덕을 기리기 위해 지은 절이다. 그의 유언대로 바위섬의 수중릉에 안장되어 동해의 수호신이 되었다. 이와 함께 국도변에는 이견대가 자리 잡고 있으며 만파식적의 전설이 다가온다. 그 전설에 나오는 만파식적이란 바다의 신이 된 문무왕과 하늘의 신이 된 김유신이 보내온 대나무로 만든 피리를 통하여 나라의 우환을 잠재우고 백성을 통합하였다는 내용이다. 그 피리를 불면 만개의 파도가 잠잠해진다는 뜻에 나라의 안녕과 백성의 근심을 잠재우는 호국불교의 향취가 배어 있다. 모든 종교가 믿음을 기반으로 하듯이 불교는 경전을 기본으로 만파식적과 같은 방편을 통하여 포교를 하는 특성이 있다.
그리고 산 전체가 불교조각공원이라고 불리는 남산이 있다. 산 골짜기 곳곳의 암벽에는 마애불이 새겨져 천년의 세월을 인내하며 환한 미소로써 답하고 있다. 산 중턱에는 용장사와 천룡사가 자리 잡고 칠부능선에는 칠불암이 암벽을 등에 지고 저 멀리 토함산의 불국사와 정상부의 석굴암과 마주 보며 서라벌의 평화와 번영을 빌고 있는 듯하다. 남산은 조선시대에는 금오산이라고 하였고 김시습이 용장사에 은거하며 금오신화를 쓰고 세조의 찬탈에 대한 분심을 달래기도 하였다.
최부자 고택이 있는 반월성 인근의 국립경주박물관에는 봉덕사 대종 즉 에밀레종이 전시되어 있다. 에밀레종은 종에서 울려 나오는 맥놀이의 여운이 길고 은은하여 현대 기술로서도 재현하기 힘든 신비함을 간직하고 있다. 그 에밀레종의 제작과정에 대한 애절한 설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범종의 제작에는 인 성분이 필요하고 인신공양으로 종을 만들면 희생의 정신과 보시에 의한 자비심으로 훌륭한 범종이 탄생된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사실 관계를 떠나 동을 녹이는 과정에 소녀를 인신공양하였다는 설화가 생겨서 그 종소리가 ‘에밀레 에밀레’하고 퍼져 나가므로 에밀레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본래는 성덕대왕신종이다. 내가 에밀레종을 보고 적어놓은 시조를 한수 올려 본다.
에밀레종
봉덕사 종소리가 서라벌에 퍼져가면
애절한 목소리가 너울 속에 흐느끼니
수만 근 부은 쇳물은 생명 얻어 에밀레
구슬픈 울림 속에 소녀 얼굴 어리며
인당수 심청처럼 효도로서 몸 던져
생명이 흔적 있더냐 한 줄 연기가 전부요
슬픔은 여운 되어 바람결에 날려가고
비장한 종쟁이는 눈물 섞어 만들어
사라진 영혼 일어나 자명종이 되었네
이처럼 경주는 수많은 이야기의 소재를 갖고 있는 고장이다. 종교적으로는 불교가, 역사적으로는 신라가, 현실에서는 최부자가 경주를 각인시키고 있다. 작은 고도 경주이지만 그 푸근한 품 안에 품고 있는 정신은 방대하고 거창하며 장엄하기만 하다.
그 정신의 중심에는 경주 최부자가 있다. 최부자는 대대로 경주에 뿌리를 내려 살아오면서 지혜로운 안목으로 민생을 대하며 존경받는 가문을 이루었다. 가훈 중 6훈에는 “진사이상은 벼슬을 하지 마라.”는 권력을 탐하지 말고 오직 본업인 농업에 충실하라는 엄중한 경구로 해석된다. 조선시대 대부분의 사대부가는 권력과 명예와 부를 다 가지려는 욕망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초대 최부자는 권력무상과 명예의 덧없음을 알고 지혜로운 판단을 하였다. 당파싸움에 의한 사화로 수많은 선비가 죽고 유배를 가고 멸문지화가 된 사례를 보고 민생구제라는 자비의 길을 가게 된다.
그리고 최부자 가훈 형성에 영향을 끼친 인물로 ‘최진립’ 장군이 있다. 그는 관직에 있을 때 청백리로 선정되었으며,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으로 출전하였고, 병자호란 때에는 노비들을 이끌고 분전하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그의 청렴성과 희생정신은 후일 최부자의 정신적 지주로서 아름다운 부의 형성과 마무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마지막 최부자인 ‘최준’ 선생은 독립운동자금을 은밀히 제공하여 최진립 장군의 구국정신과 연결되고 있다.
최부자의 근본적인 정신적 지주는 선비정신과 불교사상, 동학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유교의 인의를 바탕으로 한 선비정신은 사대부가는 물론 양민에게 중요한 덕목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지극한 仁은 지극한 義를 낳는다는 인의사상은 구국의 길인 의병활동과 독립운동으로 연결된다. 불교사상은 자비심의 극치인 가훈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인내천의 동학사상은 최제우, 손병희와의 교류로 짐작할 수 있다.